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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기원, 모든 것의 기원 p6~p10

일념법진원 2010. 2. 13. 06:40

욕망으로 인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 삶, 그리고 삶에 대한 회한, 죽음에 대한 공포로 마감할 수밖에 없는 나에서 우주의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삶도 죽음도 없는 “참 나”를 찾는 일이며 그 과정을 통해서 평화로움과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참 나”, 그것은 모든 것의 기원이다. 나의 기원이며 인류의 기원이며 우주 천지만물의 기원이다. 노자와 장자는 이것에 대해서 “道”라고 표현한 것으로 전해진다.

“도”는 인생의 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나를 알지 못한다.

태어남을 알지만 경험한 것이 아니기에 경험자가 없는 경험이며 죽음을 알지만 죽음 또한 경험자가 없는 경험이다. 모든 경험은 타인으로부터 들었던 지식이며 지식은 허구이다. 분명한 앎이 없기 때문이다.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 인간의 기원을 알 수도 없다. 우주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밝혔지만 왜 아무것도 없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육체만이 나라고 아는 나, 즉 보는 자의 관념에 의해서 천지만물이 있는 것이지만 이해될 수는 없다. 상반된 모든 언어는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라고 했다. 태어남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며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眞理라는 말은 진실 된 이해를 뜻하는 말이다. “나”에서 시작되기에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모든 언어는 진실 될 수 없는 말이며 진리일 수 없다. 깨달음은 “나 없는 나”, “나 아닌 나”, 즉 육체만이 나라는 생각에서 해방된 “아무것도 없음”의 “완전함”인 정신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설명될 수 있으나 지적으로는 이해될 수 없기에 언어는 무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를 나라고 알기까지의 기억할 수 없는 경험과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마음이 형성되는 과정을 되돌아봄으로써 육체만을 나라고 아는 앎이 경험 시작부분에서의 오류였음에 대해서 짐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나의 태어남이 태초이다.

우주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말은 시간과 공간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님을 뜻하는 말이다. 하늘을 나는 새에게는 나라는 관념이 없다. 우주라는 관념도 있을 수 없으며 삶과 죽음에 대한 관념도 있을 수 없다. 시간과 공간, 밝음도 어두움도 있는 것이 아니다. 원시시대에 태어난 아이는 그 시대에 창조된 말들을 배우게 되며 그 시대에는 지구라는 말도 없었으며 우주라는 말도 없었다. 바다라는 말도 없었으며 강이라는 말도 없었다.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이 산에 자라는 나무와 같이 인식, 관념, 마음,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없으며 생각이 없다는 생각도 없다.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의 아무것도 없음의 상태로 비유될 수 있을 뿐이다.


태어남이 이와 다르지 않다.

태어남에서는 나라는 인식이 있을 수 없다. 나라는 생각이 없기에 너라는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육체가 나라는 생각에 대해서 “에고”라는 간단한 낱말로 표현하자. 에고의 생각에 의해서 아이에게도 인식이나 관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아이는 어떤 말도 어떠한 인위적인 생각도 일어날 수 없다.

천지만물은 끊임없이 변해가지만 변해간다고 아는 것은 오직 에고의 관념이다. 천지만물에는 관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도 모르는 “나라는 생각“이 있기에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高山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태어난 아이를 영하 10도의 물에 넣어서 살아나는 아이만을 키운다고 한다. 아이는 감각기관이 있으되 있는 것이 아니다. 감각기관이 발달되기 전의 아이는 맨발로 겨울에 눈 쌓인 곳에서 놀면서도 발이 시리다는 생각이 없다. 뜨거움과 차가움, 좋고 나쁨에 대한 감각이나 느낌이 없다. 에고는 그것에 대해서 氣運이라고 안다. 에고의 생각일 뿐이다.


아이에게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없으며 잠재의식이라는 것도 없다.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사람으로 길들여지는 것이다. 태어나는 시대와 자라는 환경에 따라서 변해가는 것이며 이는 무위자연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아이가 육체가 나라는 인식, 즉 인위적인 생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나무나 새들과 같이 자연물일 뿐이지만 지속적인 학습에 의해서 자아를 인식하게 된다. “나”라는 관념이 일어나기 이전의 아이의 의식에 대해서 순수의식, 또는 우주의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아이에게는 마음이라는 생각도 없으며 나라는 생각도 없다. 어떠한 생각도 있을 수 없으며 생각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도 없다. 우주와 하나라는 생각도 없으며 우주와 둘이라는 생각도 없다. 삶이라는 생각도 없으며 죽음이라는 생각도 없다. 아이에게 있어서 모든 언어는 의미 없는 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생각이 없다는 생각도 없으며 있다는 생각도 없다. 눈밭을 걸어 다니지만 내가 걷는다, 내가 먹는다, 내가 행위 한다, 내 발이 차다, 아니다, 라는 등의 인위적인 생각이 없다는 뜻이며 인간을 제외한 천지 만물이 그러하듯이 인간을 제외한 모든 것들에게는 관념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본능이나 생명체, 본성 등의 모든 말들 또한 육체가 나라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말일 뿐이다.


사람들만이 자신의 부재를 경험하거나 상상할 수 없기에 죽은 사람에게도 영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하듯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의 미묘한 함정에 빠져서 괴로움과 고통을 겪는 것이다.   

인위적인 생각이 있을 수 없는 아이의 상태가 깨달음이라는 뜻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의 미묘한 속성을 파악하여 일념집중상태의 지속되는 과정을 통해서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아이의 순수의식상태로 되돌아 갈 수 있으며 “아무것도 없음”의 “완전함”으로 표현될 수 있는 무위자연, 즉 아이의 상태에서 처음 일어났던 “육체가 나라는 생각,”  “어떤 것”이 “나”라는 앎이 “생각”의 오류임을 알아차림에 대해서 깨달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사람들은 아이에게도 생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으나 아이에게 생각이 있다면 아이의 생각은 인위적이 아닌 우주의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아이는 태어나서 말을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 생각이 일어나게 된다. 아이가 가장 먼저 인식하는 말은 “육체가 나다”, 라는 말이며 “육체가 나”라는 생각이 최초로 일어난 생각이다. 일념의 무념 처라는 표현의 삼매에서 “육체가 나라는 생각일 뿐, 내가 아님”을 알아차리게 되며 그것에 대해서 無我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며 깨달음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지만 무아라는 말은 “있다, 없다,”의 상대적이기에 옳은 표현일 수는 없다. 이것은 불이일원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우주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들이 둘로 나뉠 수 없으나 오직 실재하는 것이 있으며 그것에 대해서 “아트만”으로 설명한 인물이 인도의 “상카라”이다. 그것에 대한 알아차림을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며 “아트만”은 석가모니의 “부처”,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노자와 장자의 “도”, 예수의 “성령, 사람이 거듭남, 하나님”등과 같이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같은 뜻이며 “해르만 헤세의 존재의 거듭남”도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태어난 아이가 “육체가 나라는 생각”에 의해서 자아를 인식하기까지의 기간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다르며 아이의 성장과정은 야생동물들이 조련사에 의해서 길들여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오직 사람이라는 생명체만이 지능이 발달되어 가는 것일 뿐이다. 지능의 발달과 행복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원시인이 현대인보다 불행하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진화된 사람들의 모든 앎은 또 다른 의구심이며 의구심은 끝이 있을 수 없다.

“참 자아”의 본질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마음, 즉 욕망에 이끌려 살다가 죽는다. 멈출 수 없는 욕망의 근원이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순수의식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이며 “생각”의 이치를 깨우친 인물들에 의해서 진리의 길이 전해져오고 있으나 진리는 절대평등성, 즉 상대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기에 경험에 바탕을 둔 지식으로써는 이해될 수 없으며 해석될 수 없기에 비밀이 아닌 비밀이 된 것이다.  

    

현 시대의 아이들은 그림책을 보며 말을 배워 나간다. 엄마의 입술모양을 보면서 말을 따라 하기 시작하며 사람들의 행위를 보고 들으면서 그들을 닮아가는 것이다. 기저귀를 차고 뒤뚱뒤뚱 걷는 연습을 시작으로 하여 엄마와 맘마라는 말을 시작으로 자동차, 원숭이, 기차 등의 말을 배우면서 언어를 구사하지만 아이가 그것들에 대해서 인식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의 걸음걸이기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 아이에게는 그런 생각이 있을 수 없으며 자아를 인식하기 전의 아이에게는 어떠한 분별도 있을 수 없다. 좋은 옷, 나쁜 옷, 아름다움, 추함, 선함과 악함 등의 분별이 없으며 뜨겁거나 차다는 분별도 있는 것이 아니다. 나라는 관념이 없기에 너라는 관념도 있는 것이 아니며 삶과 죽음, 고통과 괴로움, 행복과 불행이라는 상대적인 관념이 있을 수 없다.


신발을 신겨주어야만 되었던 아이가 어느 날, “내가 할 거야”라는 말을 한다.

“내가 할 거야” 또는 “나도 할 수 있어”라는 말의 시작은 “육체가 나다”라는 최초의 인위적인 생각이 일어났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 동안에 엄마와 아빠, 그리고 자동차 원숭이, 사과라는 말 등의 말을 할 수는 있으나 그것들에 대해서 이것, 저것, 다른 것이라고 분별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낱말들의 뜻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내가 할 거야”라는 말의 시작이 분별의 시작이며 분별은 형상과 이름과의 동일시의 시작이며 습관을 의미한다.

우주의 근원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말은 나도 없는 것이기에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의 상태를 상상할 수 없듯이 지적인 이해, 즉 경험된 사고방식으로써는 상상할 수 없으며 해석될 수 없으나 아이의 상태가 그것과 다르지 않다.


“내가 할 거야”라는 말은 최초의 인위적인 생각이며 최초에 일어난 생각은 어떤 것과 이름과의 동일시에 대한 인식이다. 어떤 것, 즉 “육체=나”와 같이 형상과 이름이 하나임에 대해서 당연시함을 인식한 것이다. 학습의 결과이며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 즉 사회적 동물로 세뇌되어가는 것이다.

자아를 인식하기 전에 말을 배웠으나 그 뜻을 알지 못했던 자동차, 원숭이 등에 대한 낱말들은 “내가 할 거야”라는 “육체=나”를 인식하면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내가 할 거야” 라는 말의 시작에서 형상과 이름과의 동일시에 따른 앎이 창조이며 깊은 잠의 상태와 같은 죽음이 “아무것도 없는 것”의 멸망이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상상할 수 없으나 육체가 나라는 앎이 학습에 의해 세뇌된 “육체가 나라는 생각”이 자아의 시작이며 생각의 오류이다. “내가 할 거야”라는 말을 시작한 아이의 행위는 사뭇 달라진다. 자아를 인식하기 전의 아이의 천진난만한 미소는 “내가 할 거야”라는 말을 시작한 이후부터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죽을 때까지.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 아이의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이 분명하여 고정관념이 된 것은 아니다. 아이의 행동은 천방지축으로 표현될 만큼 두려움이 없다.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라는 소리를 들으며 현실에 조금씩 익숙해져가는 과정에서 가족들의 행동을 흉내 내기 시작한다. 육체가 나라는 관념이 분명해져서 고정관념이 되기 전까지는 마음이라는 것이 없다.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아이가 더 많은 경험을 통해서 나는 사람이다, 즉 육체가 나라는 인식이 분명해 질 무렵에는 하지 말라는 짓을 골라가면서 하게 되며 미운 짓을 하는 시기가 있다. 그 시가가 자아를 분명하게 인식하여 고정관념이 되는 시기이며 마음이라는 것이 생겨난 시점이다.

마음이 본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태어나서 세뇌를 통하여 “나라는 생각”이 일어남이 나의 뿌리이며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나는 육체를 나로 아는 그릇된 나이다. 나무의 뿌리에 영양분이 흡수되어 나무가 자라나고 열매를 맺음으로써 그것이 하나의 나무이듯이 자아는 “나라는 생각의 뿌리”에 낱말들이 흡수된 기억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나이다. 나는 무엇인가하고 스스로 되돌아보면 나는 과거의 경험된 기억에 불과한 것이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이 인류이며 인류는 경험이지만 최초로 일어났던 생각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에 육체만이 “나”라고 알고 있는 것이며 인간의 본성은 우주의식과 같은 순수의식이었다. 마음은 경험된 기억이며 세뇌의 정도에 따라서 관념 또는 고정관념이 된 것이기에 실체가 없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라고 당연시 하지만 마음의 뿌리는 기억세포에 저장된 기억이기에 세뇌에 의해서 항상 달라질 수 있는 것이며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숨이다. 하지만 종교나 사상에 세뇌를 당하면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그 이유는 태어나서 순수의식에 처음 인식된 “육체가 나다”라는 고정관념보다 더 깊이 세뇌당한 결과이다.


생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흐르는 구름과 같다. 내가 생각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괴로움과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도 없다. 생각이 내 생각이기에 내가 할 수 있다면 항상 기쁨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며 육체가 내다 아니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한다는 당연함이 착각이며 나의 생각은 무한할 것이라는 앎 또한 착각이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에 의해서 내가 있음을 아는 것이다. 생각은 이렇듯 미묘하여 그 이치를 알아차릴 수 없다. 불과 1분전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으며 1초 후에 무슨 생각을 할지에 대해서도 상상할 수 없다.


무아라는 말은 내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무아와 무위자연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어린아이의 행위와 자연의 행위는 나라는 생각이 없는 행위이다. 무위 우주와도 같은 뜻이며 나라는 행위의 지시자가 없는 상태의 행위를 뜻하는 말이다. 자아를 인식하는 동안의 아이의 행위가 이와 다르지 않다. 아이는 먹고 배설하며 잠을 자고나면 음기가 성해지지만 아이에게 성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에게는 내가 행위 한다는 생각이 없기에 망설임도 없으며 자유분방하다.

아동기를 지나면서 갈등이 시작되며 갈등은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라는 말들에 대한 뜻을 이해함에서 비롯된다. 경험이 쌓여가면서 모든 것들에 대해 궁금해 하는 시기가 있으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시기를 지나면서 마음이 형성된다.


아이의 마음, 성격은 환경에 의해서 달라진다. 부모는 자신의 욕망을 자식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자신보다 더 잘 살게 해야 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배워왔으며 그렇게 세뇌된 탓이지만 너무도 당연하기에 의심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기주의지만 이기주의라는 생각을 해 볼 수도 없다.

모든 교육은 다른 사람보다 더 잘 해야 됨이 바탕에 깔려있다. 기준, 평균을 정하고 그것보다 잘하거나 못함을 가려서 잘하는 것만이 좋은 것이며 성공과 행복임을 당연시하는 것이다.

은행나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씨앗을 떨어뜨리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 모양이 다르듯이 씨앗들 역시 같은 모양일 수 없으며 같은 형태로 자랄 수도 없는 것과도 같이 인간 역시 모두가 사람이지만 모두가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육체만이 나라는 착각에 의한 집착에 의해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가 싸워서 승리함이 성공이며 행복이라고 세뇌를 당한 것이다. 육체가 나라는 집착에서 비롯된 이기주의의 실상이다. 우주의식으로 본다면 똑같은 사람과 사람이 투쟁하는 삶이 지옥인 것이다. 선함과 악함을 논하지만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이기주의는 자기중심적이다.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악이며 나에게 이익이 됨이 선이다. 60억 인구 모두가 나, 나, 나의 집단이다. 모두가 성공해야 된다는 교육의 결과는 똑 같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싸우고  이겨서 승리해야 된다는 가르침이며 전쟁을 가르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육체가 나라고 아는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한 인류에게 행복과 평화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실체 없는 무지개와 같은 것이다. 내일과 미래 어디엔가 그런 것들이 있을 것이라는 세뇌된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수 천 년을 살아오는 동안에 세상 어느 누구도 만족하여 죽음 앞에서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극소수의 인물들만이 사람들에게는 괴팍하고 비천한 삶으로 보일 수 있었지만 만족하여 평화로웠기에 죽음 앞에서도 나는 기쁘다, 라고 말을 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깨달음이라는 진리를 깨우친 인물들이었다.


생각은 미묘하여 무한하고 영원할 것으로 착각하게 한다. 내가 이기주의이며 내 마음이 모두 욕망임을 감지할 수 없으며 마음의 실체를 모르기에 마음의 움직임에 대해서 영혼이나 신의 행위라고 착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과학은 뇌의 구조를 연구하지만 생각에 대해서는 무지하기에 생각의 이치를 설명할 수 없으며 꿈에 대해서도 해석할 수 없다.

육체가 나라는 관념은 어떤 것과 이름을 동일시하는 생각에서 시작되었으며 육체를 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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