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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자. 그대의 본성이다/ 예수어록 (7~p9)

일념법진원 2010. 3. 2. 19:16

10의 “깊은 물에 그물을 던져라”라는 말 또한 수행에 대한 가르침으로서 일념으로 깊이, 깊이 들어가라는 뜻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4의 “육체는 질그릇과 같은 것이다”라는 말은 육체는 천지만물의 어느 것과도 같이 항상 죽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누구도 내일을 알 수 없다. 어느 누구도 모르는 내일을 알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육체에 얽매인 마음은 죽음의 두려움이 바탕에 깔려 있기에 알 수 없는 내일과 미래, 그리고 죽음, 죽음 다음의 세상까지를 걱정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인간의 삶은 근심과 걱정, 불안, 초조, 긴장에서 해방될 수 없는 삶이며 나무가 잘려나가듯이 풀포기가 뽑혀서 말라 죽듯이, 생태 고리의 순환 과정과 같이 항상 사라질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기도하라”는 말과 같이 일념의 기도를 통해서 (육체가 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남)꿈에서 깨어남의 표현인 “깨달음”에서는 육체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아님을 깨우치게 됨을 뜻하는 말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라는 말의 뜻은 安心立命이라는 말로서 설명될 수 있다.

“나는 행복하다”라는 말은 지금까지 나는 행복하지 않아서 불행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 뜻이며 “나는 불행하다”라는 말은 나는 지금까지는 불행하지 않고 행복했었다, 라는 말과 다르지 않은 것임과 같이 모든 언어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며 기쁨과 슬픔 또한 이와 다르지 않으며 육체만이 나라고 아는 인생은 삶과 죽음이 있기에 세간의 삶에 대해서는 安心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立命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생명이 서 있다는 뜻으로서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님을 뜻하는 말이며 진리를 깨우친 인물, 즉 도통하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안심입명이라는 말은 영원한 삶이라는 뜻의 영생, 해탈, 구원의 뜻으로서 “천지만물과 분리되지 않은 자아”, 또는 “참 나”로 표현되는 “순수의식”의 “깨달음”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13의 “성령은 어디에나 있다, 없는 곳이 없다”라는 말과 창조자, 절대자라는 말은 노자와 장자의 “道”의 설명과 다르지 않으며 불성과도 다르지 않은 말이다.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참다둔 도가 아니다. 도는 어디에도 있다. 천지만물에 깃들어 있으며 미천한 것들에도 깃들어 있으며 똥과 가라지에도 있다. 또한 도는 모든 것의 기원이다, 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언어는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기에 “나”가 있는 한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해서 정의할 수 없다. “나”가 있기에 언어가 있는 것이며 “나”가 없음이 “아무것도 없는 것”의 “완전함”이다.


우주를 비롯한 천지만물의 근원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듯이 언어에는 근원이 없다. 언어로 표현되는 모든 말은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재미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한 창조론과 멸망 론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해서 “우주”라는 이름으로 창조된 것이며 “창조”라는 “이름”과 “멸망”이라는 “이름”이 창조된 것이다. 실체 없는 언어의 유희이다.


인류의 모든 문제, 고통과 괴로움은 육체가 나라는 그릇된 앎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생각의 미묘한 이치이지만 생각으로는 이를 해석할 수 없다. 오직 일념의 무념 처에서만 모든 것이 분명해 진다.

성인으로 알려진 모든 인물들의 말은 기원전부터 구전으로 전해지면서 신비로움으로 포장되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사람의 아들이었으며 그대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인간의 뇌의 성능은 모두가 다르지 않다. 다만 만족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욕망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분별할 때에 좋고 나쁨이 있는 것이다.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모든 언어가 그러하듯이 이해한다는 말은 오해하는 것이지만 조금이나마 의구심을 풀어야 된다.

언어의 허구성에 대해서 상기하기 바란다.

나는 육체만을 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이 있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념의 무념 처에서 “나라는 생각”이 죽었다. 이에 대해서 사람이 거듭 남으로 표현된 것이다. 시간과 공간 및 현상계가(과학에 의해 밝혀진 바와 같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듯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육체와 현상계는 (육체=나라는 동일시의)나라는 관념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다.


“깨달음”으로 알려진 생각의 미묘한 이치에 대해서는 간단히 설명될 수 없는 것이기에 이  곳을 통해서 전달될 수 없으며 설명한다 하더라도 지성으로 해석될 수 없기에 쉬운 일은 아니지만 열망이 있다면 전수해 줄 수도 있다.

일체 유심조라는 말의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나마 조금은 이해될 수도 있다. 일체는 나를 비롯한 천지만물을 뜻하는 말이며 나의 모든 생각 까지도 포함된 말이다. 일체 유심 조는 그 모든 것들이 마음이 지어놓은 환상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요약한다면 “육체가 나라는 생각”이 마음이 지은 환상물질이라는 뜻이며 일체 유심 조에 대한 더 세분화된 설명이 반야심경이다.

사람들은 我相의 뜻에 대해서조차 이해할 수 없다.

한자와 한글의 차이이다. 아상은 “나라는 생각”이라는 말이며 “나라는 생각”은 “육체가 나라는 생각”의 줄임말이다.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마음이 변하는 것이다. 내가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내 인생이라고 하며 고통을 겪는다. 꿈에서 깨어나라는 말의 뜻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목적은 오직 道를 닦기 위함이다.


삶이 도를 닦기 위한 목적이 되었을 때에 비로소 인류는 평화로울 수 있다.

그대의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모든 생각은 항상 의심이며 근심과 걱정이기에 망념이며 뇌세포를 억압하는 것이다. 생각의 억압되는 정도에 따라서 육체는 여러 형태로 반응하며 그것이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에서 기타 질병 및 난치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인류에게 평화가 있다면 오직 도를 닦아 나가는 방법뿐이며 기도와 명상 등의 일념상태의 지속됨에서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천지만물이 그러하듯이 육체 또한 생각으로 창조된 환상물질이기 때문이다.

 

예수와 석가모니, 노자와 장자... 그들의 본질이 곧 그대의 본질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없다.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면 오직 "참 나"의 정체를 찾기 위한 노력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진리의 길이며 위 없는 길, 무상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절대자, 창조자, 하나님... 그대의 본성이다.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이 글을 보낸다.


진원 

http://cafe.daum.net/husimwon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