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한 동일시에 대한 탄력에 의해서 스스로 일어남과 멸함을 반복 수행하게 된 것이다. 생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과 사를 반복 순환하기에 신의 뜻으로 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으나 동일시의 습관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능할 수 있다.
어린 아이가 어떤 것, 즉 육체와 나를 동일시함에서 시작하여 다른 것들에 대해서 그것들과 이름과의 동일시를 당연시하듯이 처음 일어난 생각의 버릇은 모든 것들에 대한 당연시로 이어지며 그런 과정을 통해서 생각은 기억에 바탕을 두고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동일시가 습관된 것이다.
예를 들자면, 어떤 것의 이름을 소나무라고 알며 그것을 소나무라고 당연시 하며 다른 것들을 발견하더라도 그것과 이름과의 동일시하게 된다. 소나무고 아는 “어떤 것”과 “소나무”라는 “이름”과는 별개이다. 소나무를 자르기 위해서 소나무라는 “이름”을 자르는 것은 아닌 것과도 같다. 사과라는 것도 이름이며 복숭아라는 것도 과일의 이름이다. “사과”라는 이름과 “복숭아”라는 이름을 바꾸더라도 그것들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며 또한 그것들의 본질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인체를 분석하더라도 물이 75퍼센트이며 나머지는 칼슘을 비롯한 광물질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물과 광물질들을 분석해보면 분자와 원자로 나뉠 수 있지만 그 근원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 다다르게 된다.
이와 같이 천지만물은 존재하지만 근원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밝혀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나도 없고 우주도 없는 것이지만 나는 내가 있음을 알기에 “아무것도 없음”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으며 이러한 현상이 생각의 미묘한 이치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인류는 진정한 평화와 자유로움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의 미묘한 이치를 이해함으로써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며 자신의 생각을 자유자재 함으로써 무위자연과 같이 또는 극소수의 인물들과 같이 죽음 앞에서도 “나는 기쁘다”라며 후회 없는 삶을 살아나갈 수 있다.
어느 누구도 내 마음을 내가 안다는 사람은 없다.
생각은 형상과 이름과의 동일시에 의해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지만 신의 뜻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듯이 생각의 미묘한 실체를 알아차림에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기에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와 죽음의 상태를 상상할 수 없음과 같이 경험에 바탕을 둔 지식으로써의 이해, 해석은 불가능한 것이다. 어린아이와 무위자연의 상태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생각의 미묘함을 이해하기 위해서 “마음이 무엇인가?”라고 스스로 자문해 볼 수 있다.
마음이 무엇인가라는 단답형의 질문을 통해서는 마음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도 없다. 하지만 마음이 무엇인가. 마음이 무엇인가. 마음이 무엇인가. 라는 방법으로 마음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 하나만을 계속 이어나가다 보면 “마음이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마음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 하나만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정신집중이 필요하지만 결과적으로 마음은 실체, 즉 마음에는 뿌리가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이 생각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차림으로써 모든 고통과 번뇌는 사라질 수 있으며 마음은 평화를 느끼게 된다. 생각의 방황하던 습성에 따라서 “마음이 무엇인가”라는 한 구절의 문장만을 생각하는 일념의 상태를 지속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일념의 지속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에 의해서 마음이 실체가 없는 것임을 깨우칠 수 있는 것이며 일념의 지속되는 상태에 대해서 삼매, 또는 일념의 무념 처라고 한다.
지금 실험해 볼 수 있다.
마음이 무엇인가-마음이 무엇인가-마음이 무엇인가-마음이 무엇인가-하는 방법으로 3분 이상 일념에 집중할 수 있다면 집중력이 강한 편에 속한다. 마음이 무엇인가. 라는 일념의 계속되는 상태에서의 결론은 “마음이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마음이라고 알고 있는 관념이나 고정관념은 어떤 낱말이 순수의식에 얼마나 깊이 세뇌되었는지의 정도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일 뿐이며 고정된 마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나 명상, 참선 등의 올바른 방법이다.
마음이 무엇인가?
이제 답이 나온 것이다. 마음은 기억된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 생각은 무엇인가? 라고 같은 방법으로 실험해 볼 수 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으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라고 한 생각만을 이어나가다 보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생각, 즉 일념을 지속하는 일은 매우 힘겨운 일이다.
생각은 과거의 학습에서 시작된 동일시의 버릇에 의해서 다른 대상을 찾아다니도록 길들여진 것이다. 형상과 이름과의 동일시에서 시작된 동일시의 습성은 형상이 없는 이상이나 사상에 대해서도 동일시를 당연시하게 되며 행복이나 불행, 성공과 실패, 자유와 구속, 삶과 죽음, 선함과 악함, 천국과 지옥 등의 모든 실체 없는 말들에 대해서 까지도 어느 기준선을 정하게 되며 육체를 나로 알듯이 자신의 나와 그것들, 즉 낱말들과의 동일시를 당연함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육체가 나라는 생각으로의 삶을 ego로 표현할 때에 에고는 과거의 기억이 나이듯이 어떤 낱말과도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육체다, 나는 몸이다, 라고 말할 수 없듯이 나는 행복이다, 불행이다,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완전한 자유도 없으며 완전한 구속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하여 평화로울 수 없다. 그 이유는 실체, 근원, 뿌리가 없는 것이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방황하는 생각에 이끌려 다니는 것이기 때문이며 나도 모르는 나라는 생각의 속성이다. 생각은 깊은 잠을 통해서만 휴식을 취하며 나머지의 시간동안에는 잠시도 머무름이 없이 행위를 지속하고 있는 것이기에 불행에도 행복에도 결코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흐름현상은 의도적인 정신집중에 의해서만 끊어낼 수 있으며 일념의 시간이 길어진 상태에서는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종교나 또는 마음 수련원, 기도원 등의 우상숭배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나 또는 기체조, 요가 및 유사 종교단체들의 단전호흡 또는 율동에 정신을 집중하게 하는 모든 행위는 스스로 반복 순환하며 방황하는 생각의 흐름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며 방법이다. 종교나 유사단체들은 생각의 미묘한 속성과 이치를 알아차릴 수 없기에 신과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며 그것에 대한 믿음을 강요하게 된다. 신이나 특정 우상을 믿는 마음에서 신과 우상에 대한 생각에만 집중된 상태가 지속됨으로써 생각은 스스로 흐르던 번뇌와 망상을 멈추게 되며 이때 마음은 고요와 평화에 안주하게 된다.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에 대해서 우상의 뜻으로 알게 되는 것이기에 종교와 유사단체들이 성황을 이루는 것이다.
찰나지간에도 수많은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생각은 동시에 두 가지의 생각을 할 수는 없다. 중복되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떠한 급박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생각은 한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짐과 동시에 다른 생각이 일어남이 반복되는 것이다. 감각으로는 그것을 따라잡을 수 없기에 생각으로써는 생각의 미묘한 이치를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다.
운전을 하거나 길을 걸으면서도 내가 한다는 생각 없이 행위를 해 나가지만 생각은 찰나지간에 육체의 행위에 대해서 간섭할 뿐이며 생각은 항상 머무름이 없이 번뇌와 망상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아차릴 수도 없으며 잠시 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지에 대해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이유이다.
차를 한잔 마시면서도 오만가지의 생각이 일어나지만 그 생각을 알아차릴 수는 없다. 눈으로 보는 순간 보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며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를 듣는 순간은 듣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차를 마시지만 마시는 장소나 만나는 사람에 따라서 맛도 느낌도 다르게 여겨진다. 하지만 혼자서 깊은 상념에 잠겨있는 동안에는 사람이 옆에 오더라도 알아차리지 못하며 차의 맛조차도 알지 못한다. 생각이 다른 한 곳에 집중된 상태에서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념, 즉 “마음이 무엇인가”와 같은 한 생각의 집중된 상태와 다른 상념에 잠겨있는 상태와는 다르다.
삼매라는 낱말이 있다. 사람이 육체에 얽매어 있는 동안에 최상의 정신집중상태에서 절대자와의 합일됨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절대자와 실재는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그것은 모든 것의 기원으로 표현되는 창조자의 뜻이기도 하며 하나님의 뜻이기도 한 것이다. 삼매라는 말은 “마음이 무엇인가”와 같이 어느 한 문장에만 집중된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여느 사건에 골몰하거나 독서삼매와 같이 어느 상황에 몰입됨을 뜻하는 말과는 다르다.
누구나 하루 종일 생각을 하고 살지만 하루 일과를 마치고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에 대해서 돌이켜보면 기억나는 생각은 몇 가지에 불과하다. 나머지의 생각은 하루 종일 망념과 망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은 마음이라고 아는 기억세포에 저장된 생각을 바탕으로 하여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끊임없이 순환하며 윤회하고 있는 것이다.
슬프거나 괴로운 과거를 떠올리고 싶어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도 있으며 낮에 일어난 생각이 떠올라서 잠을 못 이루는 일도 허다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은 일어나 있었으며 그 생각에 이끌려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내 생각이라고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은 있을 수 없다. 내가 한다는 착각일 뿐인 것이며 생각은 항상 스스로 일어나 있었던 것이다. 예수(jesus)의 “하루 종일 기도하여 꿈에서 깨어나라”는 말과 같이 일념의 정신집중상태가 하루 종일 이어짐에 대해서 “삼매”라고 하는 것이다.
꿈 또한 생각의 미묘한 작용이다.
누구나 잠에서 깨어나면서 꿈을 기억해 내지만 그 꿈을 꾸고 싶어서 꾼 것이 아니다. 과학은 꿈에 대해서 밝힐 수 없으나 꿈 또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흐르던 생각의 미묘한 작용의 한 단면이다. 어쩌다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라는 생각이 일어날 수도 있다. 생각은 돌이켜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에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라는 방법으로 생각의 흐름에 대한 꼬리를 끊어 냈을 때만 이전의 생각에 대해서 기억할 수 있는 것이며 특별한 생각 이외에는 기억할 수 없는 미묘한 것이다.
꿈은 자신도 모르게 끊임없이 반복 순환하며 흐르던 생각들이 잠이 듦과 동시에 꼬리가 끊어져서 멈추었다가 잠에서 깨어나면서 잠들기 전에 흐르던 생각을 기억해 내는 것이다. 잠을 통해서 생각이 스스로 휴식을 취한 것이다.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생각의 흐름이 끊어지며 “아무것도 없는 것”의 상태이다. 인위적인 생각의 흐름이 정지 상태에 있는 동안에 대해서는 “나라는 생각의 주체”가 없는 어린 아이의 행위와 같이 경험자가 없는 경험이기에 기억할 수 없는 것이다. 생각의 신비로움이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라는 생각으로 흐르던 생각의 꼬리가 끊겼을 때에 꼬리가 끊어지기 이전의 생각을 기억하는 것과 같이 잠들기 전에 흐르던 생각들이 생각이 깨어나면서 생각이 끊어지기 이전의 생각들을 기억하는 것이 꿈이기에 꿈은 잠들어 있는 동안에 꾸는 것은 아니다. 깊이 잠들어있는 상태에서는 꿈을 꿀 수 없는 것이며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뒤척이는 동안에 꼬리가 끊어지기 전의 생각이 일어날 수 있으며 깊은 잠을 잔 후에 꾸는 꿈은 잠들기 전의 생각들을 기억해 내는 것이다.
일념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일념이 깊어지면서는 꿈을 꿀 수 없다. “마음이 무엇인가,” 또는 “나를 모르는 나는 누구인가” 등의 일념이 지속되는 상태에서 잠이 들면 꿈을 꿀 수 없는 상태에 다다르게 되며 더 깊어지면서 생각의 미묘한 이치를 깨우치게 된다.
꿈의 세계화 현실세계와의 차이가 있다면 꿈의 세계는 꿈이 아니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며 현실세계는 꿈인지 꿈이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 꿈에서도 고통을 당하기도 기쁨을 느끼기도 한다는 것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인간의 고통과 괴로움, 기쁨 등의 모든 감정과 느낌, 의식, 무의식까지도 생각, 생각, 생각의 행위에 대한 결과라는 것이다.
모두가 말로 만들어진 소리, 즉 말 변사이므로......
생각은 미묘하여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생각은 육체를 잠들게 함으로써 휴식을 취하지만 깨어나면서부터는 잠시도 한 생각에 머무름이 없이 찰나지간을 반복하며 흐름이 이어진다. 흐르는 강물과 같이 끊임없이 이어지기에 생각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며 생각의 연속성에 의해서 생각이 끊어진 상태에 대해서는 짐작할 수 없듯이 생각이 없는 상태를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흐르는 강물에서 목욕을 하는 사람이 항상 똑같은 강물임에 대해서 의심할 수 없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강물은 계속 흘러가기에 같은 강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생각의 흐름 또한 강물의 흐름과 같이 시작과 끝을 감지할 수 없이 끊임없이 이어지기에 인간은 자신이 항상 존재할 것임에 대해서 의심조차 해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작과 끝에 대해서 감지할 수 없는 생각의 연속성에 의해서 인간은 자신이 죽은 다음에도 세상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당연시하는 것이며 죽은 다음의 세계에 대해서 까지도 신비롭게 포장된 말들에 의해서 세뇌를 당하는 것이며 종교에 세뇌를 당하면 죽음을 불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종교에 깊이 세뇌된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이 깨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 의해서 마약중독자와 같이 지성이 마비되기도 한다.
경험에 의한 사고로써는 생각의 속성과 이치에 대해서 연구조차 할 수 없기에 경험자가 없는 경험인 유아기와 깊은 잠의 “아무것도 없음”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으나 깊은 잠과 같이 생각이 끊어진 상태를 기억할 수 있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고통에서 해방되어 우주자연과 같은 자유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인류의 삶은 철학이 바탕이며 철학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의 삶이다. 그리고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에서의 모든 앎은 또 다른 의구심일 수밖에 없기에 인생에는 해답이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삶을 통해서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지만 세상 어느 누구도 죽음 앞에서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았기에 “나는 기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으며 생각의 미묘한 이치를 깨우칠 수 없는 한 앞으로도 존재할 수 없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에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며 감정에 따라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인류가 겪어야만 하는 고통과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짐작할 수 없으며 그 근원을 찾을 수도 없기에 해결할 방법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류는 우주여행을 하는 첨단과학에 의해서 천지만물의 근원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지만 천지만물이 왜? 아무것도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해될 수 없다.
“아무것도 없음의 완전함”이 인간의 본성이다. 오직 일념의 정신집중상태에서만 그것을 깨우칠 수 있는 것이며 인간의 태어난 목적, 존재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깨우치는 것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 노자와 장자는 인생의 길이라는 뜻으로 道라고 이름 지은 것 같다.
과학은 이제 우주의 실체가 본래 없는 것이지만 보는 자가 있기에 있는 것임에 대해서 깨우칠 수 없기에 원시시대의 인간들과 같이 우주와 인간이 미지의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고 밝힐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태초이후 최고의 발전이라고 자부하는 인류과학은 지구의 멸망을 예견하고 있으며 종교들은 지구의 멸망에 대해서 신의 뜻으로 여기게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지구의 멸망 따위는 없다. 인간과 우주의 근원을 알 수 없는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의 인류는 만족할 수 없는 욕망에 의해 끝없는 발전을 갈망할 것이며 발전의 한계지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지성의 무력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주의 무한함에 의해 지성의 무력함을 깨달을 무렵에는 우주와 인간을 창조한 것이 신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첨단과학에 의해 나와 우주가 신에 의해 창조된 것임에 대해 당연시 하게 됨에 따라 인류는 신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진리에 대해 연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진리는 진실 된 이해지만 생각은 그 바탕이 의구심으로서 또 다른 생각을 낳기에 생각으로는 진리, 도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인류는 종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종교들은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만이 진리라는 편견에 의해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역사와 같이 종교들 간에 서로가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하게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지구는 탄생된 적도 없으며 멸망된 적도 없다. 오직 인류의 육체만이 나라는 그릇된 앎에 의해서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6세기경부터 인류의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이 오류임에 대해서 지적한 인물들이 있었다. 경험의 “오류”라는 말은 750년대의 인물인 인도의 철학자 상카라에 의해서 창조된 말일 것이다. 상카라는 인도 경전의 주석서를 통해서 불이일원론이라는 말로 경험된 사고방식의 오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세계는 실재하지 않으며 실재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