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소크라테스의 불이 일원론
BC 5세기 후반에 활동했으며 서구문화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한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세 인물인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가운데서 첫째 인물이다. 키케로가 말했듯이 그는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렸다". 즉 소크라테스는 이오니아와 이탈리아 우주론자들의 자연에 관한 사변에서 인간생활의 성격과 행위를 분석하는 데로 철학의 초점을 옮겼다. 그는 도덕적 가치가 침식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혼란기에 살면서 "너 자신을 알라"는 충고와 도덕적 용어의 의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윤리생활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소명을 느꼈다.
-. 너 자신을 알라, 그러면 우주를 아는 것이다.
-.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 악법도 법이다.
-. 나는 어느 상황에서도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검증되지 않은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
-. 신을 모셔라.
시대의 변화로 보면 불교의 교조로 알려진 ‘석가모니 부처’ 이전에 생각의 이치를 깨우친 인물이며 불이 일원론을 연설한 최초의 인물이다. 불이 일원론은 이기주의적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남으로써 인류의 삶에 대해서 자연과 같은 평등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이다.
*** 너 자신을 알라 ***
‘너 자신을 알라’ 라는 이 말은 인간의 본성을 깨우치라는 말이며 인간의 본성을 깨우침으로 하여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의구심이 사라짐에 따른 자유(우주자연)를 뜻하는 말이다. 너 자신을 알면 우주를 안다는 말은 우주의 본질이 ‘실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말이며 나의 참 성품을 깨우침에 따른 표현인 불이 일원론의 연설을 시대의 여건과 환경, 지적 수준에 따라서 그 시대에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통하여 표현한 것이다.
표현방법이 다른 것일 뿐, 본질은 불이 일원론을 깨우침에 대한 연설이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표현은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의 본질인 인간의 “본래 성품이 부처이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으며 참 자아라고 표현되는 그것만이 유일하며 영원 불멸임의 다른 표현이다. 현상계는 실재가 아니지만 오직 영원한 것은 그것임을 앎이며 이를 석가모니는 지혜(智慧)로 표현하였다. 노자와 장자는 도(道)로 표현하였으며 예수는 ‘하나님 나라’로 표현하면서 진실로 사람이 거듭남이 ‘성령’이라고 하였다.
***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
나는 인간의 무지를 벗어났다 라는 말로써 “앎을 모를 줄 앎이 지혜”이다 라는 뜻이다. 지성의 허구를 표현하는 말이며 일념의 무념 처에서의 참 자아라고 표현되는 깨달음의 다른 표현이다. 소크라테스와 석가모니에게 무엇을 깨우친 것입니까? 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우쳤다” 이다. 육체에 얽매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이기주의적인 삶에 의해서 만들어진 모든 언어는 상대적이다. 크게 본다면 우주는 인간의 관념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이름을 지어 서로 다른 것으로 분별하는 것이기에 어떠한 언어도 상대적이며 분명히 정의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성공과 실패, 또는 행복과 불행을 말하지만 사람들 개인의 생각의 차이기에 정의될 수 없다는 뜻이며, 인생이라는 것, 삶과 죽음 등의 모든 말들이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관념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기에 모든 지식이나 앎이 허구임을 깨우쳤다는 뜻이다.
전쟁과 평화, 자유와 구속 등의 상대적인 말들은 모두가 정의될 수 없으나 이기주의인 자아는 이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는 관념은 말을 배우던 어린 시절부터 사회적 동물로 세뇌되는 과정에서의 기억일 뿐이기에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하는 지성이 허구임을 뜻하는 말이다.
*** 악법도 법이다 ***
인류는 끝없이 행복과 자유 평화를 갈망한다.
사람들은 지식이 많아지면서 완전한 인권을 주장하려 한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선이며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악이다. 깨달음은 비이기주의적이다. 모두를 평등하게 바라본다. 나와 너라는 분별이 허구이다.
육체의 얽매임에서 벗어난 정신은, 깨우치기 전에 나였던 육체만이 나는 아니다. ‘나’라고 아는 육체는 우주 안의 어떤 물질과도 다름이 없는 한 물건임을 깨우치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육체는 나무나 동물, 또는 물고기와도 같은 피조물로써 원인 없이 나타난 것이며 자연과 같이 존재하다가 원인 없이 사라지는 것임을 깨우침이기에 자신의 육체를 위해서 해야 될 일이 없다.
깨달은 인물들은 재물이나 명예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의복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기에 신비주의자로 보이거나 비정상인으로 보일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의 맨발과 허술한 옷차림, 그리고 게으름과 같이……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우주 자연의 무위와 태양의 행위를 비유하여 인류에게 이기주의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 보라는 질타이다. 어떠한 법이든지 시대와 환경여건을 감안하여 다수에게 이익이 되게 하기 위해서 만들었을 것임은 당연할 것이다. 법은 자연으로 볼 때에 태양과 다름이 없다. 법을 만들 때의 취지는 만인의 평등을 감안하여 이익이 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계절이 바뀌거나 태양이 구름에 가려진다 하여, 즉 자신들의 이익이 작아지기에 법을 바꾸려 하는 일부의 세력에 의해서 법이 바뀐다면 법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것이기에 법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악법이라 할지라도 법은 지켜져야 된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태양이 구름에 가리워졌다 하여 태양을 나무랄 수 는 없지 않겠는가? 어리석은 자여 보물은 그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다네.
자신의 마음을 밖에서 찾으려 하는가?
***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불행이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
소크라테스가 법을 위반했다 하여 당시 정권세력에 의해 사형을 당하는 날 독배를 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했던 말로 기록되어 있다. 깨달음을 성취하여 자아(이기주의)를 초월한 인물들은 육체의 안위에 집착함이 없다.
깨달음이라고 표현되는 삼매에서는 태어나서 처음 일어났던 생각(육체=나다)에 다다르면서 ‘육체는 나다’라는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는 밧줄을 뱀으로 잘못 인식하여 뱀이라고 생각하여 당연시 하다가 되돌아가서 뱀이 아니었으며 밧줄이었음을 분명히 확인 한 후에 비로소 내가 잘못 알았음을 깨우치면서 웃어버릴 수 밖에 없음과 같이 태어나서 처음 일어났던 육체=나다 라는 생각이 오류였음을 알아차리는 것이기에 악몽을 꾸던 꿈에서 깨어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가로운 봄날에 낮잠을 즐기던 사람이 꿈속에서 길을 잃고 산속을 헤매다가 맹수를 만나서 죽을 힘을 다하여 도망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이마에 흐르는 식은 땀을 닦아내면서 꿈이었음을 알았으면서도 꿈속에서의 상황이 너무도 끔찍하여 몸서리를 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안도의 웃음을 짓는다.
진리의 깨달음은 끔찍했던 꿈에서 깨어남과 같이 몸이 나다라는 착각에서 깨어났기에 육체는 풀이나 나무 또는 돌덩이와 같이 자연물의 하나이기에 육체의 죽음은 이른 봄에 낡은 외투를 벗어 던지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육체가 나다라고 착각했던 꿈에서 깨어났기에 육체의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며 ‘나는 기쁘다’, 또는 나는 불행이라고 행각해 본 적이 없다 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육체가 나라는 고정관념에서 깨어난 인물들의 삶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만 불이 일원론을 연설한 인물 모두에게 사상이 있다면 이와 같은 우주자연 사상이다.
*** 검증되지 않은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 ***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우주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며 인생이라는 것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며, 삶과 죽음이, 고통과 괴로움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생사이치를 알아차림은 자아의 집착과 욕망에서 벗어남이며 욕망이 없다는 말은 소원이나 소망이 없음과 같은 말이다. 세상 어느 것에 대한 집착도 욕망도 있는 것이 아니기에 슬픔과 괴로움, 고통 따위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그들의 삶은 무위이며 자연이다. 자아를 초월한 그것만이 항구불변이며 영원한 것이기에 이를 신, 절대자, 유일자로 표현되기도 하는 것이며 이와 유사한 연설들이 그릇된 이해에 따라 종교로 변질되었다.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과 같이 자신의 나를 알지 못하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말이며 이는 ‘나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함에 따라 죽을 때 까지도 욕망을 버리지 못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나 아닌 나’를 깨우침 만이 검증된 삶이라는 말이다.
*** 신을 모셔라 ***
소크라테스는 사형 집행 관과 대화를 하면서도 집행 관을 친구처럼 대하였다. 제자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나머지의 시간을 즐기셔도 됩니다 라는 말을 하였으나 소크라테스는 집행 관에게 사약을 마시고 난 이후의 행동에 대해서 물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신을 모셔라’ 라는 말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신’이라는 말은 자아를 초월한 참 자아의 다른 표현이다. 자아, 또는 참 자아라는 말이 분별이기에 옳은 말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참 자아라고 표현될 수 밖에 없으며 순수의식이나 또는 깨달음, 도, 성령…… 등의 모든 낱말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자아를 벗어남, 즉 육체에 얽매임에서 벗어남은 나도 없으며 우주의 본질도 없음이기에 신, 절대자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며 소크라테스는 이를 ‘신’으로 표현한 것이다.
종교들은 진리를 깨달은 인물들의 신에 대한 언급에 대한 오해함을 모르고 있는 듯 하다. 자아는 이기주의적일 수 밖에 없기에 모든 대상을 이기주의적으로 볼 수 밖에 없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신은 이기주의자가 아님을 알기 바란다.
신은 무성(無性)이기에 부모나 자식이 없으며 태양과 같이 분별함이 없다. 어리석은 자들은 신이 자신의 편일 것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오만한 것이다.
신을 모셔라 라는 말은 신에게 소원을 들어 달라고 구걸하라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함은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몸,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일깨워서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신의 뜻임을 알고 신을 생각함으로 하여 망념을 잠재움에 따른 기쁨으로 존재하라는 뜻임을 알기 바란다.
신이 있다면 인간과 같이 편협하거나 옹졸하여 사람을 분별하겠는가?
인간이 고귀한 까닭은 인간의 본성이 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