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정혜의,
계는 계율이다.
이는 초등학교에서 배운 도덕과 바른생활로써 충분한 것이다.
계율에 묶여서는 정과 혜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리 말하지 않았다.
소위 성직자라는 상을 내는 자들, 숭배를 목적으로 경전을 쓴 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소리일 뿐이다.
계, 즉 초등교육에서 배울 수밖에 없는 도덕을 세분화 하여 분류하고 그것에 메인 자들은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언술이 뛰어나 알음알이의 상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은 정도, 8정도라는 말로써 바른 생활을 뜻하는 말이다.
이 또한 초등교육을 통해서 지겹게 들어온 소리들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앎을 당연시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가정이나 사회나... 모두 자신의 말이 옳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기에 사회가 문란해 지는 것이다.
자신만의 앎이 옳다는 주장... 그것이 어찌 정도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리 말하지 않았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자신의 모든 앎이 타인들로 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것들이며,
어떤 지식이라도 정도일 수 없다는 말이다.
언어는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기에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대의 지식을 바탕으로 "내 말이 옳다"라고 주장한다면, 다른 사람의 지식은 옳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대의 말이 옳다면 상대방의 말도 옳은 것이기에 옳고 옳지 않음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행위는 어리석은 행위인 것이다.
정은 일념. 삼매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일념이 길어짐, 깊어짐이 삼매이며... 삼매라는 생각이 있다면 일념을 놓친 것이다.
인위적인 일념의 상태가 유상삼매이며, 무상 삼매에서는 삼매라는 생각이 없는 일념이 이어짐을 뜻하는 말이다.
혜는 지혜이다.
지혜는 지식의 분별함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지식이 많음과 비례하여 아상이 커지는 것이기에 아상은 무지이며 무한한 어리석음이다.
일념을 공부하여 일념을 깨우침에 대해서 초견성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며, 비로소 정도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다.
일념, 즉 삼매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스스로 언어의 허구를 깨우쳐 나갈 수 있다.
천지만물에는 실체, 즉 근원이 없는 것이듯이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학문과 이론에는 그 바탕이 없다.
아무것도 없는 것들에 대해서 이름 지어, 이름, 말로 창조된 세상이다.
지성의 한계이다.
궁극적으로 지성은 천지만물이 "아무것도 없는 것"임을 밝혀낼 수 있었을 뿐이며, 왜? "아무것도 없는 것"인지 조차 모를 수밖에 없다.
지성, 지식... 이미 다 쓰여진 것이기에 쓸모없는 것이다.
이제 버려야 한다.
이 세상에 행복하여 평화로운 사람이 있는가?
안심입명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 뜻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지성을 버리고 그 자리에 지혜를 얻고 안심입명에 들 수 있는 참된 앎으로 채워야 한다.
나는 석가모니와 소크라테스, 장자와 노자, 예수를 통해서 그 길을 연설해 왔다.
오직 한 길이다.
일념을 깨우치고... 더 깊이 깨우쳐 나가는 길 만이 참된 삶의 길이며 올바른 인생의 길, 道이다.
자신과 마주서서 자신을 보아야 한다.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자시의 마음을 모르기에 자신의 인생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생각, 생각, 생각, ... "나라는 생각"의 미묘한 속성이다.
불과 1분도 일념에 들 수 없는 내 생각을 어찌 내 생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내 생각이라고 착각하는 내 생각.
그것의 끊임없는 반복순환하는 윤회를 일념의 집중으로 끊어낼 수 없다면 그대는 괴로움의 과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순간... 일념으로 자신도 모르는 나의 생각..... 망념을 잠재울 때에 비로소 지혜는 드러나는 것이다.
이미 그대의 안에 들어 있는 지혜이다.
다만 육체만이 나라는 생각인 경험의 오류에 의해서 끝없는 의심과 욕망, 그리고 세뇌된 이상, 사상에 의해서 미래를 향해 달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흐르는 망념의 축적물이며, 마음이라고 알고 있는 기억세포와 순간생각세포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념을 망각하여 망념이 지속되는 그대의 나라는 생각은 더 많은 괴로움을, 과거를 만들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순간을 일념, 일념, 일념에 들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면서...
비로소 계정혜의 뜻을 이해하는 진리(진실된 이해)를 깨우치기 시작하는 것이며, 비로소 안심입명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인류의 평화는 오직 "일념"을 깨우치기 위한 삶일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자신의 나를 모르면서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수 천년 전부터 진리를 말했던 성인, 성자들이 하고자 했던 말을 전하는 것이다.
그들이 말할 수 없었던 생각의 미묘한 이치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현 시대에는 오직 나의 말 만이 진실된 말이다.
이해할 수 없다면,
나에게 오라.
나의 말을 들으라.
기억할 수 없는 경험의 오류에 대해서 설명해 줄 것이며,
언어의 기원, 우주, 천지만물의 기원이 그대의 "나"였다는 사실을 깨우치면서 비로소 자유, 평화의 뜻을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라.
일념으로...
생각의 속성과 이치는 http://cafe.daum.net/husimwon 에서 자세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