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는 이기주의이다.
개체적 자아, 즉 이기주의자와 이기주의자의 모임이 사회이며 인류이다.
이기주의라 함은 자신의 나만을 위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리고 자아는 실존이다.
다른 물건들은 대체되거나 만들어질 수 있는 것들이기에 실존일 수 없다.
오직 개체적 자아는 대체될 수 없기에 실존이다.
다른 나를 대신해서 살 수도 없으며 다른 나를 대신해서 죽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성인, 스승으로 알려진 4대 성인들, 그들은 왜 인류의 스승이 되어 있는가?
그들은 모두가 불이 일원론을 연설하였다.
나와 너가 둘이 아니며 하나이다.
육체는 질그릇과 같은 것이며, 손톱위에 올려놓은 흙만큼도 나라고 할 것이 없다. 라고 말하였다.
너와 하나님이 둘이 아니다.
너와 이웃이 둘이 아니다.
너와 우주가 둘이 아니다...... 그것이 너의 본성,,,,, 인간의 본래성품이며 부처이다. 라고 하였다.
인간은 지성체이다.
지성과 육체가 하나가 되어서 나는 이런사람이다, 또는 나는 저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자신만의 고정관념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성인이라고 불리는 인물들은 나는 이런사람이다, 라는 지성체를 벗어난 인물들이다.
지성은 경험된 기억세포의 작용에 의해서 나는 이런사람이다 라는 고정관념이다.
시간도 공간도, 현상계까지도 보는자의 지성, 경험된 지식의 수준에 따라서 다르게 보인다.
옳고 그름, 착하고 악함, 좋고 나쁨,,,,,, 모든 분별은 자신의 지식에 의한 자신만의 분별된 생각이기에 사람마다 그 기준이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불이법을 연설했던 인물들은 일체 유심조를 통하여 모든 것이 마음이 지어놓은 환상이기에 그 환상의 세계, 즉 나는 이런사람이다(지성의 허구) 라는 현실세계를 꿈이라고 말하였으며, 꿈에서 깨어남, 사람이 거듭남에 대해서 천국, 해탈, 구원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대의 나는 어떤 사람인가?
경험과 분리된 순수의식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는가?
마음은 기억된 생각의 집적물이기에 경험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가 없다.
경험과 유사한 생각을 할 수는 있지만, 경험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상상불가이다.
순수의식으로 비유할 수 있는 어린아이에게는 나라는 것이 없다.
깊은 잠속에서도 나라는 것이 없다.
이런 상태를 '무아' 라고 표현될 수는 있다.
아무것도 없음이지만 표현하는 내가 있기에 아무것도 없음을 표현할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와 석가모니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라고 하였다,
이는 생각의 이치를 알아차림(깨달음)에 따른 표현으로서 지식, 지성의 모든 앎이 허구였음을 알아차림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
앎을 모를 줄 앎이 지혜이다 라는 말이다.
언어는 분별을 위한 표현이기에 무력하다는 말이며,,,,, 모든 분별함이 허구라는 말이다.
일념의 성취는 지성을 무력화 시키기 위한 것이며,
인간이 육체에 얽매어 있는 동안의 최고의 정신집중 상태에서 실재와의 합일됨을 위한 것이다.
실체와의 합일됨에서는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같이 분별할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에고의 이해를 넘어선 불경과,,,,,,, 불이 일원론의 연설은 지성의 죽음에서 나오는 말이기에 분별함이 없음의 표현들이다.
지금,
나는 이런사람이다, 라는 자신만의 고정관념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것인지 되짚어 볼 수는 있다.
아이적에는 내가 아이인지 모른다.
지속적인 학습에 의해서 나는 아이이고,,,,,, 엄마이고, 아빠이고,,,,,, 당연시 하기에 이른다.
그 시기에 엄마와 아빠가 바뀌어도 전혀 기억할 수가 없다.
순수한 시기, 즉 나다, 너다라는 분별이 확고하게 자리잡기 이전의 시기이다.
철수라는 이름을 지어서 부르다 보니,,,,,, 나는 철수이다 라고 알게 된다.
그래, 나는 철수다,,,,, 나는 초등학생이며, 철수다,,,,,,, 이것이 나는 이런사람이다의 시작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학습을 통하여 사회에서 요구하는 이상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다른 나들과 경쟁을 강요당한다.
행복, 성공, 불행, 자유, 구속......
이렇듯 지식으로 무장된 것이,,,,,,, 나는 이런사람이다, 라는 고정된 관념이다.
모두가 나는 이런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의 범위에서 벗어남을 두려워 하게 된 것이다.
지성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기에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종교를 알기 전에는 종교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알고난 이후에는 나는 종교인이다, 라는 고정관념이 생겨났다.
석가모니와 예수의 본질은 불이일원론의 연설이기에 다르게 보이지만 다르지 않으며, 소크라테스와 노자의 '도' 의 뜻도 이와 다르지 않지만,,,,,,
자신의 고정관념의 깨어짐이 두려운 나머지 다른 나들의 앎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완곡하게 반론을 제기하게 된다.
그대의 나는 어떠한 고정관념에서 해메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음은 욕망이며, 욕망은 학습된 기억세포의 작용이다.
생각은 기억세포의 바탕, 즉 경험된 부분들을 바탕으로 행위하지만, 에고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는 무지하기에 신으로 표현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성체는 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신의 실체을 알아차린 인물들이 불이 일원론을 연설한 것이다.
마음은 기억세포의 작용이며, 생각은 기억세포의 범위와 또는 유사한 범위를 방황하는 신이다.
일념의 지속됨은 기억세포의 힘을 무력화 시킴으로 하여 일념의 무념처인 삼매에서는 경험된 모든 앎, 지성이 소멸된다.
삶, 죽음, 영혼, 귀신, 천국, 지옥, 인생, 존재,,,, 등의 모든 앎은 타인으로부터 들어서 알았던 지식이며, 인간은 지식의 다발인 지성과 나를 동일시 함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이를 망아, 그릇된 나, 가아,,, 등으로 표현되는 것이며, 이를 벗어남을 무아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 고통과 번뇌,,,,, 인생, 우주,,,,, 이런 모든 것들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고통의 소멸도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너무나도 같추린 내용이기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는 자들은 시시비비를 가리려 할 것이다.
부처님 말씀, 예수님 말씀을 들먹일 것이나,,,,,, 숙고해 보면 이해는 가능 할 것이다.
이치라도 이해하여 고정관념을 버리고 이웃과 내가 하나이기에,. 나와 너가 하나임을 일깨워서 서로 다투지 말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라는 가르침이 석가모니와 예수의 가르침의 본질이며,,,,,,
가슴깊이 이해하고 이치를 증득하여 참다운 나를 찾기 위함이 인생의 목적임을 깨우친다면,,,,,, 스스로 신임을 깨우치는 것이다.
정도란 바른 생각이며, 바른 생각이라 함은 개체적 자아의 학습된 기억세포의 작용이기에 모두가 다를 수 밖에 없다, 정도와 오도는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며, 이해와 오해 역시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다.
자신의 경험에 의한 자신만의 앎이기에,,,,,,
자아는 이기주의이다.
개체적 자아, 즉 이기주의자와 이기주의자의 모임이 사회이며 인류이다.
이기주의라 함은 자신의 나만을 위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리고 자아는 실존이다.
다른 물건들은 대체되거나 만들어질 수 있는 것들이기에 실존일 수 없다.
오직 개체적 자아는 대체될 수 없기에 실존이다.
다른 나를 대신해서 살 수도 없으며 다른 나를 대신해서 죽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성인, 스승으로 알려진 4대 성인들, 그들은 왜 인류의 스승이 되어 있는가?
그들은 모두가 불이 일원론을 연설하였다.
나와 너가 둘이 아니며 하나이다.
육체는 질그릇과 같은 것이며, 손톱위에 올려놓은 흙만큼도 나라고 할 것이 없다. 라고 말하였다.
너와 하나님이 둘이 아니다.
너와 이웃이 둘이 아니다.
너와 우주가 둘이 아니다...... 그것이 너의 본성,,,,, 인간의 본래성품이며 부처이다. 라고 하였다.
인간은 지성체이다.
지성과 육체가 하나가 되어서 나는 이런사람이다, 또는 나는 저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자신만의 고정관념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성인이라고 불리는 인물들은 나는 이런사람이다, 라는 지성체를 벗어난 인물들이다.
지성은 경험된 기억세포의 작용에 의해서 나는 이런사람이다 라는 고정관념이다.
시간도 공간도, 현상계까지도 보는자의 지성, 경험된 지식의 수준에 따라서 다르게 보인다.
옳고 그름, 착하고 악함, 좋고 나쁨,,,,,, 모든 분별은 자신의 지식에 의한 자신만의 분별된 생각이기에 사람마다 그 기준이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불이법을 연설했던 인물들은 일체 유심조를 통하여 모든 것이 마음이 지어놓은 환상이기에 그 환상의 세계, 즉 나는 이런사람이다(지성의 허구) 라는 현실세계를 꿈이라고 말하였으며, 꿈에서 깨어남, 사람이 거듭남에 대해서 천국, 해탈, 구원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대의 나는 어떤 사람인가?
경험과 분리된 순수의식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는가?
마음은 기억된 생각의 집적물이기에 경험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가 없다.
경험과 유사한 생각을 할 수는 있지만, 경험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상상불가이다.
순수의식으로 비유할 수 있는 어린아이에게는 나라는 것이 없다.
깊은 잠속에서도 나라는 것이 없다.
이런 상태를 '무아' 라고 표현될 수는 있다.
아무것도 없음이지만 표현하는 내가 있기에 아무것도 없음을 표현할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와 석가모니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라고 하였다,
이는 생각의 이치를 알아차림(깨달음)에 따른 표현으로서 지식, 지성의 모든 앎이 허구였음을 알아차림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
앎을 모를 줄 앎이 지혜이다 라는 말이다.
언어는 분별을 위한 표현이기에 무력하다는 말이며,,,,, 모든 분별함이 허구라는 말이다.
일념의 성취는 지성을 무력화 시키기 위한 것이며,
인간이 육체에 얽매어 있는 동안의 최고의 정신집중 상태에서 실재와의 합일됨을 위한 것이다.
실체와의 합일됨에서는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같이 분별할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에고의 이해를 넘어선 불경과,,,,,,, 불이 일원론의 연설은 지성의 죽음에서 나오는 말이기에 분별함이 없음의 표현들이다.
지금,
나는 이런사람이다, 라는 자신만의 고정관념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것인지 되짚어 볼 수는 있다.
아이적에는 내가 아이인지 모른다.
지속적인 학습에 의해서 나는 아이이고,,,,,, 엄마이고, 아빠이고,,,,,, 당연시 하기에 이른다.
그 시기에 엄마와 아빠가 바뀌어도 전혀 기억할 수가 없다.
순수한 시기, 즉 나다, 너다라는 분별이 확고하게 자리잡기 이전의 시기이다.
철수라는 이름을 지어서 부르다 보니,,,,,, 나는 철수이다 라고 알게 된다.
그래, 나는 철수다,,,,, 나는 초등학생이며, 철수다,,,,,,, 이것이 나는 이런사람이다의 시작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학습을 통하여 사회에서 요구하는 이상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다른 나들과 경쟁을 강요당한다.
행복, 성공, 불행, 자유, 구속......
이렇듯 지식으로 무장된 것이,,,,,,, 나는 이런사람이다, 라는 고정된 관념이다.
모두가 나는 이런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의 범위에서 벗어남을 두려워 하게 된 것이다.
지성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기에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종교를 알기 전에는 종교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알고난 이후에는 나는 종교인이다, 라는 고정관념이 생겨났다.
석가모니와 예수의 본질은 불이일원론의 연설이기에 다르게 보이지만 다르지 않으며, 소크라테스와 노자의 '도' 의 뜻도 이와 다르지 않지만,,,,,,
자신의 고정관념의 깨어짐이 두려운 나머지 다른 나들의 앎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완곡하게 반론을 제기하게 된다.
그대의 나는 어떠한 고정관념에서 해메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음은 욕망이며, 욕망은 학습된 기억세포의 작용이다.
생각은 기억세포의 바탕, 즉 경험된 부분들을 바탕으로 행위하지만, 에고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는 무지하기에 신으로 표현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성체는 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신의 실체을 알아차린 인물들이 불이 일원론을 연설한 것이다.
마음은 기억세포의 작용이며, 생각은 기억세포의 범위와 또는 유사한 범위를 방황하는 신이다.
일념의 지속됨은 기억세포의 힘을 무력화 시킴으로 하여 일념의 무념처인 삼매에서는 경험된 모든 앎, 지성이 소멸된다.
삶, 죽음, 영혼, 귀신, 천국, 지옥, 인생, 존재,,,, 등의 모든 앎은 타인으로부터 들어서 알았던 지식이며, 인간은 지식의 다발인 지성과 나를 동일시 함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이를 망아, 그릇된 나, 가아,,, 등으로 표현되는 것이며, 이를 벗어남을 무아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 고통과 번뇌,,,,, 인생, 우주,,,,, 이런 모든 것들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고통의 소멸도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너무나도 같추린 내용이기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는 자들은 시시비비를 가리려 할 것이다.
부처님 말씀, 예수님 말씀을 들먹일 것이나,,,,,, 숙고해 보면 이해는 가능 할 것이다.
이치라도 이해하여 고정관념을 버리고 이웃과 내가 하나이기에,. 나와 너가 하나임을 일깨워서 서로 다투지 말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라는 가르침이 석가모니와 예수의 가르침의 본질이며,,,,,,
가슴깊이 이해하고 이치를 증득하여 참다운 나를 찾기 위함이 인생의 목적임을 깨우친다면,,,,,, 스스로 신임을 깨우치는 것이다.
정도란 바른 생각이며, 바른 생각이라 함은 개체적 자아의 학습된 기억세포의 작용이기에 모두가 다를 수 밖에 없다, 정도와 오도는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며, 이해와 오해 역시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다.
자신의 경험에 의한 자신만의 앎이기에,,,,,,
자아는 이기주의이다.
개체적 자아, 즉 이기주의자와 이기주의자의 모임이 사회이며 인류이다.
이기주의라 함은 자신의 나만을 위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리고 자아는 실존이다.
다른 물건들은 대체되거나 만들어질 수 있는 것들이기에 실존일 수 없다.
오직 개체적 자아는 대체될 수 없기에 실존이다.
다른 나를 대신해서 살 수도 없으며 다른 나를 대신해서 죽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성인, 스승으로 알려진 4대 성인들, 그들은 왜 인류의 스승이 되어 있는가?
그들은 모두가 불이 일원론을 연설하였다.
나와 너가 둘이 아니며 하나이다.
육체는 질그릇과 같은 것이며, 손톱위에 올려놓은 흙만큼도 나라고 할 것이 없다. 라고 말하였다.
너와 하나님이 둘이 아니다.
너와 이웃이 둘이 아니다.
너와 우주가 둘이 아니다...... 그것이 너의 본성,,,,, 인간의 본래성품이며 부처이다. 라고 하였다.
인간은 지성체이다.
지성과 육체가 하나가 되어서 나는 이런사람이다, 또는 나는 저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자신만의 고정관념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성인이라고 불리는 인물들은 나는 이런사람이다, 라는 지성체를 벗어난 인물들이다.
지성은 경험된 기억세포의 작용에 의해서 나는 이런사람이다 라는 고정관념이다.
시간도 공간도, 현상계까지도 보는자의 지성, 경험된 지식의 수준에 따라서 다르게 보인다.
옳고 그름, 착하고 악함, 좋고 나쁨,,,,,, 모든 분별은 자신의 지식에 의한 자신만의 분별된 생각이기에 사람마다 그 기준이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불이법을 연설했던 인물들은 일체 유심조를 통하여 모든 것이 마음이 지어놓은 환상이기에 그 환상의 세계, 즉 나는 이런사람이다(지성의 허구) 라는 현실세계를 꿈이라고 말하였으며, 꿈에서 깨어남, 사람이 거듭남에 대해서 천국, 해탈, 구원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대의 나는 어떤 사람인가?
경험과 분리된 순수의식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는가?
마음은 기억된 생각의 집적물이기에 경험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가 없다.
경험과 유사한 생각을 할 수는 있지만, 경험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상상불가이다.
순수의식으로 비유할 수 있는 어린아이에게는 나라는 것이 없다.
깊은 잠속에서도 나라는 것이 없다.
이런 상태를 '무아' 라고 표현될 수는 있다.
아무것도 없음이지만 표현하는 내가 있기에 아무것도 없음을 표현할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와 석가모니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라고 하였다,
이는 생각의 이치를 알아차림(깨달음)에 따른 표현으로서 지식, 지성의 모든 앎이 허구였음을 알아차림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
앎을 모를 줄 앎이 지혜이다 라는 말이다.
언어는 분별을 위한 표현이기에 무력하다는 말이며,,,,, 모든 분별함이 허구라는 말이다.
일념의 성취는 지성을 무력화 시키기 위한 것이며,
인간이 육체에 얽매어 있는 동안의 최고의 정신집중 상태에서 실재와의 합일됨을 위한 것이다.
실체와의 합일됨에서는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같이 분별할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에고의 이해를 넘어선 불경과,,,,,,, 불이 일원론의 연설은 지성의 죽음에서 나오는 말이기에 분별함이 없음의 표현들이다.
지금,
나는 이런사람이다, 라는 자신만의 고정관념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것인지 되짚어 볼 수는 있다.
아이적에는 내가 아이인지 모른다.
지속적인 학습에 의해서 나는 아이이고,,,,,, 엄마이고, 아빠이고,,,,,, 당연시 하기에 이른다.
그 시기에 엄마와 아빠가 바뀌어도 전혀 기억할 수가 없다.
순수한 시기, 즉 나다, 너다라는 분별이 확고하게 자리잡기 이전의 시기이다.
철수라는 이름을 지어서 부르다 보니,,,,,, 나는 철수이다 라고 알게 된다.
그래, 나는 철수다,,,,, 나는 초등학생이며, 철수다,,,,,,, 이것이 나는 이런사람이다의 시작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학습을 통하여 사회에서 요구하는 이상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다른 나들과 경쟁을 강요당한다.
행복, 성공, 불행, 자유, 구속......
이렇듯 지식으로 무장된 것이,,,,,,, 나는 이런사람이다, 라는 고정된 관념이다.
모두가 나는 이런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의 범위에서 벗어남을 두려워 하게 된 것이다.
지성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기에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종교를 알기 전에는 종교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알고난 이후에는 나는 종교인이다, 라는 고정관념이 생겨났다.
석가모니와 예수의 본질은 불이일원론의 연설이기에 다르게 보이지만 다르지 않으며, 소크라테스와 노자의 '도' 의 뜻도 이와 다르지 않지만,,,,,,
자신의 고정관념의 깨어짐이 두려운 나머지 다른 나들의 앎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완곡하게 반론을 제기하게 된다.
그대의 나는 어떠한 고정관념에서 해메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음은 욕망이며, 욕망은 학습된 기억세포의 작용이다.
생각은 기억세포의 바탕, 즉 경험된 부분들을 바탕으로 행위하지만, 에고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는 무지하기에 신으로 표현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성체는 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신의 실체을 알아차린 인물들이 불이 일원론을 연설한 것이다.
마음은 기억세포의 작용이며, 생각은 기억세포의 범위와 또는 유사한 범위를 방황하는 신이다.
일념의 지속됨은 기억세포의 힘을 무력화 시킴으로 하여 일념의 무념처인 삼매에서는 경험된 모든 앎, 지성이 소멸된다.
삶, 죽음, 영혼, 귀신, 천국, 지옥, 인생, 존재,,,, 등의 모든 앎은 타인으로부터 들어서 알았던 지식이며, 인간은 지식의 다발인 지성과 나를 동일시 함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이를 망아, 그릇된 나, 가아,,, 등으로 표현되는 것이며, 이를 벗어남을 무아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 고통과 번뇌,,,,, 인생, 우주,,,,, 이런 모든 것들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고통의 소멸도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너무나도 같추린 내용이기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는 자들은 시시비비를 가리려 할 것이다.
부처님 말씀, 예수님 말씀을 들먹일 것이나,,,,,, 숙고해 보면 이해는 가능 할 것이다.
이치라도 이해하여 고정관념을 버리고 이웃과 내가 하나이기에,. 나와 너가 하나임을 일깨워서 서로 다투지 말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라는 가르침이 석가모니와 예수의 가르침의 본질이며,,,,,,
가슴깊이 이해하고 이치를 증득하여 참다운 나를 찾기 위함이 인생의 목적임을 깨우친다면,,,,,, 스스로 신임을 깨우치는 것이다.
정도란 바른 생각이며, 바른 생각이라 함은 개체적 자아의 학습된 기억세포의 작용이기에 모두가 다를 수 밖에 없다, 정도와 오도는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며, 이해와 오해 역시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다.
자신의 경험에 의한 자신만의 앎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