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자아의 본질
꿈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깨어났다는 뜻은 아니다.
一念이라 했던가, 우리말로는 한 생각으로 표현해야 하지만 이해를 넘어서 있는 말이다. 몇 년 동안 잠을 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면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하였던가.
그래. 아상이다. 아상은 “나라는 생각”이며 “나라는 생각”은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이다.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나라는 생각인 아상이 없었다.
아상이 없었다는 생각도 없었으며 아상이 없었다는 말도 없었다. 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표현은 적절한 표현일 수 없다. 나라는 생각이 있기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말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며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말은 남는다.
“아무것도 없는 것”은 표현하는 “나”가 없어야만 정의될 수 있다.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의 상태이다.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만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이다. “나라는 생각”이 죽은 것이다.
그것은 육체가 나라는 생각이 없는 상태이다. 육체만이 내가 아니며 모든 것이 나지만 또한 육체는 내가 아닌 것도 아니며 모든 것이 나인 것도 아니다. 본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만 보는 자가 있기에 있는 것으로 아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 인과가 있는 것이 아니며 우주가 있는 것도 아니며, 천지만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육체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말을 하고 글을 쓰지만 이것은 나도 아니며 내 것일 수도 없다.
스스로 인류라고, 나는 사람이라고 아는 어떤 것들은 언젠가 그것에 대해서 밝혀냈다. 우주와 천지만물의 근원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천지만물, 즉 하늘과 땅, 그리고 동물과 식물, 나무와 암석, 인체를 분석한 결과 “아무것도 없는 것”임을 발견? 한 것이다. 천지만물의 근원에는 나무에 씨앗이 있듯이 무엇인가가 근본 물질이 있어야만 되는데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다.
나는 문자가 없었던 시대부터 말해왔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해서 無我와 空으로 표현한 바 있으며 “道”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예수(JESUS)라는 이름으로 설명하면서는 그것의 근원이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지금 인류는 관념의 숫자로는 헤아릴 수 없는 만큼의 태초와 멸망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가장 진화된 상태이며 두뇌의 발전 또한 최상의 수준이다. 인류는 그렇게 시작하여 태초와 발전 멸망을 반복 해 왔으며 (멸망을 앞 둔)또 다른 태초의 시작 즈음에서의 지성은 “우주”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곤 하였으나 왜, 아무것도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밝혀낼 수 없었다.
그것이 지성의 한계지만 지성은 지성을 버릴 수도 없었다. 육체가 나이며 지식이 나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며 경험되었으나 망각된 순수의식의 “참 자아”에 대해서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언어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천지만물의 근원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듯이 모든 언어 또한 실체가 없는 바탕위에서 창조된 것이기에 어떤 말도 질실 될 수 없는 것이기에 진리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언어는 어떤 것을 나라는 가정 하에서 대상을 분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창조된 것이기에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주와 천지만물이 있든지 없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이 경험된 오류를 기억할 수 없음에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자유와 평화를 위한 그 길을 알리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과 괴로움은 기억할 수 없는 경험의 오류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인간은 그 오류를 발견할 수 없기에 그 오류를 발견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 태초부터 지금까지 말해왔다.
진화된 지성을 통해서 천지만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이제 지성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것이며 이제 지성을 버려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여러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났었으며 그때마다 같은 말을 하곤 하였다. 석가모니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에는 무아와 공으로 설명하였으며 그 길에 대해서도 설명한 바 있다. 소크라테스의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였으며 “검증되지 않은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라는 말도 하였으며 불행이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상카라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에는 보다 더 분명하게 경험의 오류에 대해서 설명한 바 있으며 아인슈타인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에는 지성으로 설명하려 하였으며 “무한한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우주다, 하지만 우주가 무한한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상대성 이론을 통해서 보는 놈이 있기에 대상이 있는 것이라는 말도 하였다.
본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만 육체만이 나라는 관념에 의해서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던 것이다.
너희가 보는 천지만물에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실재하는 것은 오직 너희의 순수의식이며 그것에 대해서 달리 표현하자면 천지만물과 분리되지 않은 자아, 즉 육체에 한정되지 않은 정신으로 표현될 수 있다.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에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라고 한바 있다.
다시 몇 가지의 비교 사례를 통해서 천지만물이 관념의 산물임에 대해 설명해 본다.
천지만물 중에서 오직 너희만이 육체를 나라고 당연시함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으나 다른 동물들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이해될 수 있으며 삶과 죽음, 고통이라는 생각이 기억된 언어에 집착되어있는 생각에 불과한 것임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희는 기억된 모든 말들에 대해서 마음이라고 하며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다. 생각의 미묘한 속성이라고 표현될 수밖에 없으나 예수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했던 말들의 본질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그 길을 다시 전하는 것이다. 나의 말들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고양이와 쥐, 그리고 너희가 기억할 수 없는 어린 시절을 비교한다면 짐작할 수는 있으나 꼭 그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너희는 기억된 지식으로 분별할 것이기 때문이다. 천지만물 중에 오직 너희만이 어떤 것(육체)을 나라고 당연시 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해서 “우주”라는 이름을 그것이라고 당연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고양이와 쥐를 예로 들어보자. 고양이는 자신이 고양이라는 개념이 없다. 자신의 몸이 나라는 개념도 없기에 쥐를 쫒는다는 생각도 없으며 쥐를 쥐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쥐를 먹는다는 생각도 없으며 쥐가 죽었다는 생각도 없는 것이다. 쥐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내가 쥐라는 생각도 없으며 쥐가 아니라는 생각도 없다. 내가 죽는다는 생각도 없으며 살아있다는 생각도 없다. 다만 생명력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하늘을 나는 새도, 꽃도, 나무도. 모두가 이와 다르지 않다. 오직 어떤 것을 나라고 아는 사람이라는 것들만이 나와 너, 다른 것을 분별하며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천지만물의 실체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듯이 세상은 언어, 말로 존재하는 것이다. 의식도 의식이라는 생각이며 마음도 마음이라는 생각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천지만물의 근원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말을 오해하여 에너지(氣)가 변화된 것이라는 생각을 또 일으키게 되지만 에너지 또한 에너지라는 생각일 뿐이다.
본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었다.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과 같이 시간과 공간, 나도, 사람도 있는 것이 아님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다만 나타나서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알게 된 것이다. 애완용 강아지에게 “철수야”라고 부르다 보면 강아지는 자신이 철수가 되듯이 그렇게 길들여진 것이다. 순수의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시절이기에 경험이지만 경험자가 없는 경험일 뿐 경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마약에 취하거나 술에 취한 자가 자신의 행동을 기억할 수 없다고 하여 경험하지 않은 것이 아니듯이 순수의식은 망각된 경험이며 그 경험의 오류에 의해서 인류는 삶과 죽음의 고통을 겪는 것이다.
나는 어디에나 있었으며 항상 있어왔다.
상카라라는 이름으로 나타났을 때에는 경험의 오류에 대해서 뱀과 밧줄의 비유와 마술사의 손을 예로 들어 설명한 바 있다.
뱀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산책길에서 길가 풀 섶에 떨어진 밧줄을 뱀으로 잘못 보았다면 그 곳에 뱀은 없고 밧줄만 있지만 그것은 뱀인 것이며 그것을 뱀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밧줄이 아닌 뱀인 것이다. 그것이 뱀인지 밧줄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곳으로 가서 확인해야만 그것이 밧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마술사의 손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꽃과 나비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그것을 실제로 여기지만 마술사는 그것이 실제가 아님을 앎과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나는 예수로 나투어서 수많은 비유를 들어 진리를 말하였으나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에 의해서 변질되고 왜곡되었다. 이제 그 당시에 했던 말들에 대해서 다시 설명하려 하니 왜곡하지 말기 바란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