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대가 앉아있는 곳의 밖을 보라.
그곳에 있는 무엇인가를 보고 느낄 것이다. 그것이 소나무이든, 사철나무이든, 꽃무더기이든 보이는 것의 이름을 ‘소나무’라고 이름지어보라. 아니면 소나무를 연상해도 상관이 없다. 그것을 상상해보라. ‘소나무’를 상상한다는 것은 ‘소나무’라는 이름을 생각하는 것이다. 소나무를 상상한다는 것은 소나무라는 이름과 그것의 이미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소나무라는 말은 ‘어떤 것’을 ‘소나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과학자나 미생물학자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던 무엇을 발견했을 때에 발견한 ‘무엇’에 대해서 이름을 짓고 “무엇”과 이름과를 동일 시 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태어난 아이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고 아이와 이름을 동일시하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소나무’는 소나무가 아니다.
‘어떤 것’=‘소나무’라고 이름 짓고 “어떤 것”과 “소나무”가 둘이 아닌 하나임의 동일시를 당연시 하는 것이다. ‘그것’과 ‘소나무’는 별개의 것이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 순수의식에서부터 배운 습관에 따라서 ‘대상’과 ‘이름’에 대한 동일시가 당연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며 착각이 세뇌된 것임에 대해서 의심할 수 없다.
육체와 나와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은 동일시의 세뇌에 따른 착각이며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의 오류이다.
모든 언어는 허구이다.
사람들 모두는 언어의 허구성에 대해서 짐작도 상상도 할 수 없다. 삶, 죽음, 고통, 행복, 불행, 천국, 지옥......, 이 모든 말들을 만들어 놓은 것은 스스로 “육체=나=사람”이라는 이름의 어떤 것들이다. 신이라는 말, 창조라는 말을 만들어 놓은 것도 “육체=나”라고 세뇌된 사람이며 그 말들에 집착하여 고통을 겪는 사람들도 사람이라는 이름의 “어떤 것”이다.
소나무를 상상한 뒤, 소나무라는 이름을 지운 후에 다시 상상해 볼 수 있다. ‘소나무’라는 이름이 없는 상태에서 그것을 상상해 볼 수 있는가? 아니다.
소나무라는 이름이 없는 상태의 ‘그것’(소나무라고 불리던 그것)의 이미지는 상상될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이와 다르지 않다. 빨강색이라는 말과 색상에 대한 상상도 이와 다르지 않다. 빨강색의 수건을 상상해 본 이후에 ‘빨강색’이라는 낱말이 없는 색상을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이 오묘하고 미묘한 ‘생각’의 이치이다.
2+2=4다. 이런 숫자는 부피나 무게 또는 길이 등의 모든 물질에 대한 비교를 통해서 크지도 않으며 작지도 않음의 표현방법으로 ‘=’ 라는 부호를 사용한다. ‘2+2’와 ‘4’는 둘이지만 둘이 아닌 하나이다. 하나이면서 둘로 나눌 수 있으며 하나이기도 하며 둘이기도 한 것이다. 둘이지만 둘이 아니며 하나지만 하나가 아니다.
‘소나무라는 이름’과 소나무인 ‘그것’은 하나가 될 수 없다. 둘이다. ‘그것’=‘소나무’ 일 수 없다는 말이다. 어떤 것들의 이름과 ‘그것’은 ‘=’ 라는 부호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언어의 허구이다. 모든 지식은 언어, 즉 낱말들과 낱말의 뜻에 대한 기억이다. 기억된 낱말들에 대한 인식과 인식된 낱말들에 대한 이해의 수준 정도에 따라서 ‘그럴 것이다, 또는 옳다’, 옳지 않다, 라는 분별이 관념이라는 마음이며, 이해에 따른 관념에 대해 확신하거나 또는 타인에 의해서 세뇌되어 고착화된 신념이 고정관념이며 마음이다.
색상이나 또는 그것의 이름이 ‘소나무’이다, 라는 앎은 고정관념이다. 하늘, 땅, 별, 바람, 물 등의 모든 낱말들, 즉 언어는 ‘이것’, 또는 저것, 다른 것들과 이름과의 동일시이다. ‘=’ 라는 부호가 성립될 수 없는 별개의 것들이지만 그것들에 대해 의심할 수 없도록 세뇌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육체가 나’, 즉 ‘육체=나’ 라고 알고 있으며 이런 방식의 동일시의 습관에 의해서 ‘육체=나=지식(지성)’에 대해서 ‘2+2=4’ 와 같이 동일시를 당연시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나라는 생각”, 즉 경험된 사고방식의 오류이다.
사람들은 “{(육체 +나 +지식) = 지성 체}”에 대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것은 (나=지성 체) 임을 뜻하는 말이다. 어떤 ‘물건’=‘이름’의 동일시의 습관에 따른 결과이며 이런 착각에 의해 현상계를 보는 것이다. 천지만물은 마음이라는 관념에 의해서 창조된 환상물이다.
낮잠을 즐기던 사람이 무서운 꿈을 꾸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앉아있는데 친구가 들어와서 왜, 그렇게 땀을 흘리고 있어, 라고 묻는다. 땀을 닦으면서 ‘내가 등산을 갔다가 호랑이에게 물려서 죽을 뻔 했어’라고 대답한다.
언제? 지금. 허어 참, 꿈이야, 꿈에서 깨어나라, 라고 말하지만 땀을 닦으면서 너는 괜찮아? 라고 묻는다.
꿈속에서는 친구와 같이 등산을 갔었고 자신만이 호랑이에게 쫓겼던 것이다.
꿈속에서는 꿈이 현실이다.
꿈은 절대로 꿈이라는 사실을 암시하지 않는다. 꿈의 세계와 현실세계와의 차이는 없다. 현실세계에서는 허벅지를 꼬집어서 꿈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지만 절박한 상황에서는 허벅지를 꼬집어 볼 겨를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나고 난 후에는 꿈의 세계도 현실세계도 기억세포에 저장된 생각에 불과한 것 들이다.
내일도 미래도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상상이나 환상을 기억하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이며 어떠한 상황에 대한 기억들도 ‘생각’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생각일 뿐이다.
이것이 ‘생각’의 미묘함이며 신비로움이다.
죽은 자의 말
그는 육체, 즉 나를 죽이기 위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몸을 던지기 전에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 나라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청렴결백한 사람이었으며 국민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였다. 나로 인해 피해보는 사람들이 없기를 바란다. 나는 나의 마음을 이길 수 없다. -라는 고정관념에서 절대로 해방될 수 없는 지성 체였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의 고정관념을 깨버렸기에 나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다, 라는 생각에 따라서 마음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직후. 절벽 위에서 발에 힘을 모아 절벽 아래로 뜀과 동시에 몸이 허공에 뜬 상태에서 “나라는 생각”은 깊이 잠든 것과 같이 죽어버린다. 육체는 숨을 쉬고 있었으며 맥박도 뛰고 있었지만 그곳에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 즉 “나”라는 것이 없다.
나=지성체인 나를 죽이기 위한 행위를 시작해서 몸을 던지는 행위를 하는 동안에는 “그래, 이곳에서 옆 사람이 알아차릴 수 없도록 해야 된다. 옆 사람의 생각과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한 뒤에 몸을 던지면 된다.” 라는 생각만이 있다. 오직 옆 사람의 시선을 다른 곳에 돌리기 위한 생각만 있었기에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다. 나=지성체가 된 나를 죽이기 위한 행위까지는 살아오는 동안에 확고하게 다져진 고정관념인 기억세포의 힘과 현실을 판단하는 순간기억세포간의 힘겨루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마음이라는 것은 경험, 또는 간접경험에 의한 기억세포의 작용인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앎이라는 말에는 자신이 기억할 수 없던 시절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던 앎과 글씨를 배우는 일 등의 기억할 수 있는 지식이 포함된다.
나를 소개하는 나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다.
인식, 관념, 지식, 이상, 사상....... 이런 낱말들의 뜻에 대한 집착의 정도에 따라서 관념과 고정관념으로 구분될 수 있으며 고정관념은 상황에 따라서 항상 변할 수도 있는 것들이다. 인간은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이 가장 깊은 고정관념이지만 세뇌의 정도에 따라서 “육체가 나다,”라는 고정관념이 깨질 수도 있다.
육체가 나라는 앎도 생각이며, 육체가 내가 아님을 앎도 생각이다. 관념도 생각이며 고정관념도 생각이다. 모든 앎은 지식이며 지식은 의구심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상 또는 사상 따위에 세뇌를 당할 수 있다.
경험된 사고방식의 오류에 의해서 고정관념, 육체가 나다, 라는 동일시를 당연시 하지만 “나라는 것”이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종교나 사상 따위에 세뇌를 당하면 목숨을 버릴 수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까닭은 태어남 이후 최초의 경험인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이지만 육체가 나다, 라는 생각보다 더 깊은 세뇌에 의해서 이상이나 사상이 “나”와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경험과 분리된 참 자아는 언어에 구속됨이 없는 우주의식으로 비유될 수 있다.
순수의식을 망각한 사람들(인류)은 이상 또는 사상 종교 따위에 세뇌를 당하게 되면 세뇌되는 정도에 따라서 최초의 생각인 육체가 나라는 생각보다 더 깊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죽음을 불사하기도 하게 된다. 세뇌에 의해서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는 확고한 생각이 고정관념이다. 인간은 본성을 망각하면서 알게 된 ‘육체가 나다’, 라는 그릇된 앎에 따른 ‘나’라는 생각 위에 대상에 대한 인식의 시작, 즉 지식의 축적으로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앎을 “나”라고 당연시하는 것이며 “육체가 나”라는 고정된 생각에서 깨어나지 못함에 따라 늙음과 죽음의 고통을 겪는다.
태어남 이후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기 전 까지는 ‘아무것도 없음’의 상태, 즉 無我이다.
無我는 순수의식이며 천지만물과 분리되지 않은 상태, 즉 우주와 둘이 아닌 우주의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순수의식에서 최초로 일어난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에 의해서 ‘나’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면서 ‘엄마와 아빠’, 가족, 형제 그리고 하늘, 땅, 물, 나무 등의 대상들과 이름과의 동일시함에 대해 인식함이 창조이다.
세 살 즈음의 아이에게는 마음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어떤 것과 그것의 이름과를 동일시하던 버릇이 동일시의 당연함으로 여겨지면서 더 많은 말을 배우게 된다. 말을 배우는 일은 “대상과 이름과의 동일시”를 당연시하는 것이다. 학습을 통해서 더욱더 많은 낱말들이 기억세포에 저장되며 기억에 저장된 낱말들의 뜻에 대해서 조금 이해할 무렵이 “미운 일곱 살”이라는 어린 서절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함에 대해서 당연시 한다.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기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유를 확인해야만 한다.
자아의 허상이다.
내가 나를 모르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지기 위해서 살아가게 된다. 야성의 본성을 망각한 동물이 사람들에게 귀여운 애완용 강아지가 되듯이 순수의식은 학습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사회적 동물로 세뇌되어가는 것이다.
“육체=나”, “나=철수”등과 같이 이름과 대상과의 동일시와 동일시의 당연함에 따른 버릇으로 인하여 이상과 사상에 대해서도 당연시하게 된다.
마음은 경험된 기억, 즉 기억세포의 작용에 불과한 것이며 길들여진 습관이다. 경험된 기억은 생각이며 생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뜬구름과 같이 흐르는 미묘한 것이기에 생각으로는 생각을 해석할 수 없다. 다만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생각을 이용하여 마음을 조절할 수 있으며 생각의 미묘한 이치를 깨우침으로 하여 마음을 제거할 수도 있다. 길들여지기 이전의 본래마음은 육체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우주의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육체에 얽매인 마음에서 풀려난 “본연의 나”를 알아차림을 깨달음, 또는 ‘붓다’라고 한다.
나와 나의 생각은 하나지만 하나가 아니며 둘이지만 둘이 아니다. 사람들이 ‘나의 생각’이라고 당연시하는 “나의 생각”은 나의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착각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은 극히 제한적이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생각은 경험에 의해 기억세포에 저장된 생각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생각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한 생각이 끝남과 동시에 다른 생각이 일어남을 반복하고 있으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에 동시에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없다. 두 가지의 생각, 즉 선과 악, 크고 작음, 좋고 나쁨, 아름다움과 추함 등의 분별과 같이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서 존재할 수 있는 미묘한 것이다. 생각은 두 가지 이상의 대상에 의해서 존재할 수 있으며 대상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생각은 경험되지 않은 것, 즉 기억에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에는 허점이 있다. 경험에 바탕을 둔 모든 기억이 일념의 지속됨에 의해 잠재워진 상태에서는 경험과 분리된 순수의식의 본성에 다다르게 된다.
“나라는 생각”, “나의 생각” 이전의 의식(생각)이 있다. 이것에 대해서 “언어 이전의 소식” 또는 “나라는 생각의 뿌리”, “무아”, “진리”, “깨달음”, “不立文字”로 표현되기도 한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에서는 내가 있기에 다른 것이 있음의 분별을 당연시 하는 말이며 진리를 깨우친 인물들의 말은 우주의식으로써의 절대평등성에 바탕을 둔 연설로써 모든 것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말하는 것이기에 해석될 수 없는 말들이며 “불이일원론”으로 설명될 수 있을 뿐이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 절벽에서 허공에 몸을 던지기 직전에는 오직 옆에 있는 사람을 어떤 방법으로 따돌릴 것인지에 대한 한가지의 생각에만 몰두하게 된다. 같이 있던 사람에게 어떤 방법으로 -심부름을 보낼까, 저만큼에 있는 꽃이 무슨 꽃인지 자세히 보고오라고 할까, 또는 먼 산에 있는 어떤 것을 자세히 보라고 하여 시선을 돌리게 할까. - 등의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만 생각이 집중된 것이다. 자신이 해야만 할 당연한 일이기에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만 집중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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