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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가르침 -요지-

일념법진원 2009. 12. 13. 08:20

예수의 불이일원론의 요지.

1. 오직 나의 말을 믿으라. 나의 말이 하나님 말씀이다.

2. 나의 말이 진리요 생명이다.

3. 나는 어디에나 있다. 기왓장 속에도, 쪼개진 장작 속에도 있다.

4. 그날, 내가 하나님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을 것이다.

5. 선악과를 따먹음이 원죄이다.

6.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7. 몸은 질그릇과 같은 것이다.

8. 진실로, 진실로 말하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사람이 거듭남이 성령이다.

9. 어린아이처럼 순수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

10. 하루 종일 기도하라.

11. 꿈에서 깨어나라.

12. 적그리스도. 나의 말을 옮기는 자, 언술이 뛰어나 사람들을 현혹하게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적이다.

13.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14. 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15. 깊은 물에 그물을 던져라.

 

*** 1. 오직 나의 말을 믿으라. 나의 말이 곧 하나님 말씀이다 ***

사람들은 ‘오직 나’ 라는 말에 대해서 혼란스러울 수 있다.

삼매의 설명에서 ‘사람이 육체에 얽매어 있는 동안 최상의 정신집중 상태에서 ‘실재(實在)와의 합일됨’ 이라고 하였다.

‘실재’라 함은 천지만물이 무(無)임에도 불구하고 이름 지을 수 없는 ‘그것’만이 유일하게 존재함을 표현하는 말이며 그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의 이름이 지어져 있다.

동남아의 경전들에서 흔히 볼 수 있으나 이해를 넘어서 있는 말들이 있다.

1. 우주는 없다.

2. 사람도 없다.

3. 브라흐만(아트만, 참 나, 도)이 모든 것이다, 라는 말이다.

천지 만물의 본질은 ‘아무것도 없음’이지만 오직 그것만이 영원불멸로서 실재한다는 뜻이다.

불교의 경전이 우상숭배를 목적으로 쓰여 지는 과정에서 석가모니 부처를 신비스럽게 여기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걸어 다니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깨달음에서의 “오직 나”, “참 자아”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오직 나”라는 표현은 천지만물과 분리되지 않은 자아의 표현이지만 사고의 영역을 벗어나 해석될 수 없는 말들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표현된 것이며 에고의 생각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해석된 것이다.

석가모니는 오직 나에 대해서 ‘여래’, ‘불성’ 등으로 표현하였으며 노자와 장자는 ‘도’로 표현하면서 도와 하나 된 사람에 대해서는 지인(至人)으로 표현하였다.

예수는 나의 말이 하나님 말씀이다, 라는 말로써 나와 하나님이 둘이 아닌 하나다, 라고 하여 깨달음에 대한 진리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별도로 있음의 표현이 아니며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으로 표현한 것이며 이는 예수 생존 시대의 지식수준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불경에서 “천수(千手)천안(天眼) 관자재보살”이라는 말을 그릇되게 인용하여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이 있는 형상을 만들어 숭배하듯이 예수가 진리를 깨우쳐서 불이일원론을 연설할 당시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형상들을 숭배하던 시대였기에 시대의 상황에 적절한 “하나님”이라는 말을 창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리를 깨우친 인물들은 육체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아니기에 진리를 말함에 있어서는 타협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면서도 ‘나는 기쁘다,’ 라고 말을 할 수 있었듯이 예수 또한 시대의 상황으로 보아 기득권 종교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불이일원론을 연설한 것이다.

교회의 지붕에 널려있는 십자가는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육체를 뜻하는 것이며 사람이 육체에 얽매어 있는 동안에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나 우상숭배를 목적으로 쓰여 진 경전에 의해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것이다,’ 라는 뜻으로 왜곡되어 전해진 것이다.

나의 말이 하나님 말씀이다, 라는 말은 나와 하나님이 둘이 아닌 하나다, 라는 말로써 나와 하나님이 하나다, 라는 둘이 아님의 표현이며 너희가 하루 종일 기도하여 꿈에서 깨어나면 너희가 곧 하나님, 즉 “도”, “참 자아”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 2. 나의 말이 진리요 생명이다 ***

모든 언어가 상대적이기에 분별이듯이 진리를 깨우침이라는 말조차도 분별이며 육체가 나다 또는 내가 아니다 라는 말도 분별이다. 육체와 내가 하나지만 하나가 아니며 둘이지만 또한 둘이 아님을 언어로 정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노자의 ‘도’에 대한 설명과 같이 언어로 표상할 수 없기에 이것도 아니다, 또는 저것도 아니다 라고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사람 역시 이것(육체)을 나라고 말할 수 없었기에 한 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으며 결국에는 ‘이 사람’이라는 말로써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의 말’ 이라는 말에서의 ‘나’는 육체의 얽매임에서 벗어난 ‘참 나’의 표현이다. 예수의 오직 나 또는 나의 말의 뜻은 ‘사람이 거듭남’에서의 ‘나 아닌 나’, 즉 무아와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며 진리의 깨달음에 대한 연설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과 나, 진리, 생명은 같은 뜻의 다른 표현들이다.

*** 3. 네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날, 내가 하나님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을 지니라 ***

예수의 분명한 가르침이며 불이일원론의 중요한 연설이다.

네 안에 하나님이라는 말은 불경에서의 인간의 본성이 부처다, 라는 말과 같은 뜻이며 ‘너와 하나님이 둘이 아닌 하나다,’ 라는 말이다. 이 말은 ‘내 말이 하나님 말씀이다,’ 라는 말과도 같은 말이며 나와 하나님이 둘이 아니듯이 너와 하나님이 둘이 아니며, 나와 너, 모두가 둘이 아닌 하나다, 라는 불이일원론의 가르침이다.

“그 날”이라는 말이 있다.

예수는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분명히 하였으나 마음이 나약하여 의지할 곳을 찾던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오해하여 예수만 믿으면 언젠가는 예수에 의해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며 이를 부추기는 자들에 의해서 세뇌되었기에 “그 날”이 오리라고 믿지 못하기에 죽은 다음의 천국이라는 말까지도 창조한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말. 예수의 말이 아니다.

“그 날”이라는 말은 “하루 종일 기도하여 깨어나라, 진실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으며 ”사람이 거듭남“이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며 ”성령“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 날”은 “하루 종일 기도(일념의 성취, 삼매)하여 꿈인 줄도 모르고 꾸던 꿈에서 깨어나는 날”을 말한 것이다.

“그 날, 내가 하나님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라는 말은 하나님과 내가 하나이며, 너희가 나와 하나이며, 내가 너희와 하나라는 말로써 모두가 둘이 아닌 하나임을 설명하는 말이었음을 납득할 수 있을 것다.

예수의 불이 일원론이 변질되어 전해지는 성경에 의해서 수많은 종교들이 탄생되었다. 석가모니의 말이 변질되어 분파가 많아지듯이 예수의 말을 그릇되게 해석한 사람들에 의한 종교 세력의 위력은 정권의 위력보다 약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숭배하기도 하며 예수의 어머니만을 숭배하기도 하며, 성경의 일부의 구절을 합리화시켜서 만들어 진 종교의 숫자는 끊임없이 늘어가고 있다.

예수가 했던 말의 본질은 진리의 길, 즉 수행을 위한 가르침이다. 성경은 예수의 가르침이 우상숭배사상으로 완벽하게 변질된 것이다.

 

*** 4.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

나와 하나님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듯이, 그리고 너와 하나님이 둘이 아니고 하나임과 같이 너와 네 이웃이 둘이 아닌 하나이다. 그러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된다는 말이다.

예수를 믿는 자들끼리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다. 네 무모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도 아니며, 네 자식이나 네 아내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도 아니며, 오직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다.

자아는 이기주의이며 자시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이기주의라 함은 자기중심적이며 자신의 이익에 따라서 선과 악을 분별함을 지적하는 말이다. 사람은 이기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함 만이 인류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자신이 이기주의라는 생각을 할 수 없기에 하나님도 신도 자신들과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에 ‘나만 좀 잘 살게 해 주세요’, ‘내게 복을 주세요,’ 라고 기도를 한다.

우스운 일이 아닌가?

나에게만 무엇을 달라고 기도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서 내게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대학교 입학시험장 정문에서 ‘내 자식만 합격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남의 자식을 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사람들은 하나님이나 신들도 인간들과 같이 이기주의적이거나 편협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설령 신이 있다 하더라도 그리 편협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나만이 옳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남이 평화로 가는 길이 아니겠는가?

*** 5. 하루 종일 기도하라. 깨어나라 ***

*** 6. 진실로 말하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

*** 7. 사람이 거듭남이 ‘성령’이며 ‘하나님 나라’이다.

예수는 하나님나라라는 천국으로 가는 길과 ‘성령’이 될 수 있는 분명한 길을 안내하고 있다.

하루 종일 기도하라, 라는 말은 불경에서도 볼 수 있는 일체 처 일체 시, “행주좌와 어묵동정”이라는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으로서 고타마 붓다의 수행과 같이 일념을 유지하기 위한 수행의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석가모니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한 수행 방법이 “위빠사나”로 알려진 관법, 행위를 관찰하는 방법이라면 예수는 관법보다 발전된 화두수행의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화두는 무지했던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가장 쉽게 다가올 수 있는 말이다. 자신도 모르는 생각의 주체를 나로 아는 사람들에게 생각의 주체에 대해서 이해시킬 수 없었기에 자신도 모르는 생각의 흐름을 하나님으로 돌리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을 창조한 것이다.

수행은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인류의 고통은 그릇된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모든 사람들의 삶이 진리를 깨우치기 위한 목적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인류는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하루 종일 기도의 습관에 따른 최후의 결과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삼매에 다다름이며 인간이 육체에 얽매어 있는 동안에 최상의 정신집중을 통해서 실재와의 합일됨 이라는 설명과 같이 인간이 육체에 얽매임에서 벗어남에 대해서 예수는 ‘사람이 거듭남’으로 표현하였다. 이는 석가모니의 인간의 본성 또는 순수의식인 참 자아의 표현과 다르지 않은 말이며, 노자와 장자의 천지만물과 분리되지 않는 자아의 표현과도 같은 말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과도 다르지 않은 말이다.

예수의 가르침이 구전으로 전해지고 또한 한글로 번역되면서 하루 종일 기도를 통하여 깨어남, 즉 ‘사람이 거듭남’에 대하여 성스러운 영혼이라는 뜻의 ‘성령’으로 표현되었다. 또한 사람이 거듭남에 대해서 “환생” “부활” “영생”등의 말이 창조된 것이다.

영문 성경에서 ‘묵상하라, 기도하라, 기도하는 자가 신이다,’ 라는 구절과 함께 기도에 따른 많은 구절들이 있으며 ‘성수’ 라는 말에 대해서도 언급된다. 천주교의 성수, 또는 물로 세례를 받는 등의 요식 행위는 진리를 깨우친 인물들의 가르침이 왜곡되어 전해진 것이다.

진리를 깨우친 인물들의 삶은 비천하거나 괴팍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들은 비천하거나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항상 흐르는 ‘물’과 같이 낮은 곳에 머문다. 세상 사람들의 존경 따위에 관심도 없으며 재물이나 관직 따위에도 관심이 없기에 그들은 사람들에게 욕망을 버리고 물의 흐름과 같이 낮을 곳에서 살아감이 평화라는 가르침을 전한다.

무욕(無慾)이 지혜이기에 욕망을 버리고 항상 물처럼 낮은 곳에 머물라는 말과, 물과 같이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가르침이 왜곡되어 ‘성수’(聖水)로 둔갑된 것이다.

진리를 깨우친 인물들의 고귀한 가르침에 따라서 “참 자아”의 완성을 위한 삶이 인류의 평화를 위한 참된 길이 아니겠는가?

*** 8. 성령은 어디에나 있다. 없는 곳이 없다 ***

전지전능한 하나님과 성령, 사람이 거듭남, 예수라는 말은 같은 뜻의 다른 표현들이다. 사람이 거듭남으로 표현되는 삼매에서는 ‘아무것도 없음’ 무(無)이지만 육체의 얽매임에서 벗어난 “도”(정신)만이 유일하게 실재이다.

과학이 밝힌 바와 같이 천지만물의 근원은 무(無)이며 오직 실재하는 것은 육체를 초월한 ‘정신’이기에 이를 ‘오직 나’로 표현한 것이다. 분별된 언어로 표현될 수 없기에 여러 가지의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성령은 어디에나 있으며 없는 곳이 없다는 말은 노자의 ‘도’의 설명과 다르지 않다. ‘도’ 는 어디에나 있으며 없는 곳이 없다, 또한 모든 것의 기원이다, 라는 말과 같은 뜻이며 성경에는 ‘성령’은 어디에나 있으며 쪼개진 장작 속에도 있다, 등으로 표현된다. 절대자, 창조자 등의 말들 또한 ‘도’의 설명과 같이 ‘모든 것의 기원이다,’ 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석가모니의 불성은 어디에나 있다는 말과도 같은 맥락이다. 그것에 의해서 모든 것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며 “나 없는 나”인 “참 나”의 각성에 의해서만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 9. 어린아이처럼 순수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

어린 아이의 순수함을 강조한 말이다.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는 과정에서 ‘내가 할 거야’ 라는 말을 시작하기 이전, 또는 자아의 인식이 분명하여 미운 일곱 살이 되기 이전의 아이까지를 순수의식으로 볼 수 있으나 순수의식의 본질은 자아와 대상을 인식하기 이전의 어린아이의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남은 순수의식이며 순수의식이 인간의 본성이다. 나라는 생각이 없는 아이에게 나와 너의 분별이 있을 수 없으며 선과 악의 분별이 있을 수 없으며 안과 밖의 분별이 있을 수 없으며 전쟁과 평화,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고통과 괴로움, 삶과 죽음, 천국과 지옥 등의 분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루 종일 기도(일념의 수행)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生)과 사(死)를 반복 순환하는 생각의 윤회를 끊어 내기 위한 삶의 여정을 통해서 순수의식의 아이 시절 ‘나 없는 나’를 깨달음으로 하여 존재의 거듭남이 천국이며 ‘성령’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욕망은 외부에서 끌어 모은 지식이나 또는 물질에 의한 만족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지식을 얻으려 함도 마음의 평화를 위함이며 물질에 대한 욕구 또한 마음의 평화를 위함이지만 세상 어느 누구도 만족하여 평화로운 사람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욕망은 결코 만족으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순수의식의 평화와 기쁨을 망각하였음에도 망각한 사실조차 망각하여 스스로 괴로움과 고통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진리의 깨달음만이 천국이기에 예수는,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 천국으로 가는 진리의 길을 연설한 것이다.

부디 진리를 깨우친 인물들의 고귀한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여 질그릇과 다르지 않기에 언제 깨질지 모르는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나 없는 나’를 깨달아서 존재의 거듭남으로 삶과 죽음이 없는 천국에서 살기 바란다.

*** 10. 몸은 질그릇과도 같은 것이다 ***

석가모니는 몸은 실다운 것이 아니다, 라는 말과 함께 나라고 하는 몸은 손톱 위에 올려놓은 흙만큼도 나라고 할 것이 없다, 라고 하였으며 노자와 장자는 “천지만물과 분리되지 않은 자아”라는 말로써 나라는 몸은 천지 만물 중의 하나일 뿐 실다운 내가 아니다, 라고 표현했던 것과 같이 예수는 몸은 항상 깨질 수 있는 질그릇에 비유함으로써 참다운 나가 아님을 표현하였다.

소크라테스의 ‘검증되지 않은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 라는 말과 육체의 죽음 앞에서 ‘나는 기쁘다,’ 라는 말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은 표현이며 육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남, 즉 존재의 거듭남만이 참다운 나이며 ‘나 아닌 나’를 깨달음으로써의 삶만이 참다운 삶이라는 가르침이다.

 

*** 11. 선악과를 따 먹음이 원죄이다 ***

선악과의 의미는 선과 악을 분별함의 지식의 얻음을 뜻하는 말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학습에 의해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되며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에는 선이며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때에는 악으로 분류하게 됨을 지적하는 말이다. 종교는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것으로 기록함으로서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당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이를 우려하여 지상의 어느 것에 대해서도 숭배하지 말라고 당부하였으며 석가모니도 소리와 형상이라는 말로써 어떤 것도 숭배하지 말고 진리에 의존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종교는 예수의 가르침을 그릇되게 인용하여 일주일간 죄를 짓고 나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죄를 씻어 줄 것이며 예수를 믿으면 사후에는 천국에 갈 수 있다거나 또는 터무니없는 구원을 미끼로 하여 선량한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고귀한 가르침을 왜곡하여 재물을 모으고 세력을 확장하는 사악한 무리들과 또는 그들의 말에 속아 죽음을 불사하는 어린 양들의 어리석음을 어찌하겠는가?

하나님이 실재한다 하더라도 신은 인간들과 같이 이기적일 수 없으며 인간과 같이 편협하지 않음을 깨우칠 수 없는 것인가?

예수의 진리의 깨달음에 대한 불이일원론의 연설이 왜곡된 것임을 알기 바라며 만약 지옥이 실재한다면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부를 축적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준비하는 종교집단의 수뇌들과 그들의 가정일 것이다.

 

*** 12.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라는 말은 석가모니의 유언과도 다르지 않은 말이다. 석가모니는 죽음 앞에서 제자들에게 ‘나를 믿지 말고 진리에 의존하라’ 라고 하였다. 또한 소리와 형상으로는 ‘여래’(진리를 깨우침)를 볼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예수는 나의 말을 믿으라, 라고 하면서도 절대로 나와 다른 우상을 숭배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다. 지상에 있는 어떤 것도 숭배하지 말라고 당부하였으며 오직 하루 종일 기도하여 꿈에서 깨어남이 성령(거듭남, 진리, 참 나)이라고 하였다.

그릇된 우상숭배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하는 정신질환을 경험하고 있으며 불가에서도 승려를 비롯하여 많은 수행자들이 자해를 하거나 정신질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익히 알려진 일들이다.

예수와 석가모니는 진리를 가리켰으나 어리석은 자들은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을 바라보며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라는 가면을 쓰고 진리를 팔고 있는 자들과 진리라는 말에 속아 꼭두각시가 되어 목숨을 불사하는 어린 양들을 누가 있어 인도하겠는가?

이 글을 보는 지성인들이여……

진리의 본질을 널리 알려서 인류의 평화에 기여하기 바란다.

 

*** 13. 적그리스도 [Antichrist] ***

예수는 그리스도의 적(敵)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불경은 한자로 들여왔기에 우상숭배의 목적으로 쓰여 졌으나 불이일원론의 본질이 한글로 번역된 성경보다는 많이 남아 있는 듯하다. 불경에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표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상(我相)이 강한 사람들에 의해서 왜곡되고 변질된 책들이 출판되면서 불이일원론의 본질은 찾아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말로 표현된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라는 말과 사찰의 정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글귀가 ‘불이문(不二門)이기에 본질이 남아있으며 사찰의 벽면에 그려진 동자승과 황소의 그림을 통해서 수행의 과정이 그려져 있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이일원론의 연설은 사고의 영역을 벗어난 말들이기에 진리를 깨우친 실존 인물이 존재할 때에만 살아있는 진리일 수 있다. 진리를 깨우친 인물들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사량 분별로써는 해석될 수 없는 말들이기에 나의 말을 전달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이다.

예수 또한 이를 알기에 나의 말을 옮기는 자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규정하였다. 진리를 깨우친 인물들은 인위적인 집단을 구성하지 아니하며 구속하지 않는다. 무위자연, 우주자연이 근본이기에 진리의 길을 전할 뿐이다.

예수는 진리를 깨달음에 대한 연설을 왜곡하는 자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적이다, 라고 규정한 것이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하였음에도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적이라는 말이며, 사람을 숭배하지 말라 하였음에도 예수를 믿고 숭배하는 자들, 그리고 예수의 아버지와 어머니까지를 숭배하는 자들이 있을 것을 우려하였기에 그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단정 지었던 것이다.

언술(言述)이 뛰어나서 사람들을 현혹하여 재물을 축적하며 세력을 확장하려 하는 자들이 적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의 적인 것이다.

진리를 깨우친 인물들의 공통된 가르침의 첫째는 사람과 사람이 모두가 둘이 아님을 알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함만이 인간세계에서는 평화로운 삶임을 전파한 것이며, 둘째는 불이일원론을 이해하여 수행자로써의 삶이 진리의 길이라는 가르침이다.

이기주의와 이기주의 집단들 간에 세력을 확장하여 서로가 싸움질을 하라는 가르침이 아님을 분명히 알기 바란다.

 

*** 14. 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

지금까지의 설명으로 이 말에 대해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말에 대해서 장사를 하거나 사업을 시작함에 있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예수가, 하나님이 사업을 도와줄 것이기에 사업을 작게 시작할 지라도 나중에는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말임에 대해서 당연시 한다.

다른 사람은 망하더라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된다는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예수의 모든 가르침은 진리의 길에 대한 가르침이다.

예수의 가르침이 심각하게 왜곡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놀라웠던 적이 있다.

어느 목사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사십대 중반의 한 목사는 밤중에 하나님과 교신하기 위해서 산중에 들어가서 기도를 한다고 하였으며, “팔운궁”이라는 중국에서 들어온 종교에 세뇌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교주가 석가모니보다 더 큰 깨달음을 얻었기에 하늘에 태양이 하나이듯이 오직 자신들이 믿는 교주가 태양이라고 강조하는 정도로 진리의 가르침이 심각하게 왜곡된 것이다.

진리의 왜곡됨에 따른 결과, 종국에는 서로가 옳다는 싸움질을 할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진리의 본질을 헤아려 서로가 다툼이 없는 삶을 살아가기 바란다.

“네 시작은 미약하다”는 말은 진리의 길을 들어서면서 느끼는 어리둥절하며 황당함을 표현하는 말이다. 진리의 길이 종교경전에 의해서 왜곡된 까닭에 성직자나 또는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인 냥 알려져 있으나 진리의 본질은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왜곡된 진리를 파는 어느 종교, 어느 집단과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색상이 비슷하다 하여 된장이 똥을 분별하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다”는 말은 진리의 길에 들어서는 과정의 느낌을 표현하는 말이다. 앞서 설명된 바와 같이 일념의 정신집중이 인위적인 노력에 의하여 초보단계를 지난 정도의 깊어진 상태에서 비로소 생각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진리의 길을 가기 위한 일념의 집중을 위한 노력의 시작부분에서는 참으로 미약하기 이전에 황당하기만 한 것이다. 이는 어린 아이기 말을 배우는 것과도 다르지 않지만 어린 아이는 황당함에 대한 경험이 없기에 황당함이라는 생각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생각의 속성을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일념의 집중에 들기 위해서 “이것이 무엇인가. 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말, 한 구절에 생각을 집중하려 하다보면 바닷물에 돌을 던져 메우려는 일과도 같이 황당하기만 한 것이다. 미미하고 미약하고, 허망함 마저 느끼게 됨에 대한 표현이 네 시작은 미약하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말은 수행의 결과는 “사람이 거듭남”이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며 “성령”이라는 말과 같은 “참 나”를 깨달음을 뜻하는 말이며 “나 없는 나”의 알아차림은 “모든 것의 기원”이기에 無上의 법임을 설명하기 위한 말이, 네가 가는 진리의 실에서 그 시작은 미약하지만 네 진리의 길, 너의 본성을 알아차림은 창조자, 즉 “모든 것의 기원”인 하나님임을 앎이기에 창대라는 말로 해석된 것이다.

 

*** 15. 깊은 물에 그물을 던져라. ***

이 말 또한 예수를 믿으면 천국이며 믿지 않으면 지옥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흔히 인용하는 말이다.

예수는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라고 하였으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조차 해석할 수 없기에 종교들의 다툼은 끊일 수 없는 것이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이겨서 승리하는 자가 되어라.”

“꿈에서 깨어나라”라는 등의 모든 말들은 “깊은 물에 그물을 던져라”라는 말과 다르지 않은 뜻으로서 하루 종일 기도하라는 말의 연장이며 기도(일념의 집중상태)에 더 깊이 몰입하라는 뜻임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예수와 석가모니를 비롯한 성인들의 모든 가르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흐르는 망념에 의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 즉 진리를 깨닫기 위한 방법에 대한 연설이었음을 납득할 수 있기 바란다.

*** 16.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

인간의 모든 행위는 마음의 평화를 위함이다.

어느 누구나 궁극적인 목적은 자유와 평화이며 영원한 삶일 것이다.

마음의 평화. 마음.

그것을.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 밖에서 찾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진리의 길에 들어서면서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 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라는 자신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서 그것의 실체는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음은 실재하지 않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인간에게 진정한 기쁨과 평화가 있다면 오직 일념의 집중상태를 통해서 망념이 사라짐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며, 일념이 깊어질수록 더 큰 기쁨과 평화로움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의 미묘한 이치를 이해하고 진리의 말을 항상 지님으로 하여 부질없는 욕망의 늪에서 벗어나 평화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말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로 표현됨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이지 않음의 평등성을 표현하는 말이기에 항상 가까이 지님으로서 사람과 사람이 다투지 않음의 긍정적인 사고로서 평화로운 삶을 살아나갈 수 있는 참다운 삶의 지침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부디 진리를 깨우친 인물들의 가르침에 대한 본질을 바탕으로 진리의 길에 들어서기 바란다.

인류의 평화는 오직 진리의 길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道.

무상(無上)의길.

진리의 길이 곧 평화로 가는 길이다.

 

집필중인 저서...불이일원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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