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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서(죽은 자의 생각) p1~p4

일념법진원 2010. 3. 4. 07:04

死者의 書


자신의 육체를 죽였던 유명인들의 영혼(마음)을 본다.

나라의 최고 권력자 그리고 유명 연예인 또는 정치가, 사업가, 방황하는 젊은이, 어린 학생 들 까지...

    

자살하는 사람들의 사연은 모두가 다르지만 다르지 않다.

인간은 기억된 고정관념의 억매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고정관념은 경험 된 기억이며 기억은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기억세포에 저장된 생각들은 지식이다. 지식과 앎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인식, 이해, 앎, 지식, 관념, 고정관념, 마음....... 더 많은 낱말들을 만들어 낸다 할지라도 이것들은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기억이며 기억, 마음은 경험이나 간접경험을 통해 저장된 생각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분명히 기억할 수 없지만 고정관념이라는 마음은 시절부터 타인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이상이나 사상들 등의 지식에 대한 확신과 확신에 따른 관념에 의해서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는 고정관념이 생겨난 것이며 그것이 “마음”이다.


마음이 본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살아오는 동안 누군가로부터 듣거나, 책을 보거나, 등에 의한 지식들과 육체가 나라는 생각이 일체가 된 것, 즉 고정관념이 되어버린 생각이 마음이며 그것들, 지식과 육체를 나로 알고 있는 것이다.

 

경험된 사고방식의 오류이다.  

육체의 고통은 한 생각의 차이로 극복될 수 있으나 마음의 고통은 육체를 초월한다. 영혼을 본다는 말은 그들의 마음을 본다는 뜻이며 마음을 본다는 말은 마음 이전의 순수의식(생각)을 뜻하는 말이다.

  

육체와 생각은 하나지만 하나가 아니며 둘이지만 둘로 나뉠 수 없다. 하지만 하나이면서도 분명히 둘로 구분된다. 천지만물은 원인 없이 나타나고 사라짐을 반복 순환하는 것이며 나타나는 모든 것들에는 원인이 있다. 그리고 원인의 근원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육체는 생각 없이 행위 될 수 없다. 깊이 잠든 상태이거나 마취에 의해서 생각의 흐름이 끊어지면 육체는 행위 할 수 없다. 술에 취해 있거나 마약에 취한 상태에서는 “나라는 생각”, 즉 “내가 행위 한다” 또는 “내가 행위 하지 않는다.” 라는 생각이 없는 행위이다.

자아를 인식하기 이전의 어린아이의 행위와 약물, 또는 술에 만취된 상태의 행위는 유사하다. 전자의 행위는 “육체가 나다”라고 알기 이전의 행위이며 후자의 행위는 육체가 나임을 알지만 경험에 따른 습관에 의해 행위 하는 것이다. 경험에 따른 습관은 기억세포에 저장된 생각에 의한 행위이다. 기억세포에 저장된 생각이 “마음”이다.


육체는 저장된 기억세포의 작용에 의해서 행위 되지만 찰나지간으로 일어나는 순간기억세포에 의해서 현재의 상황에 적절하게 반응한다. 적절한 반응이라 함은 자신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일을 뜻하는 말이다. 자신에게 이익 되는 일이라 함은 자신의 행복과 평화로운 마음을 위함이라는 뜻이다. 

마약에 취했거나 만취상태에서는 순간생각세포의 작용이 거의 불능상태가 되기에 기억세포와의 유기적인 협동체계가 이루어질 수 없다. 약물에 취한 상태의 행위는 어린아이의 無我상태와 유사하여 잠시 평온함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잠시의 평화로움은 순간기억세포의 활동이 억제됨에 의해 기억세포와의 연결이 끊어진 상태로 표현될 수 있다. 이런 상태는 명상의 상태와 다르지 않다. 하나의 대상, 즉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라는 한 구절에 정신이 집중되어 있을 수 있다면 마음은 고요한 평화로움에 안주하게 된다. 


마음은 경험된 생각, 즉 타인으로부터 세뇌된 기억세포의 작용에 불과한 것이다. 경험에 바탕을 둔 고정관념이 타의에 의해 무시되어 회복할 수 없음에 의해서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자살한 사람, 죽은 자는 호흡이 멈추고 맥박이 뛰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라는 생각”은 잠시 남아있다. 고통을 견딜 수 없음에 의해서 자신을 죽이는 행위를 시작함과 동시에 “육체가 나다”, 라는 집착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정신 상태에 머물게 된다. 찰나지간 동안이다.


인간은 누구나 육체에 억매인 정신에서 해방될 수 없는 것으로 알지만 “육체가 나다.” 라는 생각을 초월한 인물들이 있었다. 육체에서 해방된 정신(순수의식)의 “나 아닌 나”에서는 삶도 죽음도 없다. 육체가 나다, 라는 생각이 없는 어린아이의 상태와 유사하다. 자유라는 낱말에도 구속되지 않은 자유이다. 자유란 구속에서 풀려남으로 표현될 수 있으나 자유, 구속, 불행, 고통 등의 모든 언어가 끊어진 상태 즉 언어와 생각을 초월한 “절대 완전함”이다.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이 자유라는 말과 구속이라는 말이 없음과 같은 진정한 자유이며 평화이다.


천지만물은 음과 양이 합하여 나타나고 사라짐을 반복한다. 음과 양이 있기 전에 음이라는 말과 양이라는 말이 합하고 그 합한 것이 자취를 감추었다가 우주의 무위, 작용에 의해 生과 滅이 반복되듯이 천지만물은 끊임없이 반복 순환되는 윤회를 하고 있다. “나”라고 아는 육체 또한 천지만물과 같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우주가 “나는 우주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듯이 하늘을 나는 새는 내가 새다, 라는 앎이 없다. 천지만물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육체만이 나다, 라는 앎에 의해 고통을 겪는다.

우주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육체가 나다, 라고 아는 사람들에 의해서 우주라는 말이 창조 되었다.  ‘우주’라는 말이 없으면 그것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라는 말도 그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라는 말이 없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내내 육체가 나다, 라는 육체에 억매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것을 당연시 한다. 하지만 자신의 나를 위해서 다른 나를 짓밟아야만 하는 아귀다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 고귀한 까닭은 하늘을 나는 새가 자유 하듯이, 천지만물과 분리되지 않은 “참 자아”로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참 자아”가 아니다. 그것은 순수의식, 우주의식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신”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이해될 수 없으나 망각되었기에 기억할 수 없는 경험과 분리된 순수의식의 “나 아닌 나”가 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육체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목적이다.

욕망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는 경험과 분리된 순수의식의 기쁨에 대한 갈망이며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안타까운 몸부림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내내 희망과 행복을 찾아서 내일과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가지만 달려 나가서 다다르는 곳은 자신의 죽음이다. 욕망은 결코 만족으로 해결 될 수 없는 것이기에 세상 어느 누구도 만족하여 평화로운 죽음을 맞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둘이 아닌 하나이다. 동전의 양면 중 한 면은 죽음이며 반대쪽은 삶이다. 그대는 타의에 의해서 양면이 존재하는 동전을 얻었다. 그것이 지식이며 지성 체이다. 양면의 동전이 그대의 마음이다. 그대에게 양면의 동전인 마음이 없었을 때에, 동전이라는 말과 마음이라는 말을 배워서 알기 이전에는 자유나 구속이 없었다. 없었다, 라는 생각도 없었으며 생각이라는 생각도, 생각이라는 말도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의 한쪽 면에는 긍정과 믿음이며 마음의 반대쪽 면에는 부정과 의심이다. 동전의 한쪽 면에는 믿음과 사랑 소망이며 동전의 반대쪽 면에는 의심과 증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동전의 양쪽 면을 동시에 볼 수 없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눈을 볼 수 없음과 같이 자신의 마음의 양면을 동시에 볼 수 없다. 자신의 눈을 보기 위해서는 거울을 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거울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의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마음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보면서 자신의 거울 속의 모습과 거울 속의 모습에 걸맞을 것 같은 마음과를 비교하여 -나는 이런 사람인데, 너는 저런 사람, 또는 너는 다른 부류의 사람- 이다, 라는 분별을 하게 되며 스스로 분별된 가면을 만들기 위해서 살다가 죽는다.

 

살아가는 동안 내내 자신의 거짓된 나, 즉 가면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은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는 나를 제조하기 위해서 수 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한 많은 유명한 사람들이 합쳐진 복사물과 닮기 위한 노력을 통해서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고정관념이 만들어 졌고 고정관념이 지금 그대의 ‘나’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고정관념인 마음, 즉 양면을 가진 동전이 나의 것도 아니며 나도 아니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었다. 양면의 동전인 마음과 몸이 ‘나’다 라고 알기 이전에는 ‘나’라는 것이 없었다. ‘나’라는 것이 없었다는 생각도 없었으며 없었다는 말도 없었다. 지금 그대의 나가 존재하기에 인위적인 생각이 없던 나를 “나 없는 나”, 또는 “나 아닌 나”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 無我이다. ‘나’라는 존재가 있는 ‘나’는 나의 부재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다.


그대는 태양이 없다고 말할 수 없으며 우주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아니 말을 할 수도 있으며 글을 쓸 수도 있다. “우주는 없다, 또는 태양은 없다, 밝음도 어두움도 없다”라는 글을 쓸 수 있다하더라도 자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있다, 없다, 의 두 낱말의 범위를 벗어날 수 있는 언어는 없다. 모든 언어는 상대적이기에 “아무것도 없음”의 상태에 대해서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없음”의 “절대 완전함”, “절대 순수의식”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한 말이 불이일원론이다. 


그대의 나는 ‘깊은 잠을 경험할 수 있으나 깊은 잠의 상태’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이 ‘아무것도 없음’의 상태이다. 또 있다. 어린 시절의 ’나라는 생각‘이 없었던 상태’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다만 어린 아이를 보면서 ‘그럴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상상을 할 수 있겠지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 ‘생각이 없음’의 상태를 경험하거나 짐작, 또는 상상할 수 없다. 옆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상상할 수 없음과도 다르지 않다.

‘그것’이 ‘아무것도 없음’이다.


사람은 누구나 ‘아무것도 없음’을 알거나 설명하거나 경험할 수 없다. 경험을 했지만 기억할 수 없으며 상상할 수 없기에 표현할 수 없다. 경험은 경험이 아니다. 우주의 본질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첨단과학에 의해 우주의 본질이, 천지만물의 근원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인류는 왜? 천지만물의 근원이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정의할 수 없다.

천지만물이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의 오류에서 비롯된 환상임을 깨우칠 수 없기 때문이다.

경험은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이 그 시작이며 착각이다. 인간의 본성은 경험 이전, 또는 경험과 분리된 순수의식이며 우주의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의 모든 앎은 또 다른 의구심이다.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낳듯이 의심은 또 다른 의심을 낳기에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인간은 경험과 분리된 의식으로의 회복됨에서 모든 의구심이 사라지며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이 자유하다. 천지만물과 분리되지 않은 자아를 회복함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이라는 말로 전해지는 진리를 깨달은 인물들이 있었으며 지금도 있다. 그들은 인간의 본질과 우주의 본질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보고 느끼는 현상계의 본질은 無, 空이다, 그러니 집착과 욕망을 버려라.

너희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본래 순수의식, 우주의식이다.

육체만이 나라는 앎이 착각이다, 그러니 꿈에서 깨어나라.

현상계의 모든 것은 너희의 관념, 욕망에 따른 마음이 지은 환상이다. 보고 느끼는 모든 것들은 아침이슬과 같은 것이며, 물거품과 같은 것이며, 허깨비와 같은 것이며, 모두가 꿈과 같은 것이다. 생로병사의 고통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해왔다.

 

‘아무것도 없음’과 ‘진리’는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불이론, 불이 일원론은 ‘아무것도 없음’,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낱말이다.

우주는 무변광대하다. 무변광대하다는 말은 시작도 없으며 끝도 없다는 말이다. ‘시작’이라는 낱말과 ‘끝’이라는 낱말, 그리고 ‘우주’라는 낱말, 즉 언어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음’이 성립될 수 있다. ‘말’이 없다면 없는 것이다. ‘우주’라는 말이 없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라는 말도 없다면....... (      )

우주를 표현하는 無, 空이라는 말이 있으나, ‘우주, 무, 공’이라는 말이 없음....... (      )


지금 그대가 앉아있는 곳의 밖을 보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