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상, 인상, 수자상.... 이 있으면 여래를 볼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나라는 생각이 있다면 깨달을 수 없다는 말이다.
나라는 생각이란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이며 모든 앎에 대한 상을 내어서는 아니된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꼭 그런 의미는 아니다.
지식과 앎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내가 사람이다, 라는 앎도 지식이며,
내가 여자다, 내가 남자다, 라는 앎도 지식이다.
나이, 이름, 성별...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앎이며 학습에 의해서 아는 앎에 대해서는 지식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버지, 어머니... 해와 달, 지구 등의 모든 앎이 기억할 수 없는 시절부터 들어서 아는 지식이며 자아는 그것에 대해서 "나"라고 생각하기에 고통을 겪는 것이다.
소위 참 자아, 참 나, 부처, 도를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는 상을 낸다면 그는 공부인일 수 없다.
아상을 버려야 한다는 말은,,,
참된 앎을 말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인으로 불리우는 인물들... 그들은 진리를 말함에 있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예수, 에크하르트, 소크라테스... 그들 모두는 육체의 죽음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기에 죽임을 당할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진리를 말하는데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글을 조금 이해한다 하여 "나는 공부해야 하개 때문에" 진리를 알리는 일 같은데에는 관심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는 깨우칠 수 없다. 공부, 그것은 삶을 통해서 그릇된 나, 가공된 나, 타인으로부터 만들어진 나를 본래의 나로 되돌려 나가는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앎, 또 다른 지식으로 그것을 보겠다는 또 다른 욕망에 이끌려서 고행을 자처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깨우친 인물들은 극소소에 불과할 뿐이다.
에고, 나라는 생각...
그것은 목숨과 다르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해야만 가능한 것이며, 또한 그 길은 알 수도 없으며 지도와 같이 길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참 스승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한 것이다.
육체가 나다, 라는 집착에 의한 욕망은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며 공부 또한 시작은 가능하지만 끝을 짐작할 수가 없기에 평생을 두고 닦아 나가야만 하는 것이며 항상 진리의 본질, 즉 자성의 본질에 대한 글들 그리고 진리의 말들을 듣고 배워가면서 일념이 깊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의 말들...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표현이기에 본질을 헤아릴 수는 없다.
글을 보면서 이해가 깊어져야만 하는 것이며 본잴에 대한 이해가 일념에 의해서 더욱 더 깊어져서 확연해 짐에 대하여 진리, 즉 진실된 이해가 되는 것이며 해탈, 즉 이해에서 탈출하여 진리가 됨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수행자, 진리, 도를 구하는 자라 함은,
자신의 참된 앎인 "생각의 이치"와 그에 따른 진리 대한 말들을 함에 대해서는 주저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버려야 할 아상이란 자신의 지식으로 아는 앎, 고정관념 등에 앎이며 이러한 앎에 대해서 주장하거나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아야 함에 대해서 아상을 버리하고 말하는 것이다.
진리, 그것의 이치를 올바로 아는 앎... 그것은 참된 앎이기에 아상이라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선남자, 선여자여......
그대의 본성... 자성... 그것이 곧 부처이니.
그 길을 가라.
그것이 그대의 본래 성품이며 불생불멸의 신이다.
우주의 주인, 천지만물의 창조자, 절대자이다.
두려워 하지 말라.
담대하라.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
진리, 그것이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