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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 대한 욕망

일념법진원 2010. 3. 29. 13:52

인간에게 가장 큰 욕망이 있다면 도를 깨우침, 깨달음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부처, 하나님, 절대자, 유일신, 도, 안심입명이라는 말들이 창조되었지만 어떤 말로도 이에 대해서 설명될 수 없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는 것이다.

 

언어 이전의 소식이기에 불립문자로 표현되기도 하는 것이지만, 나라는 생각의 영역을 넘어서 있는 말들이기에 납득할 수 없는 말이지만 그 길만은 분명하게 설명될 수 있으며 태초부터 구두로 전해져 오는 도를 깨우친 인물들의 말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내가 숨을 쉰다는 앎에 대해서 당연시 하듯이, 내가 잠을 잤다고 알지만...

잠자는 동안의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해서는 상상도 짐작도 할 수 없듯이 나는 왜 태어난 것인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인지도 모르는채 스스로 흐르는 생각, 생각, 생각에 의해서 속수무책으로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지금 그대가 무엇을 갈망하든지 그것은 지나고 나면 사소한 것이다.

그대가 소유한 모든 것들... 본래 소우했던 것이 아니다.

육체, 그것 마져도 나라고 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행위되고 있었으며 행위할 것이다.

다만 그것이 나라는 착각에 의해서 고통을 겪는 것이지만 그 이치를 알지 못함의 무지에 의해서 고통을 겪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 그것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어리석음에 대해서 우주보다 더 무한한 어리석음이라 한 것이다.

 

한국인 만이 알고 있는지, 세계인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류의 4대성인으로 알려진 인물들이 있다.

그 중에서 공자는 "나는 오늘 도를 깨우친다면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고 하였다 한다.

 

소크라테스와 석가모니, 그리고 예수는 육체를 "나"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스승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나를 나라고, 육체, 몸이 나라고 말할 수 없는 까닭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면 우주를 아는 것이다" 라는 말로써 자신의 나를 찾으라고 하였으며 석가모니는 자성, 본래면목, 순수의식이 부처이며 불성이라고 하였다.

예수는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 라고 하였으며 사람이 거듭남이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요 성령이라고 하였다.

 

예수의 말 한마디 더 들어보자.

예수를 믿고 숭배하는 어리석은 자들에 의해서 변질되었으나 예수의 모든 말은 일념을 성취하게 하기 위한 가르침이었다.

종교인이라면, 구원을 원하는 자라면, 전도사라면...

그대, 공부인이 종교를 알리려는 어리석은 광신자들을 만난다면 그들에게 정중히 물어보기 바란다.

 

그들, 우상숭배 사상에 세뇌된 자들은 지성이 마비되었으나...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분명히 이해한다고 알기에 형제, 자매라는 말들을 하곤 한다.

그렇다면...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말과 "이기는 자, 승리하는 자가 되어라" 라는 말이 어떤 뜻인지에 대해서 질문하고 답을 구해야만 한다.

 

이 곳의 글을 몇 차례만 읽어보았다면 자신의 생각, 마음을 이겨서 승리하면 자신의 본성, 자성이 "하나님"이며 모든 것의 기원임을 알게 된다는 뜻임에 대해서 당연하시 하겠지만... 여느 종교이든지 세뇌를 당하면 신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만다. 

마음에는 실체, 뿌리가 없기에 말, 말, 말에 의해서 세뇌당한 결과이다.

 

깨달음의 길...

무상의 길을 만남에 대해서 백천만겁 난조우라는 말이 만들어 졌듯이 그 길을 만나기도 어렵거니와 그 길에 대해서 이해할 수도 없었기에 도를 구하려는 자는 많으나 그 길이 막연하였다. 

세상이 급변하면서 욕망은 더욱 더 커져만 가기에 그 욕망을 악용하려는 자들에 의해서 진리의 길, 진리의 말이 종교로 변질된 것이다.

 

그것, 

성인들에 의해서 전해진 신, 창조자, 절대자, 안심입명, 무위자연...

그런 말들에 대하여 "생각의 미묘한 이치"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납득할 수 있다면 인류는 평화의 길에 접어든 것이다.

 

생각의 미묘한 이치에 대해서 무상심심미묘법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이다.

생각의 이치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고통의 근원, 모든 의심의 근원을 찾은 것과 다르지 않다.

길을 알면 그 길을 가면 되지 않겠는가?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만족하여 평화로울 수 없다.

모든 앎, 말, 말, 말들에 세뇌된 것이며 모든 앎이 의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미묘한 이치를 더 깊이 이해하면 자신의 육체, 몸을 적절하게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육체 그것은 언제, 어떻게 변하거나 사라질지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면... 지금 그대의 나는 없다.

내가 있기 때문에, 생각에 의해서 내가 존재함을 알기 때문에 생각이 없음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을 뿐이다.

 

깨달음 그것은 욕망으로 찾아질 수는 없다.

석가모니가 깨달음 마져 포기할 즈음에 해탈을 얻음과 같이... 일념에 의해서 모든 앎, 모든 욕망이라는 생각까지 무력화 됨에서 비로소, 나 없는 나, 나 아닌 나와 하나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실재와의 합일, 또는 종교에 의해서 전해진 "절대자와의 합일됨" 등의 말이 창조되었으나... 궁극에 이르러서의 앎은 "육체가 내가 아님"에 대한 알아차림이라고 하였다.

 

깨달음. 그것은 나의 죽음이다.

육체와 나를 동일시 하기에 육체가 나인 사람의 죽음과 같은 것이다.

자유의지에 의해서 숨을 쉬지 않을 수 없듯이 욕망으로써는 겲코 다다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살아오는 동안 세뇌에 의해서 길들여진 생각, 생각, 생각... 나라는 생각의 근원을 찾아 나서는 삶을 통해서, 스스로가 그것임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그것, 그곳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새 그릇에 새 술을 담아야 한다는 말이 있던가?

모두 비워져 깨끝해 졌을 때에 비로소 맑은 물을 채워아만 되는 이치와 같이 하루종일 기도, 일념에 의해서 사회적 동물로 세뇌되었던 기억(앎)이 비워지면서 참된 앎이 비워진 곳에 채워지는 것이다.

 

생각의 속성과 이치를 활용하여 건강하고 밝은 삶을 살아낼 수 있으나 궁극에 이를 수는 없으며 생각의 이치를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기름통을 지고 불에 뚜이듦과 같은 어리석은 것이다. 

모든 고통과 괴로움의 원인이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모든 앎이 사라지면, 삶과 죽음 조차도 본래 있는 것이 아닌 참된 앎만이 남는다.

육체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아님을 아는 앎이기에 참된 앎이며 안심입명이라는 말로 전해지기도 하지만 역시 생각의 영역을 넘어서 있는 말일 뿐이다.

그것이 "도"이며 모든 것의 기원이다.

 

일념에 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방법들이 있으나...

항상 미소지음으로 시작하여 성내지 않음을 실천해야만 한다.

진리의 글, 이 글들은 그대 자성의 말이며 이 사람이 그대의 자성에 대한 말, 도의 관점에서 보는 말이니... 

항상 이 글과 함께하는 생활, 그리고 육체의 행위에 대해서 내가 행위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암시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일념이 더욱 더 깊어지면 스스로 알게 되는 앎이지만...

 

광신자들이 어리석어서 자신의 마음 둘곳을 찾지 못함에 따라 종교에 세뇌당하여 목숨을 불사하듯이...

마음은 항상 어디엔가 의존해야만 하는 습성이 있다.

이에 대해서 갈애라고 하는가?

진리의 글과 항상 함께하는 삶, 그리고 화두하나 지니는 자리이타의 행위에 의해서 자신도 모르게 사회적 동물로 세뇌되었듯이 자신의 자성, 본성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다.

 

자연이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님과 같이...

공부하는 자는 공부인이라고 말하지 않으나, 욕망이 없음에 의해서 두려움이 없으며 담대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두려워 다른 하나님을 찾는가?

무엇을 구걸하려 돌덩이 앞에서 무릎 꿇는가? 

 

그대의 나, 그것이 모든 것의 기원이다.

진리, 그것이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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