카테고리 없음

위빠사나 / 관찰 수행의 자세---<1>

일념법진원 2009. 6. 28. 07:55

---붓다, 부처님에 대한 이해---

 

 '도를 닦는 사람들' 이 많아지는 이유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질을 알려하는 욕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일상을 통하여 욕망이 걸코 만족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간파한 사람들일 수도 있으나, 대부분은 지금의 나에서 탈피하여 좀더 특별한 나의 완성을 위한 목적으로 수행을 하게 된다.

누군가로 부터 끌어모은 알음알이, 몇 가지에 집착하고 의지하여, 더 큰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경의 어느 한구절, 또는 몇 구절에 의해서 "나도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깊은 뜻?을 품고 수행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위빠사나라는 방법을 나열한 앎의 집착에 따른 구속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이것이 종교의 문제이다.

부처님을 모신다는 말,,,,,

부처님의 가피로 해탈하겠다는 욕망.......

신을 열망함,,,,,,

 

마음은 미묘하여 불가의 세뇌에 의해서 석가모니의 실체를 위대한 인물로 알고 있으며, 감히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게 한다.

"나는 안될 것이다" 라는 마음이면서 수행을 하는 일은 미친 짓이다.

종교에 의해 그렇게 길들여진 탓이다.

종교의 허상이다.

 

수행을 통하여 에고인 나를 버리고 거듭난 인물들의 말은 "불이 일원론"에 대한 연설이었다. 

노자와 장자, 예수와 석가모니, 소크라테스와 아인슈타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헤르만 헷세,,,,, 까비르, 등 등.......

상카라의 불이 일원론에서 설명된 불이법의 연설이다.

이기주의인 에고를 초월하여 분별된 언어, 즉 인간의 모든 앎이 허구임을 말하면서 진리의 길을 연설하였다.

 

본질은 "아무것도 없음", 이지만 에고인 나는 "아무것도 없음" 에 대해서 짐작도 상상도 할 수가 없다.

에고의 나가 있기에, 실존이기에 대상이 존재하는 것이며,

생각의 이치를 깨우침, 즉 깨달음의 정점인 삼매에서는 에고인 나를 비롯한 현상계의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없음" 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환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위빠사나라는 자신의 행위를 관찰하는 방법의 수행 방법은 초기경전을 통해서 석가모니의 깨달음의 과정에 대한 설명에 대한 에고의 그릇된 이해에 의해 만들어진 방법이다. 

 

참으로 인간의 어리석음은 위빠사나라는 수행의 방법만이 옳다는 고정관념이다.

생각의 이치를 깨우치지 못한 또 다른 이기주의자에 의해서 쓰여진 편협된 글이기에 에고는 그 말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가장 심각한 어리석음은,

석가모니의 깨달음과 다른 사람들의 깨달음이 차원이 다를 것이라는 그릇된 견해이다.

깨달음은 에고의 분별된 판단일 지라도 불이법을 완성한 인물의 설명에 의해서 이해는 가능한 것이다. 

모든 깨달음을 성취한 인물들의 말이 "불이 일원론"의 연설이다. 

깨달음이 크거나, 작거나, 또는 여러가지의 형태가 있다면 "불이법"에도 어긋나지 않겠는가.  

 

달마나 혜능선사 등의 말들이 불이 일원론이지만,,,,, 종교에 흡수되었기에, 또는 그 시대의 여건에 따라서 숨겨진 것이기에 에고의 분별로는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에 의해서 석가모니만이 최고의 깨달음으로 간주되어 왔으며, 지성이 최고의 수준인 현 시대에서도 세뇌당한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곳의 글을 통하여 깨달은 인물들의 연설이 "불이 일원론"에 근거한 것임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수행은 정신 질환으로 가는 지름길일 수 밖에 없다.  

무속인이 산신을 받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무엇을 구걸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일,

자비를 달라고 돌덩이 앞에서 절을 하는 일 따위......

 

"불이 일원론"의 연설에 대해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나, 이치를 깨우친 인물의 설명을 들음으로서 불이법이다, 또는 아니다 라는 분별을 할 수는 있을 것이기에 ' 깨달음의 실체를 밝힌다' 라는 저서와 이곳에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석가모니와 예수의 시대는 인류의 태초와 다름없이 원시시대 이전의 동물들과 다름없는 시대였다.

문자도 없던 시대의 글들이 신비로움으로 포장되어 우상을 숭배하게 되면서 석가모니와 예수를 신으로 오인하고 있다.

 

물론 생각의 이치를 깨우침은 인격신이다.

에고의 시작도 끝도 없는 생각의 환영에서 존재하는 현상계와 신의 존재를 간파하여 세상사 모든 이치를 꿰뚫어 아는 지혜를 증득하기 때문이며, 이를 진리라 이름하였다.

 

위빠사나라고 이름지어진 자신의 행위를 관찰하는 방법이 석가모니와 예수 등의 시대, 또는 노자와 장자의 시대에 알려진 수행방법이며, 더욱 진화된 방법이 '화두공안' 이라는 일념의 수행방법이다.

특히 1950년대에 육체를 버린 '나는 누구인가' 의 저자인 인도의 라마나 마하리쉬의 글을 통해서도 화두에 대한 개념이 들어 있음을 간파할 수가 있을 것이다.

 

모든 방법이 옳지만 옳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수행을 하는 목적과 가는 길에 대한 분명한 이치를 이해하지 못함에 있다.

 

이곳에 "마음과 생각", 그리고 "나는 무엇인가", "나는 이런사람이다 의 허구"등에 대한 많은 글들이 있다.

그대의 나는 어릴때 부터 세뇌된 것이며, 지성체인 자신의 모든 앎이 허구였음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만 된다.

그대의 모든 앎은 앞서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름지어진 것들에 대해서 세뇌된 것이기에 어떤 낱말 하나라도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하나의 사례만 들어본다.

불교에 세뇌된 자들이 팔정도를 말하지만,,,,,,

팔정도는 바른 생각을 뜻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른 생각인가? 

그대의 나는 '바른 생각' 무엇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정의할 수 있는가?

 

스스로 자문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그 답을 스스로 찾을 수 없다면, 수행을 해서는 아니된다.

집착과 욕망을 버리지 못함에서의 수행의 결과는 빙의, 신내림, 접신, 강신, 상기병, 주화입마 등의 정신질환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마음을 형성하게 했던 생각의 속성과 이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난 이후에라야 비로소 수행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면,,,,,

무지하던지.

 

---다음편에는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