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결정하고 절벽에서 뛰어내기기 전 까지는 죽음에 대해서 두렵다, 라는 생각도 없었으며 고통스러울 것이다, 라는 생각도 없었다. 이미 결정된 일이었기에 체념한 상태이다.
그리고 허공에서 땅에 도착하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에는 “나는 죽었다”라는 체념과 함께 무념(깊은 잠과 같은 상태)의 상태에 머물게 된다.
다른 방법의 죽음에서는 살아날 수 있는 확률이 제로일 수 없으나 망자가 선택한 장소는 회생할 확률이 제로였기 때문이다.
허공에서 머물던 몸이 지면에 도착하는 순간의 강한 충격에 의해서 깊은 잠과 같은 무념이 되었던 생각이 깨어난다. 이렇게 깨어난 생각은 ‘언어 이전의 생각’, 즉 ‘나 없는 나’의 생각, 즉 붓다의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우주의식”으로써의 나를 깨닫게 된다.
깨어난 생각, “나 아닌 나”를 알아차린 말은 진리이다.
“내가, 내가 아닌 것을, 공연한 짓을 했구나.”라고 알게 되지만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었다. 사람들에게 ‘공연한 짓’에 대해서 알리고 싶지만 알릴 방법이 없음을 한탄할 따름이다. “공연한 짓”의 뜻은 세 가지로 표현될 수 있다. 하나는 삶(나의 인생)이 내가 산다는 착각이었으며 둘째는 죽음(자살)이 부질없는 짓이었으며 셋째는 ‘생각의 미묘한 이치’, 즉 깨달음이다. 깨달음이라는 알아차림은 ‘나의 죽음’, 즉 육체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아니라 ‘나라는 생각’의 죽음이었음을 앎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모름에 대해서 당연시 한다. 자신의 본래 마음이 순수의식으로 표현되는 빈 마음임을 앎이 깨달음이며 진리이다. 죽은 자는 인류에게 그 길을 알리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자신의 마음을 ‘나의 마음’이라고 당연시 한다. 내 마음을 내가 모르는 이유는 내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인데 왜 내 뜻대로 할 수 없는가?
그대는 ‘성공’이라는 낱말과 ‘실패’라는 낱말, 그리고 ‘행복’과 불행, 평화라는 낱말들에 대해서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기억할 수 없다. 그 낱말들의 뜻에 대해서 사전을 찾아본 기억도 없을 수 있으며 누군가에게 설명을 들을 기회조차도 없었다. 첨단과학에 의해서 우주의 실체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라는 말은 들었으나 관심도 없다. 이해할 가치도 없으며 생각해볼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21세기 첨단과학은 천지만물의 실체를 분석하고 분석하여 본질을 찾아보니 ‘아무것도 없다’라고 한다. 정말 우습지 않은가? 우주의 근원이 無이면 나의 근원도 無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주가 없다, 라는 말에 대해서 ‘그냥 그런가 보다’, 라며 관심도 없다. 과학을 믿으면서도 우주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자신의 나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정신 좀 차려보자.
우주의 실체가 없다는 말은 ‘나의 실체’도 無라는 말이다. ‘나는 없다(無我)’라는 말이다. 소나무라는 말이 있을 뿐이듯이 어떤 것의 이름을 ‘나’, 사람, 인간 등의 언어로 이름 지은 것이다. “무변광대한 것=우주” 라는 등식은 성립될 수 없다. “무변광대 안에 밝은 것=태양” 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없음과 같이 모든 언어, 즉 낱말들은 실체가 없는 허구이다. 천지만물, 즉 모든 물질은 ‘어떤 것=이름’ 인 것과 같은 동일시(=)이며 ‘행복이나 불행, 이상 등의 사상이라는 낱말들은 그야말로 ’말‘로 만들어진 소리에 불과한 것들이다.
‘나는 무어인가?’
나의 몸은 “나=몸”이 아니다. 나와 몸은 하나가 아니며 몸이 나의 것일 수도 없다.
나의 마음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나=마음’이 아니다. 나와 마음이 하나라면 그대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야 되며 마음을 안다면 항상 완전함의 평화로움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몸과 마음이 나의 것이라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고통 불행이라는 것들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대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나 ‘나는 내가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할 수 없으며 내 몸은 내가 아니다, 라고 생각할 수도 없으며 현상계가 없다, 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나는 생각하지 않을 거야”, 라고 말을 할 수는 있지만 이는 “나는 생각하지 않을 거야”,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라고 생각해 보아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생각의 미묘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언어 이전의 생각, 즉 본래마음을 찾을 수 있다. 우선 이해해야 될 것은 나의 생각이 나의 생각이지만 결코 나의 생각이 아니었음을 깨우쳐야 한다. 생각하는 내가 주체라는 앎은 옳지만 옳지 않은 것이다. 생각은 미지의 힘에 의해 행위 되는 것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다. 생각을 행위 하게 하는 미지의 힘을 신이라고 한다면 “나”라고 아는 육체는 신에 의해 지배당하는 도구인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라는 한 구절의 문장에 정신을 집중해 보라.
그대는 불과 3분이나 5분 정도의 시간 동안도 한 구절의 생각에 정신이 집중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한 구절에 다른 생각 없이 일곱 시간동안 만 집중할 수 있다면 그대는 육체에 얽매인 정신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며 ‘자유’라는 말이 없는 자유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를 깨달음이라 하며 無我의 성취, 또는 진리라 한다.
마음은 나도 아니며 나의 것도 아니다.
존재의 이유가 무엇이며 인생이 무엇인가?
죽음의 쇠사슬 이끌고 어디로 달려 나가는가?
인생이라는 열차에 몸을 실었으면 삶, 죽음 고통의 짐을 열차에 내려놓으면 되는 것이다.
나의 마음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대가 살아있는 동안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대의 나를 찾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겠는가?
사람들 모두가 행복을 갈망하며 행복도 마음이며 불행도 마음이다.
자신의 마음을 마음 밖에서 찾으려는 어리석음에 의해서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닌가?
“나라는 생각” 이전의 “완전함”이 그대의 본래마음이다.
우주의식, 순수의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완전함의 기쁨.”
그것이 그대의 본성이며 “깨달음”이다.
“나 아닌 나”, 죽은 자의 말이다.
깨달음의 다른 이름이 불이일원론이다.
과학에 의해 밝혀진 바와 같이 우주의 본질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천지만물의 근원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말이며 이는 이 세상이 실재가 아니라는 말고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인간은 육체에 억매임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실재와 하나가 된다.
실재하는 것, 그것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으나 “모든 것의 기원”이다. 그것에 대해서 노자와 장자는 “道”라고 하였으며, 예수는 “오직 나”, “성령”, “하나님”, “존재의 거듭남”으로 표현하였다.
싯다르타는 “부처”, “불성”, “여래” 등으로 표현하였으며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검증된 삶”으로 표현하였다.
아인슈타인은 “무한한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우주”, “상대성 이론”등으로 표현하였으며 헤르만 헤세는 “존재의 거듭남”, “신비주의”라고 표현하였다.
나의 마음을 마음 밖에서 찾을 수 없다.
나도 모르는 나의 마음.
나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