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지혜라 하는가?
항상 신발을 신겨주어야만 했던 어린아이가,
어느날....... 내가 할거야, 라면서 스스로 신발을 신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부모는 빙긋이 미소를 짓는다.
허허,,, 이 녀석이 이제 신발도 신을 줄 아는구먼......
이날부터 부모들의 하는 짓을 보며 그들을 닮아갈 것이다.
그 부모는,
너는 나처럼 고생하지 말고 살아라...... 라고 말할 것이다.
아이도 자라면서, 나는 엄마처럼, 아빠처럼은 살지 않을테야....... 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태고부터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길들여진 것이 지금의 '나는 이런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나이다.
신발을 신을 줄 앎은 하나의 지식이다.
신발을 왜 신어야 되는지, 어떻게 신는 것인지, 어떻게 신는 것이 바로 신는 것인지를 배운 것이다.
그런데, 아직은 신발의 왼쪽과 오른쪽을 분별하지 못한다.
물론 좀더 지나면서, 또는 몇차례 더 방법을 알려줌으로서 확신을 가진다.
당연시 하는 것이다.
만약에 장난꾸러기가 있어서 거꾸로 신었을때에 발이 편하도록 신발의 모양을 바꾸어서 만들었다 하더라도 한번 세뇌된 기억, 즉 고정관념인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절대로 신발을 바꾸어 신지는 않을 것이다.
신발을 바꾸어 신고서 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발이 불편하더라도......
차라리 신발의 겉모양을 바꾸려 하든지, 발이 아프더라도 거꾸로 신을 것이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의 허상이다.
자신의 행복이나 평화로움이 타인들의 시선에 의해서 결정됨을 당연시 하는 시대이다. 허헛
신발을 바꾸어 신어도 모르던 아이가 신발을 바로 신는 방법을 배운 후에는 자신이 그렇게 배웠다는 것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어버린다.
모든 사람들이 신발을 거꾸로 신다가, 바로 신는 방법을 배워서 그것을 당연시 하며.......신발을 거꾸로 신는 사람을 바보취급하듯이 '나는 이런사람이다' 라는 허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것이 마음이며, 고정관념이다.
이제 신발을 바로 신을 줄 아는 어린아이가 신발을 거꾸로 신는 아이에게 비난을 서슴치 않는다.
그런데 비난받는 다른 아이는, 자신의 아빠가 장난삼아서 거꾸로 신는 신발을 만들어 주었음을 알기에 보기와는 다르게 현안한 신발을 신고 있었다.
남을 비난하는 아이는 자신의 앎, 신발의 겉모양만을 배웠기에 자신의 앎이, 지식이 바로아는 앎이라는 착각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기억에 의한 앎이 옳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대의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는가?
모든 대상의 실재를 볼 수 있는 사람,
대상물질의 모양과 사람들의 겉모습에 속지 않는 사람이다.
다른 나를 부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잘한다, 못한다는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이 기억된 생각의 작용에 의한, 고정관념임을 깨우친 사람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을, 모든 대상을 신뢰할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에게 어찌 기쁨이 따르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을 무지한 사람이라고 하는가?
자신만의 앎이 옳다며 고집하며 논쟁, 투쟁하는 사람이다.
자신만의 삶을 통하여서 타인으로부터 끌어모은 지식 나부랭이를 자신만의 앎, 지성으로 착각하는 사람이다.
생각을 넘어섰기에 불립문자라는 말로 표현하는 불경을 아는 척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를 모르면서 예수와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이다.
너는 왜 모르느냐고 남을 질타하고 모욕하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다.
거짓으로 다른 사람들을 현혹케 하여 세력을 확장하는 무리들이다.
종교들과 같이......
석가모니도 예수도......
같은 말을 하였다.
윤회가 없기에 영혼도 없는 것이며, 환생이나, 귀신이나 성령이나, 조상신이나........ 그런 것들은 마음의 환영이라고 하였다.
죽음에 두려워 나약해진 욕망에서 비롯된 환상인 것이다.
불이론을 연설했던 인물들.......
그들은 인류에게 자신들의 깨달음을 전파하였다.
자아는 이기주의적일 수 밖에 없기에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여서 이웃을 먼저 배려하는 삶이 평화라고 한 것이다.
이기주의에서 벗어났기에, 거짓된 나에서 벗어남에 대한 진리의 길을 연설한 것이다.
우상이나 형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한 뜻은 더 깊은 그것ㅡ 참 자아를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 깨달음을 성취한 인물들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은 존경을 받을 것이며 그 길을 가기 위한 삶은 인간으로서는 존재하는 한은 최고의 길일 것이다.
이기주의적일 수 밖에 없는 나를 초월한 참 자아를, 신을 찾는 길이기에......
무지는 신발을 바로 신을 줄 아는 어린아이가 이웃집 아이에게, 또는 자신의 동생에게 신발을 거꾸로 신는다며 나무라는 경우와 다르지 않다.
야이 바보야.........너는 왜? 신발을 거꾸로 신는거야, 라고......
지식은 허구이다.
지식은 모두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어서 알고있는 것이다.
자신의 태어남도 모르며, 죽음도 경험할 수 없지만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자신의 지식이 허구임을 앎이 지혜이다.
무엇을 자존심이라 하는가?
자아인 나가 존재한다 하는 마음일 것이다.
사전에는,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누구를 "남"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람은 자아인 나가 없음을 상상할 수 없다.
나가 있기에 대상이 있다는 설명이 불경에서 말하는 연기법이다.
자존심은 지금의 "나는 이런사람이다" 라는 생각인 확고한 마음, 즉 고정관념일 뿐이다.
시간과 공간, 우주가 있다 라는 것 조차도 타인으로 부터 들어서 알고있는 것들이며 모든 앎이 자신만의 고정관념임을 깨우침이 지혜인 것이다.
자신의 작은 기쁨, 즐거움, 행복을 위해서는 자존심마져도 버리는 어리석음...... 이를 무지라고 하는 것이다.
옛 말에, 아는 것이 병이며 모르는 것이 약이다 라는 말이 있다.
지식을 넘어서는 것이 지혜이다.
지식의 허구성을 알아차림이 지혜이다.
앎을 모를 줄 아는 앎이 참된 앎이다.
지혜로운 자는 '자리이타' 의 행을 함에서 순간 순간을 고요함으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참다운 나를 찾아가는 길......
옜 사람은,
이것을 '도'라 하였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