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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한계 / 한 생각의 차이

일념법진원 2009. 9. 28. 09:59

인간의 의구심은 끝이 있을 수 없다.

나라는 존재의 시작을 알지 못함에 대해서 신화에 의지하며,

우주의 실재함에 대해서도 결국은 신의 뜻으로 돌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의 근원, 우주의 근원이 신화, 전설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아니다.

 

인간은 마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생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생각은 무한 할 것이라고 당연시 한다.

 

생각은 무한한 것 같지만 생각은 협소한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육체가 나다, 라는 육체에 얽매어 기억세포의 한계에 구속되었기 때문이다.

생각은 경험 또는 경험과 유사한 기억세포의 범위 이내에서만 유한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경험된 기억은 모두,

타인들에 의해서 입력된 것이다. 로봇에 소프트웨어를 갈아 넣어 주듯이......

 

인간의 모든 앎은 끝없는 의심이다.

지식은 타인으로부터 들어서 입력된 기억이며, 기억은 모두가 의심으로 남는다.

의심이 사라지면 근심과 걱정, 고통과 괴로움은 말끔히 사라진다.

지식이 많으면 많은 만큼의 의심이 많은 것이다.

 

생각과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생각이 무한한가?

아니다.

 

"육체가 나다" 라는 생각을 해 보는 일 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육체가 내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도 낯설다.

하물며 "육체는 내가 아니다" 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오온이 공이다.

감각기관이 없는 것이다.

늙음도 죽음도 없는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세계도 없는 것이다.

의식으로 느끼는 세상도 없는 것이다.

싯다르타의 말로 알려진 전설 중, 반야심경이라는 글에 적혀진 내용이다. 

 

인간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에서의 세상을 바라보며 고통을 겪는다.

경험의 시작부분에서의 오류를 찾아낼 수 없기에 인류는 삶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류를 발견하게 되면 모든 의심이 사라진다. 

 

수천 수만년을 살아 오면서도 오류를 발견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나라는 한계, 나라는 생각의 한계를 극복한 인물들의 말이 불이일원론이다.

   

오류가 시작된 곳,

경험의 시작부분으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이 일념의 수행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목숨걸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언제 다가올지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자손에게,

친구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할 것인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굳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목숨걸 만한 일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석가모니와 예수, 그들의 말을 오해하여 그들을 숭배하는 짓은, 

그들의 신성한 가르침을 모독하는 것이다. 

진리를 그들의 말 속에서 찾을 수는 없다. 

언어, 말로 만들어지고,

실체없는 언어, 낱말에 묶여 있는 것이다.

 

말 변사,

말로 만들어진 세상이다.

말, 말, 말......

화두라는 말,

상대적인 언어로써 진실된 말은 오직 "화두 일념"이라는 말이다.

일념의 끝에서, 생각의 한계를 넘어, 나를 초월한 나를 찾는다.

깊은 잠속에서 "아무것도 없음"의 상태를 자각하는 "나 아닌 나".

 

그것이 검증된 삶,

참 사람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