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 무념, 생각이 끊어진 곳, 즉 일념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한 말이며
그 뜻하에 대해서는 경험하지 않는 한 상상할 수도 없으며 해석할 수도 없다.
사람들은 생각이 끊어짐에 대해서 사량분별하려 하지만....
깊은 잠의 상태를 상상할 수 없듯이 이는 생각을 넘어서 있는 것이기에 경험자가 아니면 짐작조차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생각의 미묘함이다.
심심미묘법이라는 말은 상대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 없음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더 깊은 뜻은 일념이 깊어짐에서 다가오는 통찰의 지혜이다.
그것이 가장 깊은 뜻의 심심미묘법이다.
불경에 대해서 전혀 납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일념을 깨우침(초견성)에서는
깊은 뜻에 대해서 깨우치는 것이기에 알음알이의 지식 따위로는 대화할 상대조차 될 수 없게 된다.
이곳의 몇 몇, 일념을 깨우친 인물들은 종교집단의 성직자들의 말의 허구를 보면서 홀로 미소짓는다.
생각의 미묘함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기에 언어와 생각을 넘어서 있다.
일념의 깊어짐에서 다가오는 분별없음의 이치를 깨우쳐 나가는 상태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기쁨과 평화가 함깨 다가오게 된다.
이는 종교에 세뇌된 사람들이 갑작스런 기도를 통해서 느끼는 환희로움과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일념의 무념처에서도 육체는 내가 행위한다는 생각 없이도 행위하듯이...
찰나지간으로 생멸을 반복순환하는 생각의 속성을 깨우치지 못하는 한 그 상태에 대해서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일념이 무엇인지 깨우치는 일 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기에,
심우도에서의 설명과 같이 일념을 깨우침에 대해서 "견성"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진리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며,
인류의 평화는 오직 진리의 길에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인류의 스승으로 알려진 인물들의 모든 말이
불이일원론에 바탕을 둔 진리의 길에 대한 연설인 것이다.
이곳의 모든 글들이,
인류의 스승으로 알려진 인물들의 본질에 대한 설명이며....
그것을 더욱더 분명하게 알리기 위하여 생각의 미묘한 이치와 속성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들의 말에서 밝혀질 수 없었던,
생각의 미묘한 이치와 속성, 그리고 마음의 형성 과정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참된 삶의 길에 들어서기 바란다.
인류의 자유와 평화, 행복... 오직 진리의 길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대 가슴에 이미 등불이 켜저 있었다.
나는 그 길을 안내하는 것이다.
나의 말을 들으라. 그리고
나의 나라로 오라.
영원한 자유와 평화로 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