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본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상, 즉 육체가 나다, 라는 생각이 일어나면서 육체에 대한 집착이 욕망으로 변질된 것이며,
망각된 절대순수의식의 기쁨에 대한 갈망이 욕망으로 변질되어 나타난 것이다.
아상을 버리라 하지만 버려질 수는 없다.
오직 일념의 무념처에서 "나라는 생각"의 허상임을 깨우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고통, 괴로움이 본래 있것이 아니다.
천지만물의 본질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육체가 나다, 라는 생각의 오류에 의해서 나가 있는 것이다.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 자유와 구속이라는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새장에서도 그들은 아름답게 노래한다.
인간과 동물이 다른 것은,
인간은,
육체가 나다, 라는 오류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절대자, 신을 본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동물들의 삶보다 더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는 자유라는 말이 없으며 삶, 죽음이라는 고통이라는 생각도 있을 수 없다.
오직 인간의 오류, 즉 육체만이 나다, 라는 그릇된 앎에 의해서 고통을 겪는 것이다.
고통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고통도 없으며, 고통의 소멸도 없으며, 고통의 소멸을 위한 법도 없다고 한 것이다.
본래 있는 것이 아님을 깨우침에서 본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죽는 것이 아니다.
내가라는 말은 육체가 나다라는 사람들의 생각이지만,
내가 죽는 것이 아니며, "나라는 생각"이 오류임을 깨우침에서 육체만이 나라는 생각이 소멸됨을 뜻하는 말이다.
무아라는 말은 "육체가 내가 아님"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 말이 옳은 말이지만 옳은 말일 수 없는 이유는,
육체를 포함한 우주의 모든 것들이 나이기 때문이다.
분별없음의 이치라고 설명할 수 있지만 분별없음도 분별이기에,
상대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절대 평등성이지만 이 또한 평등성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언어로 표현된다면 이미 어긋난 것이다.
오직 일념, 일념, 일념의 유지하는 시간이 길어짐에서,
평화를 느낌과 동시에 점차로 깊어져가는 것이다.
경험된 사고방식의 앎은 모두가 의구심이다.
삼매에서는,
모든 의구심이 사라진다.
언어, 말, 말, 말로 창조된 세상,
말로 만들어진 소리들일 뿐이다.
육체가 나다라는 오류에서 벗어난 세상
삶과 죽음이 없는 영원한 기쁨으로의 존재함.......
그곳,
나의 나라로 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