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으로 보는 현상계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자아를 인식하기 이전의 아이가 현상계를 아무것도 없음이거나 본질이 없음을 인식한다는 뜻은 아니다. 육체에 얽매어 있는 동안에 최고의 정신집중상태에서 진리를 깨달음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이치이기에 아이와 비교하여 설명하는 것이며 사람들의 모든 느낌이나 분별에 의한 괴로움은 그릇된 앎에 의한 습관에서 기인된 것임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고타마의 말들 중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궁금해 하는 몇 가지에 대한 설명에서 진리를 깨우침에 따른 불이 일원론을 연설한 인물들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 나는 괴롭다.
-. 존경할 사람도 존경할 것도 없다.
-. 소리와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다.
-. 사람을 믿지 말고 진리에 의존하라.
이런 말들에 대해서 종교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하여 정의될 수 없다.
*** 나는 괴롭다 ***
고타마는 6년여를 수행하는 동안에 스승이 없었으며 현 시대에도 이는 다르지 않다. 진리를 깨우친 후에 수행하던 도반(道伴)들을 찾아 다니며 그들에게 진리를 전하려 하였지만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는 어느 시대에나 다르지 않다. 문명이 바달 된 시대에는 지식수준이 높아지면서 고정관념이 강해지기에 더욱더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며 진리를 찾아서 십여 년씩이나 헤맸던 사람들만이 진리의 깨달음에 대해서 짐작할 따름이다.
진리를 깨우침은 불경의 어느 한 구절에도 불경의 모든 말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기에 편견 없이 많은 책을 보았던 사람들은 책을 통해서 짐작하기도 하지만 그 동안 우상숭배사상에 세뇌된 사람들에게는 우이독경(牛耳讀經)일 뿐이다. 고타마의 시대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기에 가르침을 포기하기로 하여 도반들을 물리치고 산으로 들어간 것이며 그 당시의 심경을 표현한 말이다.
진리를 깨우침에 따른 기쁨은 사람들의 관념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단 한 순간도 느껴보지 못했던 평화로움이며 이는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의 아이의 순수한 기쁨의 미소와 비유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면서 그 기쁨을 맛보기도 한다.
어느 날 근심걱정이 없는 상태에서 깊은 잠에 들었다가 늦잠을 실컷 자고 난 직후에 깨어나면서 나와 현상계는 자각하기 이전의 기쁨과 비유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또 다른 기쁨을 누리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말과 같은 ‘검증된 삶’이며 진리의 깨달음에 대한 연설을 하지 않더라도 그는 자연으로써 존재할 뿐이다. 산에 있는 나무와 같이 굳이 해야 될 일이 없으며 어느 상황에서도 불행이라는 생각이 없다. 항상 만족하여 근심과 걱정이 없는 평화로움에 안주하게 되는 것이다.
*** 존경할 사람도, 존경할 것도 없다 ***
사람들은 항상 무엇인가에 집착하거나 무엇인가를 소원하게 된다. 현실에 만족할 수 없기에 누구도 알 수 없는 내일과 미래를 향해 현실에서 도망치듯이 달려나간다.
내일이나 또는 미래에는 행복이나 평화, 자유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라고 누군가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빨리 자라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세뇌된 것이며 희망찬 미래를 향하여 달려나가야 함이 당연시 되었으며 고정관념이 된 것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을 동경하며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목적의식에 세뇌되어서 우상을 만들고 그곳에 빠져들어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며 끝없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살다가 죽는 것이 당연한 삶인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진리를 깨우침은 사람들의 모든 앎이 허구이며 발전을 위해 분주한 인류의 모든 행위들이 부질없는 행위들임을 깨우치는 것이다.
천지만물은 ‘나라는 생각’에 의해 창조된 꿈과 같은 환상이기에 인류의 모든 행위는 꿈속에서 빌딩을 짓는 일과도 같이 허망한 것이다.
나였던 육체를 ‘이것’이나 ‘여래’ 등으로 표현하는 까닭은 현상계의 이름 지어진 모든 것들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오직 사람들만이 ‘나 아닌 것’을 나라고 알고 있기에 깨달음의 경지를 설명하기 위해 표현이며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은 ‘나 아닌 나’가 참 자아이며 진리이기에 진리의 길을 전하는 것이다.
*** 소리와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 ***
우이독경(牛耳讀經)이라는 말이 있다. 고타마의 불이 일원론에 대한 연설이 한자로 전해지면서 불립문자(不立文字)로 표현되며 이는 문자와 언어로는 해석될 수 없음을 뜻한다. 무아(無我)라는 말은 나가 없음으로 해석하지만 사람은 자아의 부재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으며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사람이기에 깊은 잠을 자는 동안의 상태나 또는 죽은 자의 생각으로 표현될 수 있지만 짐작을 할 수 없다.
자아를 인식하기 전의 어린아이의 ‘나 없는 나’와 다르지 않다.
잠을 자는 동안이나 마취의 상태에서는 나도 없으며 현상계도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나의 존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고타마나 예수는 불이 일원론인 자신의 말들에 대해서 옮기지 말라고 하였다. 소리와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다는 말에서 ‘소리’는 나의 말에 대해서 옮기지도 말 것이며 나의 말에 집착을 하면 진리를 깨우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사람들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의 영역 밖의 말들이기에 붓다의 생존 시에는 유사한 비유를 들어서 설명이 가능할 수 있으나 사람들의 지식에 의해서는 올바로 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언어나 문자로 전달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소리와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다는 말은.
불이 일원론의 연설이 종교화됨을 방지하기 위한 말이었다. 우상숭배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를 통해서는 진리를 깨우칠 수 없기에 나의 말도 전달하지 말고 나를 우상화 해서도 아니 된다는 분명한 말을 했던 것이다.
일체유심조의 설명과 같이 현상계의 모든 것들의 본질은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관념에 의한 환상이라는 불이 일원론의 가르침이 일부 세력에 의해 종교화 되면서 윤회(輪廻)라는 말을 그릇되게 인용하여 영혼을 창조하고 천도제를 지내는 등의 무속신앙으로 전락되었다.
진리를 찾고자 했던 사람들이 고타마의 깨달음과 달마대사나 혜능선사의 깨달음은 차원이 다를 것이라고 판단함을 당연시 함으로써 수행방법까지도 고타마의 관법만이 바른 길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진리를 깨우칠 수 없는 것이다. 우상숭배에 길들여진 사람들에 의해서 고타마의 불이 일원론의 연설이 왜곡되어 경전이 되면서 고타마는 치욕을 당하고 있음을 정녕 모르는 것인가?
비근한 예로 삼매를 경험했다는 수행자들이 ‘자등명(自燈明)’ 이나 ‘법등명(法燈明)’ 이라는 말의 뜻을 그릇되게 이해하여 삼매에서 빛을 보았다고 하기도 하며 동남아에 나가서 고타마의 수행방법인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무아(無我)라는 말을 그릇되게 이해하여 ‘나는 없다’ 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하는 실정이다. 또한 일부 승려들이 깨달았다며 책을 펴내고 서로가 시시비비를 가리는 헤프닝이 벌어지면서 진리를 깨우치기 위한 길마저 끊어 진지 오래다.
진리의 깨우침은 분별없음의 이치를 깨달음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불이 일원론의 줄임 말이 불이법문(不二法門)이며 불이법(不二法)이다. 고타마의 가르침이 우상화 놀음에 의해 왜곡되면서 수많은 종교와 종파들이 난립되었으며 현세에는 어디서도 그 본질을 찾아볼 수 없기에 이를 바로 알리고자 하여 글을 쓰게 되었다.
예수 또한 고타마와 같이 우상을 숭배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으며 불이 일원론인 진리의 가르침이 왜곡될 것을 우려하여 “언술이 뛰어나서 사람들을 현혹하게 하는 자들에 대해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규정하였다.
*** 나를 믿지 말고 진리에 의존하라 ***
열반(涅槃)에 들기 전에 제자들에게 당부했던 유언이다.
나를 믿지 말고 진리에 의존하라 라는 말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나를 믿지 말라는 말은 ‘소리와 형상으로는 여래(진리의 깨달음, 참 자아)를 볼 수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 말이다. 진리라는 말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말이다. ‘진리에 의존하라’는 말의 본질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말은 진리를 깨우쳤다는 말과 다름이 없는 말이다. 고타마의 제자 중에는 진리를 깨우친 인물이 있었으며
http://cafe.daum.net/husimwon -불이 일원론- 집필중인 저서의 본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