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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갈등. 아이의 반항? 시기

일념법진원 2010. 2. 2. 13:10

언어. 말...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진실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우주. 천지만물의 근원. 본질이 아무것도 없는 것임에 대해서는 과학?에 의해서도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인간의 몸을 비롯하여 현상계의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분석한 결과는 입자와 파동으로 귀결된다지만 입자나 파동. 그것은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찾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입자와 파동, 그것은 미세 전자로 규정할 수 있거나 또는 氣라는 말로 규정할 수도 있겠지만 이 또한 보는자, 주시자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일 뿐이며 실체, 근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같이 현상계의 모든 것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나"라는 생각의 관념에 의한 환상물질임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되었을 것으로 본다.

불경에서 언급되는 無有라는 말과 無. 空이라는 말, 無我라는 말은 존재하는 모든것들의 근원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며 성경으로 전해지는 예수의 말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은 말들이 왜곡되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본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만, 노자의 도에 대한 설명에서 "道"는 모든 것의 기원이다. 라는 말과 같이 존재계의 보든 것들은 "나라는 생각", 즉 "육체가 나"라는 생각의 관념에 의해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지만 에고는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의 상태에 대해서 상상하거나 짐작할 수 없듯이 "아무것도 없는 것"의 상태, 즉 깨달음, 부처, 신, 절대자, 유일자, 참 나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일 뿐이다.

 

성경, 불경, 그리고 동남아 등지에세 시작된 모든 경전의 본질이 불이일원론에 대한 설명임에 대해서는 이곳의 글들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아이가 자라나는 과정에서의 반항시기에 대해서 설명해 보려 한다.

 

아이에게 본래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마음이 어디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도 아니다.

태어나 말을 배우는 과정에서 의심조차 할 여지도 없이 육체가 나라고 세뇌된 것이며 너무도 당연시하는 나에 대한 집착과 욕망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이 인생이다.

"나 아닌 것을 나"라는 앎. 그것에 의해서 모든 앎은 의구심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 하며 알아내곤 하지만... 앎, 지식의 결론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한 확인 작업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음에도 인류는 왜? 존재하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 또 의심을 해야만 하며 그 근원에 대해서 이해조차 할 수 없으며, 욕망을 버릴 수도 없기에...

아인슈타인은 "우주보다 더 무한한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라고 말한 것이다. 

 

아이의 의심. 의심의 근원이 "나 아닌 것인 육체를 나라고 아는 앎"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런 앎이 경험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경험의 오류, 그것은 생각, 즉 사념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기에 인류는 생사, 즉 삶과 죽음의 고통에서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다.

 

아이가 자아, 즉 육체가 나라는 생각. 인식. 관념이 분명해 지는 시기는 대부분 다섯 살 쯤일 것이다.

두 살이나 세 살 쯤에도 반항을 하거나 저항을 하지만 그다지 의도적이거나 인위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동안의 습관, 버릇에 의해서 투정을 부리는 것이며 인위적인 생각이 개입된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아이가 어떤 말에도 저항하지 아니할 때에는 "육체만이 나라는 생각"이 고정관념이 되기 이전이며, 아이가 어떤 말들에 대해서 저항하거나 이유를 말할 때에는 나라는 인식, 즉 인위적인 생각이 고정관념이 되어가는 시기이다.

나라는 인식이 확고해 짐에 따라 마음이라는 것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이며 "마음". 그것은 "분별심"이며 "집착과 욕망"과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선과 악이 본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이겠는가?

이기주의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선이며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악으로 규정하게 된다. 

의심의 근원이 경험의 오류에서 비롯된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 즉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며 육체만이 나다라는 앎 이후부터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옳고 그름을 따지게 되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알아지는 모든 앎의 근원이 의심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말, 선생의 말... 모두에 대해서 의구심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시기가 반항시기지만 이를 헤아릴 수 없기에 타인에 의해서 구속이 시작되는 것이며 도덕, 규정, 규율 등의 만들어진 틀에 묶이게 되는 것이다.

 

행복과 평화, 자유는 어디에 있겠는가?

세상 어느 누가 "나는 행복하고 평화로우며 자유롭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지식이 많은 사람이?

재물이 많은 사람이?

명성이 높은 사람이?

아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나는 평화로우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류. 자유롭고자 한다면, 생사의 고통에서 구원, 해탈을 소원한다면 오직 진리의 길을 가야만 하기에 그 길을 알리는 것이다.

인간.

어떤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만족할 수 없기에 고통을 겪는 것이며 자유로 가는 길을 모르기에 고통을 자초하는 것이다.

무엇을 소원하는가?

욕망을 버리려 하는가?

 

스스로 욕망이 크다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욕망, 그것은 크던 작던 욕망인 것이며 결코 만족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욕망이 없다함은 소망, 소원,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는 말이다.

 

자유의지라는 것은 없다라고 하였다.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육체와 정신이 하나되어 사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다.

정신과 육체가 하나되는 삶, 그것은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자신의 행위를 관찰하는 행위를 뜻하는 말이다.

정신이라는 말은 마음과 신체를 뜻하는 말로 해석될 수 있기에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살아날 수 있다는 옛말이 있다.

이 말은 자신(육체)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분명히 아는, "내가 행위함을 분명히 안다" 라는 관법(위빠사나)의 수행이기도 한 것이다.

 

싯다르타의 말, 예수의 말과 같이 육체는 손톱위에 올려 놓은 흙 만큼도 나라고 할 것이 없는 것이며 질그릇과 같이 항상 깨질 수 있는 것이다.

그대의 본성인 부처,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는 "진실로 사람이 거듭남"이라고 하였듯이... 항상 자신의 내가 "그것"임을 망각하지 아니하려는 노력에 의해서 자신의 본성, 자성, 순수의식에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생각, 생각, 생각...

그것의 비밀을 알아차림에 의해서 그대는 비로소 자유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며 인생의 해답을 찾는 것이다.

그대의 나.

모든 것의 기원임을 망각하지 말라.

태양같이 모두를 비추거라.

그것이 그대의 본성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  

 

  http://cafe.daum.net/husimwon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