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와 창조 / 자아의 본질. 언어의 기원
인간은 경험된 기억만을 실제로 여긴다.
경험의 시작부분에 대해서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기억할 수 없는 사건들은 경험이지만 경험이 아니다. 살아가는 동안 내내 희로애락, 즉 즐거움과 성냄, 슬픔과 기쁨을 번갈아가며 경험하지만 희로애락을 느끼는 감정의 변화는 드러나지 않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죽음. 그것은 자신의 부재상태이다.
자신의 부재에 대한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억할 수 없기에 경험이 아니다. 지금 내가 존재하기에 존재하지 않음을 상상할 수 없지만 죽음은 두려움으로 남는다. 내가 있기에 과거도 있으며 미래도 있다. 다음 세대도 있으며 내가 죽은 이후의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 내가 죽더라도 우주는 영원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의 죽음이 우주의 죽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살아있으며 지금 생각할 수 있기에 죽은 뒤에도 생각이 있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심할 수 없다. 죽음을 알지만 아는 것이 아니다. 몸은 죽더라도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는 과정에서 몇 번쯤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죽고 싶다는 생각이 아니다. 지금보다 더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둘이지만 둘이 아니다. 항상 함께 하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을 회피하기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늙고 병들어 죽음을 당연시 하는 사람들도 죽음은 가장 큰 두려움이다. 죽음 앞에서의 공포, 두려움, 고통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죽음의 경험에 대해서는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죽음은 더 두려운 것이며 몸에 대한 집착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삶은 고통과 괴로움이다.
경험자가 없는 경험이 있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 납득할 수 없기에 무관심하거나 무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생각이 행위를 멈추고 휴식하는 동안이다. 육체를 나라고 아는 나를 인식하고 현상계를 인식하는 생각이 휴식하는 동안이다. 깊이 잠들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흐르던 생각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만큼은 어떤 생각도 일어날 수 없다.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도 없으며 아무것도 없다는 말도 없다. 육체를 나로 아는 나도 없으며 너도 없으며 우주도 없다. 밝음도 없으며 어두움도 없으며 시간도 공간도 없다. 있다 없다는 앎이 없다. 앎이 없다는 말도 없으며 없다는 생각이 없기에 “아무것도 없음”에 대해서 표현할 수 없다.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의 상태이며 경험이지만 그 상태에 대해서는 기억할 수 없기에 경험자가 없는 경험이다.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내가 있으며 현상계가 있다.
내가 잠을 잤다고 말하지만 그곳에는 나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죽음의 상태와 다르지 않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의 상태와 다르지 않은 “아무것도 없음”의 상태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을 뿐 매일, 매일 죽음과 다르지 않은 “아무것도 없음”과 같은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며 죽음과 같은 아무것도 없음의 상태를 현실에서 경험함에 대해서 “깨달음”이라고 한다.
경험자가 없는 경험이라고 해서 경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기억할 수 없는 경험도 경험이지만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는 기억할 수 없는 경험이기에 오직 기억할 수 있는 경험에 의존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류는 생로병사의 고통과 괴로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자유와 평화라는 말이 있지만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류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 괴로움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있는 동안 내내 깊은 잠을 통해서 “아무것도 없음”의 상태를 경험하지만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와 같은 “아무것도 없음”의 상태에 대해서는 기억할 수 없으며 상상할 수 없기에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의 모든 앎은 의구심이다. 지식의 의구심은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 뿐만은 아니다.
과학의 발전에 의해서 우주를 여행하지만 경험을 바탕으로 시작된 과학을 비롯한 모든 학설과 이론은 깊은 잠의 상태와 깊은 잠에서 나타나는 꿈의 조화에 대해서도 밝혀질 수 없으며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도 밝혀진 바 없다.
첨단과학에 의해 우주의 근원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밝혀졌지만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이 왜? “아무것도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 밝혀질 수 없다. 천지만물에 근원이 없다는 말은 육체가 나라고 아는 나의 근원도 없다는 말이다.
그것, 아무것도 없는 것이 왜 아무것도 없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한 인류는 영원히 고통과 괴로움에서 해방될 수 없으며 자연과 같은 자유와 평화로움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나를 모른다. 기억할 수 없는 경험에 의해서 육체를 나라고 아는 것이다. 육체를 나라고 아는 내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의 오류임을 깨우칠 수 없는 것이다.
인류는 기억할 수 없는 경험에 의해서 육체를 나로 아는 것이며 육체를 나로 아는 나에 의해서 우주가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지구에서 살고 있다고 안다. 경험에 의해서 알고 있는 것이며 경험은 기억이다. 기억은 경험된 생각이며 기억세포에 저장된 생각은 누군가로부터 들어서 아는 것들이다.
천지만물, 즉 하늘과 땅, 그리고 보고 느끼는 모든 것들, 학설과 이론, 이상, 사상에 이르기 까지 모르는 것이 없다. 언제부터 알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기억할 수 없다. 태초에는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와 같이 아무것도 없었다. 인류는 인류가 최초로 발견된 시점에 대해서 태초라고 한다. 그리고 멸망이 있을 것이라고 안다.
모든 앎은 다른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경험에 의해서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나이다. 나, 나, 나 들의 모임이 인류이다.
지식, 앎은 내가 그렇듯이 다는 나 들도 또 다른 나 들, 즉 누군가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것들이며 경험에 바탕을 둔 상태에서 더 많은 것을 발견하는 창조를 거듭해 오고 있는 것이다. 창조는 없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있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이었다. 본래 없었던 것들이 나타난 것이기에 있는 것으로 아는 것이다.
과학에 의해 밝혀진 바와 같이 육체를 포함한 천지만물의 근원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육체를 나로 아는 나를 인식한 이후에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알게 된 기억들이 “나”이며 지성 체이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누구나 다르지 않다. 나는 다른 나와 대체될 수 없기에 실존으로 알고 있다. 경험자가 없는 경험이기에 기억할 수 없을 뿐, 육체가 나라고 알게 된 시점에서는 누구나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와 유사한 “아무것도 없음”을 경험했다.
철학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이지만 철학에 의해서 창조된 말들에 대해서 정의할 수 없다. 경험 이전의 나, 또는 경험과 분리된 나에 대해서 순수의식으로 표현되지만 순수의식 또한 순수의식이 아님으로 표현될 수 있기에 모든 언어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언어는 우주의 근원이 본래 없는 것에 바탕을 둔 것이기에 근원이 없으며 상대적이기에 진실 될 수 없으며 정의될 수도 없다. 삶과 죽음이 그러하며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자유와 구속 등과 같이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행복이 아니면 불행이며 불행이 아니면 행복일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있기에 대상이 있음의 상대적인 모든 언어는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선함과 악함을 논하지만 완전한 선도 있을 수 없으며 완전한 악도 있을 수 없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선함이 있기에 악함이 있는 것이며 선이 없다면 악도 없는 것이다. 밝음이 있기에 어두움이 있음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지구를 벗어나서 계속 밝은 상태가 지속된다면 어두움이라는 말이 필요치 않게 되는 것이며 어두움이 본래 없기에 밝음이라는 말도 필요치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 내가 없으면 대상이 없는 것이다.
인류의 고통은 육체가, 오직 육체만이 나라는 앎의 오류에서 시작된 것이며 그 오류를 발견함에 대해서 “깨달음”이라는 이름이 창조되었다. “나는” 또는 “내가” 라는 말은 “육체가 나다”라는 말의 줄임말이다. “자아”라는 말은 자신의 나라는 말이며 “자신의 나”라는 말에는 육체가 나다, 라는 “나” 이외의 다른 나가 있다는 뜻이다. 언어, 말은 나에서부터 시작되며 나를 나타내기 위한 방법이기에 “어떤 것을 나”라는 가정 하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기억할 수 없는 경험이기에 경험자가 없는 경험을 통해서 “육체가 나”, 즉 “육체=나다”와 같이 육체와 내가 하나라는 생각이 일어난 것이며 그것은 세뇌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나라는 개념이 없는 애완용 강아지에게 이름을 지여주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강아지에게 “메리”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을 부르다보면 강아지는 자신이 “메리”라고 안다.
천지만물의 근원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에 대해서 “나”라고 세뇌된 이후에 “육체가 나라는 생각”에 따른 동일시의 습관에 의해서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나”라는 동일시와 같이 모든 대상에 대해서 “이름”지은 것이며 대상과 이름과의 동일시에 대해 당연해 함이 창조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이름 지은 것은 “나”라는 “사람”이다. “나”도 이름이며 “사람”도 이름이다. 천지만물 중에 오직 사람만이 자신의 몸을 나라고 당연시 한다. “동물”이라는 이름의 그것들은 “나”라는 관념이 없으며 우주라는 관념이 있을 수 없기에 삶과 죽음에 대한 관념도 있는 것이 아니다. 천지만물은 오직 인간이라는 이름, 사람이라는 이름, 나라는 이름의 “나라는 생각”, 즉 육체만이 나라고 아는 “어떤 것”들 만의 관념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창조이다.
인류의 태초는 나의 태어남과 다르지 않다. 인류는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문명시대, 철기시대, 석기시대, 구석기시대, 신생대, 고생대를 분류하지만 우주의 근원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듯이 본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오직 경험에 따른 육체만이 나라는 오류에 의해서 우주가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한다고 아는 우주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며 나라는 관념에 의해서 “우주”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인간은 만족할 수 없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끝없는 발전을 추구하지만 발전의 결과는 멸망일 것이다. 욕망은 끝이 없지만 욕망은 결코 만족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수 천 년을 살아오면서도 욕망을 채워서 만족하여 평화로운 사람은 없었으며 그런 시대도 없었다. 욕망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스스로 만족하여 평화로울 수 있다면 발전을 위한 행위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석기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보다 우주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더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끝없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함에 따라서 변화되어가는 것일 뿐 정신은 구속되어있다. 인간이 만족하여 평화로울 수 없는 까닭은 경험자가 없는 경험인 순수의식을 망각하였기 때문이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기억할 수 없기에 상상할 수 없으나 그것은 경험이전 또는 경험과 분리된 순수의식이다.
인간의 멈출 수 없는 욕망은 경험과 분리된 순수의식의 평화와 기쁨인 인간의 본성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험자가 없는 경험이기에 기억할 수 없으나 기원전부터 본성을 회복한 인물들에 의해서 전해져왔으며 그것은 “진리” 또는 “진리의 길”로 전해진다. 인간이 살아야 할 길이며 인생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일념의 집중상태를 지속하기 위한 노력에 의해서 “참 나”로 회귀될 수 있다. 소위 “깨달음”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육체가 나라는 생각일 뿐, 내가 아님”을 알아차림의 표현이며 “나라는 생각”의 미묘한 이치에 대해 깨우치는 것이다. 깨달음은 육체만이 내가 아니기에 모든 것이 내가 아닐 수 없는 “우주의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깨달음을 우주의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유는 육체에 한정된 나라는 사람들에게는 우주가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한 것이며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우주이기 때문이다.
우주의식으로 보는 세상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우주이다.
하늘도 우주이며 땅도 우주이다. 바다, 산, 동식물....... 모두가 우주가 아닐 수 없다. 언어로 창조된 모든 것들이 우주가 아닐 수 없다는 말이다. 우주에 의식 따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주의식을 상상해볼 수는 있다. 우주의식은 모든 것들 중에서 하늘은 우주이며 땅은 우주가 아니라고 분별함이 없이 모두가 우주일 뿐이다. 하늘과 땅은 우주이며 동물과 식물은 우주가 아니라고 분별할 수 없는 것이다. 천지만물 중에서 오직 육체가 나라는 사람들만이 나와 너 그리고 우주를 다른 것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모든 것들에 대해서 나와는 별개의 것으로 이름 지어 한정짓는 것이며 오직 육체만이 나라는 그릇된 앎에 의해서 삶과 죽음의 고통을 겪는 것이다. 우주에 의식이 있다고 가정할 때에 하늘은 우주이고 땅에 있는 것들은 우주가 아니라고 분별하는 것은 “육체만이 나”라고 아는 사람이 나의 얼굴은 나이고 나의 손과 발은 내가 아니라고 분별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시간과 공간, 동물과 식물, 하늘과 땅, 인간....... 등의 창조된 모든 언어는 “나라는 생각”의 관념에 의해서 창조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우주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나라는 관념에 의해서 있는 것이며 “육체가 나”라는 관념이 사라지면 육체는 천지만물과 다르지 않은 것일 뿐 내가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으며 알아차리는 나는 육체에 한정된 것이 아니기에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육체에 얽매인 정신의 해방으로 표현될 수도 있으며 순수의식 또는 우주의식으로 표현될 수 있을 뿐 상대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는 없기에 언어는 무력할 뿐이다.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이 순수의식이라는 말 또한 육체를 나라고 알고, 내가 사람이라고 아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육체를 나로 알기 이전의 나, 즉 경험에 바탕을 두기 이전의 나를 뜻하는 말이다. 깊이 잠들어있는 동안의 “아무것도 없음”을 상상할 수 없듯이 “육체만이 내가 아닌 나”에 대해서 상상할 수는 없다. 삼매라는 낱말의 뜻과 같이 육체에 얽매임에서 해방된 정신이라고 표현될 수도 있으나 경험에 바탕을 둔 지식으로써는 이해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순수의식과 우주의식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의식”이라는 말 역시 나라는 생각에 의해서 창조된 말이다.
육체가 나라는 내가 있기에 의식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며 오직 육체만이 나라는 앎의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천지만물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의식이 있을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의식도 의식이라는 생각이며, 마음도 마음이라는 생각이다. 우주의식도 우주의식이라는 생각이며 순수의식 또한 순수의식이라는 생각인 것이다. 언어는 육체가 나라는 생각 이후에 나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창조된 것이며 순수의식이나 우주의식 등의 경험에 바탕을 둔 모든 언어로써는 경험과 분리되거나 경험이전의 “참 나”에 대해서 정의할 수 없다.
“육체만이 내가 아님을 알아차림”에 대해서 “도”, “깨달음”, “참 나”, “참 자아”, “부처”, “성령”, “하나님”, “신”, “아트만”, “브라만”, “순수의식”, “우주의식” 등의 여러 가지의 말로 표현되지만 그것들은 대상이 없기에 상대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는 없음을 표현하는 말다.
“육체는 나라는 생각일 뿐, 내가 아님”의 알아차림은 생각의 미묘한 작용에 대한 앎이다. 이것은 지식, 즉 경험된 모든 것들이 허구였음을 알아차림이며 과학에 의해 밝혀진 바와 같이 우주만물이 “아무것도 없는 것”, 즉 천지만물은 “나라는 생각”에 의해 창조된 환상물질일 뿐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육체를 나로 알던 육체가 내가 아니기에 “나는 없다”는 뜻의 無我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육체만이 나라는 앎이 그릇된 앎이었음을 깨우치는 것이다. 육체는 살아있으되 천지만물 중의 하나일 뿐이다. 육체는 산에 있는 나무나 또는 다른 물건들과 다를 바 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우주의 실체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육체를 나로 아는 내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오직 육체를 나로 아는 그릇된 앎에 의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없는 것이다.
육체를 나로 알기에 내가 살고 내가 죽는다는 한정된 목숨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인류의 끝없는 욕망에 따른 발전행위는 삶과 죽음을 실제로 하는 안타까운 몸부림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에게 존재의 이유가 있다면 육체만이 나라는 그릇된 앎에 의해 유한할 수밖에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