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에 대한 많은 말들이 있다.
대오, 대각... 등의 말들이 만들어 지면서, 깨달아 앎, 또는 크게 깨달음 등으로 분류하려 한다.
견성이라 함은 성품을 봄의 뜻으로서 "깨달음"의 표현이다.
언어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기에 크거나 작거나를 분별하게 되며, 여러 가지로 분류되는 이유는, 종교의 우상숭배 사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아는 체 하며 상을 내야만 되는데,
감히 부처님 제자된 자이다 보니... 부처님과 같은 깨우침이라고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허허헛
깨달음, 그것은 일념의 성취이며 그것에는 상대적일 수 없으며, 분별이 있을 수 없기에 진리이다.
소리와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다는 말을 무시한 종교에서는 절대로 깨달음 비슷한 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견성이라 함은 일념의 성취에 의해서 본성, 즉 경험된 오류의 발견함을 뜻하는 말이다.
그 곳에는 시간과 공간이 있을 수 없기에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라는 노자의 말과 같이 크고 작음이 있다함은 이미 어긋난 것이다. 내가, 라는 나는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을 오해하여 말도 안되는 말재간을 부리거나, 재치문답을 하는 행위들... 또는 오도송이라 하여 엉뚱한 말들을 지껄이는 불교의 싸이트들을 보면서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이러히, 회원이 보아달라는 싸이트에...... 수 십개의 글들이 그런 말 아닌 말 장난들이었음에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일념을 깨우친 사람들은 실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 곳의 심우도에 대한 설명에서 보면,
소의 발자욱을 보거나 유사한 경우에 대해서 견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생각의 이치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는 오직 일념을 유지하여 생각의 흐름, 즉,생각의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여럼풋한 앎에 대해서 "견성"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초 견성......
그만큼 생각의 미묘한 이치를 알아차리기 조차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 곳의 연지님의 글을 보면...... 초 견성의 상태이다.
일념이 깊어짐에서는 기쁨과 환희로움을 느끼기도 하며 평화로움에 안주해 버리기도 한다.
생각, 마음이 거부하는 것이다.
일념, 한 생각으로 표현되지만...... 열정이 있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다.
늙음과 죽음이 없는 참다운 인생 길...
오죽 하면, 옛 말에, "목숨 걸고 해야 된다는 말이 생겨났겠는가?
하지만 진리의 길... 하나씩 일깨워가면서 희열을 느낄 수 있으며...
일념의 깊어짐에서는 괴로움이 생각에 불고하다는 분명한 이치를 깨우치는 것이기에 항상 기쁨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곳의 글들을 통해서 생각의 미묘한 이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함에 의해서, 일념의 이치를 쉽게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싸워서 행복할 수 없는 것이며,
서로 싸우고 이겨서 승리함에서 평화로울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상대와 싸워 이겨서 평화롭다면?
그게 사람인가? 허허헛
"깨달음의 실체를 밝힌다"라는 책과 이 곳의 글들을 통해서 일념을 성취해 보기 바란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참다운 인생의 길이다.
남들과 싸우는 일이 아니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자신과 마주서는 일이다.
무엇이 두려운가.
오직 일념, 일념, 일념이 그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생각의 미묘한 이치이기에......
인류의 평화... 오직 도의 길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로 표현되는 행복? 펑화? 자유?......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있는 것이 아니기에 말, 말, 말로 만들어진 것이다.
상대적인 언어의 뜻,
이해 할 수 있다면...... 무지개를 쫒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나라로 오라.
더 자세한 내용 http://cafe.daum.net/husimwon 에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