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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2. 무언처(언어가 끊어진 곳 (P1~P5)

일념법진원 2010. 2. 23. 01:21

<A-4, 14쪽 분량의 단편>

 

언어가 끊어진 곳(無言處)


물에 사는 물고기가 목이 말라서 물을 찾아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웃었다. 물속에 살면서도 목이 마른 물고기의 모습과 삶이 고통스럽다며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자신이 물고기라는 앎이 없다.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 예쁜 것인지 추한 것인지 앎이 없다. 무엇이 맛이 있는 것인지, 무엇이 맛이 없는 것인지 앎이 없다.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물이 세차게 흐르는 곳, 그곳에 가야만 한다. 가다가 지쳐서 죽더라도, 천적에게 죽임을 당하더라도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해야 할 일’이 꼭 ‘해야 할 일’은 아니다.


물고기는 ‘나는 물고기다’라는 생각이 없다. ‘나는 물고기가 아니다’라는 생각도 없다. 내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야 된다, 라는 생각도 없다. 내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지 말아야겠다, 라는 생각도 없다. 물고기는 ‘내가 언제 태어났다’라는 생각이 없으며 ‘내가 언제 죽을 것이다’라는 생각도 없다.


물고기는 ‘나는 물속에서만 살아야 된 다’라는 생각이 없다. ‘나는 물을 떠나면 죽을 것이다’라는 생각도 없다. 물고기는 ‘내가 나이가 많다’라는 생각도 없으며 ‘내가 곧 죽을 것이다’, 내가 더 오래 동안 살 것이다‘라는 생각도 없다.


물고기는 앎이 없다.

언어가 없다.

행복, 고통, 성공, 실패, 괴로움, 구속, 자유, 삶, 죽음 등의 말이 없으며 말을 만들어 내는 마음이라는 것이 없다.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 ‘어떤 것’들이 있다.

‘어떤 것’들은 ‘마음’이라는 이름의 투시경을 통해서 ‘물고기’라는 이름의 ‘어떤 것’을 바라본다. ‘마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우주를 바라보며 마음으로 보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도 자신과 같이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함에 대해서는 당연시 하지만 다른 것들에게도 나와는 다르지만 마음이 있음을 당연시 한다. 

나를 모르지만 모르는 것이 없다.

우주를 안다고 믿는다. 천지만물에 대해서 이름을 짓고 그것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나를 모르면서 다른 것들에 대해서 안다는 것들은 “자신”이라는 말을 아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자신의 나이를 안다.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며 그것이 자신의 나라고 말한다.


육체가 나이고 과거의 기억이 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돌이켜보면 나의 근원이 없다.

인간은 누구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선조들과 가문에 대해서 안다. 선조에 선조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기록이 없다. 나의 기록만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기원이 없다.

단군신화처럼 곰이 마늘을 먹어서 사람이 된 것인지, 사람과 비슷한 동물이 진화된 것인지 또는 절대자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에 의해서 나라는 사람을 창조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기에 신화나 전설에 의존해야만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나의 이름은 “철수”이며, 나의 나이는 “쉰”이며 나의 고향은 “서울”이다.

내가 나다, 라는 말은 “육체가 나”다, 라는 말이다.

“육체가 나다”라는 말은 “육체”의 이름이 “나”라는 말이다.

당신 누구야? 라고 물었을 때 “나”는 “육체”다, 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육체가 나는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사람이다, 라고 당연시 하지만 “사람이 나다”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몸이다, “몸이 나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이 인간의 기원은 알 수 없다는 말은 내가 나의 기원을 모른다는 말이다. 내가, 나라고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이름, 나의 나이, 나의 고향, 나의 학벌, 나의 경력....... 모두가 과거의 기억들이다.

기억은 생각이다.

이름과 나이는 언제부터 알고 있는 것인가?


누군가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다.

나, 뿐만이 아니고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나를 모른다. 모든 것을 알지만 아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기원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앎이 자신의 나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고통을 겪는다.

 

첨단과학은 우주의 근원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우주의 근원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면 존재계의 “어떤 것”도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말은 사람도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며 육체가 나도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인 내가 있는 것도 아니며 사람이 보고 느끼는 어떤 것도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것이 어떤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것에도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것들을 분석해 보더라도 근원이 없다는 말이며 그 어떤 것도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다. 천지만물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류는 세상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세상이, 천지만물이 실재하는 것이 아님에 대한 설명에 반박할 여지가 없다. 과학에 의해 밝혀진 “천지만물이 실재가 아님”에 대한 결론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것도 없음”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해와 오해, 크고 작음, 행복과 불행, 선과 악 등의 상반된 말은 모두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우주를 비롯한 천지만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말은 육체를 나로 아는 나도 없다는 말이며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내가 없다는 말은 육체가 내가 아니라는 말이다. 육체를 나라고 아는 나의 오류에 의해서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류는 자신의 존재가 “아무것도 없는 것”임을 알지만 자신의 不在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 없다. 이해와 오해는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라 하였다. 인류는 경험에 의해 아는 육체가 나라고 아는 앎, 즉 육체=나, 라는 동일시를 당연시함이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의 오류임을 깨우칠 수 없기에 인생에 정답이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자신 본래의 나를 망각한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알기에 고통을 겪는 것이다.


본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우주를 비롯한 천지만물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듯이 우주가 있는 것이 아니듯이 시간과 공간, 산과 바다, 인간과 동물, 등이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떤 것들을 표현하는 언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와 천지만물은 언어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는 무한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해서 표현할 수 없다. “아무것도 없다,” 라는 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다, 라는 말도 없다, 라고 하더라도 말은 남게 된다. 어떤 한정된 장소에 있던 것들을 모두 치웠을 때에 그 장소에 아무것도 없다, 라는 말을 성립될 수 있으며 그 장소가 없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주체가 없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해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 언어의 한계이다.


언어의 기원은 “나”이다.

천지만물 중에서 어떤 것을 나라고 아는 것은 인간밖에는 없다.

하늘을 나는 새는 몸이 나라는 생각이 없다. 인식, 의식, 관념, 고정관념 등의 모든 낱말들은 “나라는 생각”의 다른 표현들일 뿐이다. 어떤 낱말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슬픔도 슬픔이라는 생각이며, 기쁨도 기쁨이라는 생각이며, 행복도 행복이라는 생각, 불행도 불행이라는 생각, 삶도 삶이라는 생각, 죽음도 죽음이라는 생각, 고통도 고통이라는 생각, 괴로움도 괴로움이라는 생각....... 마음도 마음이라는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육체가 나다, 라는 나를 인식하기 이전의 “나 아닌 나”가 있었으며 경험에 의해서 “나라는 생각” 즉 육체가 나다, 라는 앎이 생겨났다. 나라는 생각이 없는 나인 유아기의 아이를 상상해 볼 수 있으나 “우주의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의식”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 없다.


“아무것도 없는 것” 즉 내가 없는 나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경험하지만 경험자가 없다. 잠을 잤다고 알지만 잠들어 있는 시간 동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도 없었으며 생각이 없다는 생각도 없었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은 육체가 나라는 그릇된 앎에서 벗어났을 때에 비로소 자유와 평화로움으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 인류는 우주가 아무것도 없는 것임을 알지만 아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우주의 본질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육체만이 나라는 생각은 경험 과정에서의 오류이다. 육체는 나도 아니며 내 것도 아니다. 육체를 나라고 당연시 하는 나는 밧줄을 뱀으로 오인한 경우와도 다르지 않다. 밧줄을 뱀으로 잘못 본 경우에 그곳에 뱀은 없고 밧줄만 있지만 그것들 뱀으로 아는 한 그것을 뱀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되돌아가서 그것이 뱀이 아님을 확인해 봄으로써 두려움과 의심은 사라진다.


육체가 나라고 아는 나는 오직 내가 중심이 된다. 그것이 이기주의라고 안다. 나의 행복, 나의 성공, 나의 평화를 위해서 다른 나를 이겨서 승리해야 함을 당연시 한다. 그렇게 길들여진 것이다. 나에게 이익 됨이 선이며 나에게 이익 되지 않음이 악이다. 사람과 사람이 싸워서 승리함이 성공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 사상이 다른 사람들이다. 한쪽에서 보면 선이며 다른 쪽에서 보면 악이다. 내가 잘해서 남을 이기면 행복이고 지면 불행이다. 육십억이 넘는 인간 모두가 다른 나를 이기기 위해서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라는 것을 만들었다.

아무리 욕망을 채워도 만족할 수가 없다. 세상 어느 누구도 만족하여 행복하고 평화로운 사람은 없었다.

완전할 수 없기에 기도를 한다. 가난한 사람은 잘 살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며 잘 사는 사람은 더 잘 살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한다. 기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것이 사람인지 신인지 알 수 없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까닭일 수도 있다.

그런데, 모두가 나만, 나만, 오직 나만 잘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나만 좀 더 잘 살게 해 달라고.......

대학 정문 앞에서 추위를 무릅쓰고 내 아들 딸들을 합격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절간에서, 교회에서, 유사 집단들의 모임에서 모두가 자신의 나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한다.

나만 잘 살게 해 달라 하는 짓은, 내 아들 딸만 합격시켜달라고 기도하는 짓은 나 말고 다른 사람의 자식은 떨어지게 해 달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정말로 알지 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겠다.

설령 신이 있다 하더라도 신이 기도하는 자들과 같이, 욕망에 눈이 먼 인간들과 같이 이기주의자이기에 옹졸하고 편협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런 아귀다툼의 현실에서 자유와 평화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이를 두고 “아인슈타인”은 “무한한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우주이다, 하지만 우주가 무한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라고 말했을 것이며,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그러면 우주를 아는 것이다.”라고 했던 것 같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지 또한 가공된 것이다.

 

하늘을 나는 새가 육체가 나라는 생각이 없기에 자유 하듯이 사람도 태어나서 육체가 나라는 나를 인식하기 전에는 육체가 나라는 생각이 없었다. 새가 우주가 있고 없고를 분별함이 없듯이 “나 아닌 나”에서는 “의식”만이 있었다. “의식”만이 있다는 생각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천지만물과 분리된 나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적 동물로 세뇌되는 과정에서 육체가 나다, 라는 인식이 분명해 지는 시기가 미운 짓을 하는 아이 시절이다. 태어난 아이는 성장하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육체나 나라는 나를 인식하는 시기는 달라질 수 있으나 말을 알아듣는 정도에 따라서 예쁜 짓만을 하던 아이가 미운 일곱 살이라는 옛 말과 같이 미운 짓을 하는 시절이 있으며 미운 짓을 할 즈음이 나를 인식하는 시기이며 마음이 형성된 시기이다. 마음은 기억된 낱말에 대한 확신에 따른 집착이며 세뇌의 결과이다.


극소수를 제외한 인류 모두가 육체가 나라는 앎에 대해서 의심조차 해 볼 수도 없으니 그 앎을 “무지”라고 주장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이치를 깨우침에서 볼 때에는 무지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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