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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걸고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p1 ~ p5

일념법진원 2010. 3. 29. 21:58

--- 목숨걸고 해야 할 공부라는 말...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에 전해져 오는 말일 것이다. ---

공부?, 수행? 의 배경에 대한 어떤 물건의 이야기이다.

15쪽 분량의 글이기에 3회로 나누어서 올리려 한다.

진리를 구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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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최 상무. 사람 사는 것 말이야. 좀 우습지 않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가 산다는 것이 ‘지구만큼 큰 파이를 하나를 놓고 사람들끼리 서로가 더 많이 차지하겠다고 싸움질들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거든.

에이 형님도 참, 그렇게 생각하면 재미 없자나요.

재미? 그럼 자네는 재미로 사는가?

아뇨. 재미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내요. 과학적으로.......

그렁저렁 살다보면 좋은 날도 있겠지요, 머.

허허. 그려, 사람들 모두가 좋은 날을 기다리다가 죽어갔지. 계속 그럴 것이고.

허 허 참, 쥐구멍에 볕들 날을 기다리기 위해서 산다고?

아마 인류, 사람들 대부분이 쥐구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쥐구멍에 볕들 날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도 만족한 인생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거든. 나는 재미로 산다는 생각을 해 본적은 없다네. 오직 근면하고 성실하게 현실에 충실하면 되겠지, 라는 마음으로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고 싶었기에 그렇게 살아왔다네. 가장 평범하게 살고 싶었지.

혹시,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혹시 있을 지도 모르니까 그 날을 기다리며 그냥 마음 편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까? 근심걱정 없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말이야.

어휴, 글쎄요.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지, 돈을 벌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운명의 신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신의 뜻에 따라 태어났으니 신의 뜻대로 살다가 죽는 것인지, 도무지 인생이 무엇이란 말인가? 

한 오십년 살았으니 인생관 정도는 분명하게 정립된 상태에서 나머지의 삶을 살아야 될 것 아닌가?

그런데 아직도 대체 왜 살아야 되며,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앞날이 어떻게 펼쳐질지 짐작할 수도 없다.

아마 계획했던 사업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예전과 같이 분주했었다면 나이 오십이나 처먹은 놈이 개똥철학을 논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솔직히 아니다.

도대체 인생이 무엇일까, 뭔가 완전한 것이 없을까, 어느 누구에게도 당당하여 모두가 알아주지 못할망정 완전하여 평화로운 삶은 없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해 왔었다. 살아오는 동안 내내 완전한 사람, 완전한 삶을 꿈꾸고 있었다.


사람이 제아무리 똑똑하고 잘난체 해봐야 거기서 거기였다.

천차만별인 어느 한 분야에 대해서 죽을 때까지 연구하고 공부를 하더라도 완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넓디넓은 세상, 할 일은 많지만 어느 한 분야밖에 할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젊고 패기만만했던 한 시절, 건설 회사를 운영 하면서 海上의 난공사들에 대한 연구로 특허를 취득하고 공사를 수주하는 등, 그 분야에서만큼은 인정을 받기도 했었다. 세상 어떤 일에 대해서도 자신 없는 것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땅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에 달려드는 개미들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세 살 아래인 동생의 회사에 근무하는 다섯 살 아래 동생인 최 상무와 개똥철학을 논할 무렵.......

그리고 그 이후 서너 달쯤 뒤엔가 도망치듯이 도시를 떠났다.



나 역시도 과자부스러기에 달려드는 그 개미중의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다른 개미이고 싶었다. 나를 위해서 다른 개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이내에서 당당한 실력으로 이겨 보고 싶었다. 건설업체에 근무, 그리고 도산, 작은 건설법인의 설립, 특허출원으로 공사수주. 몇 차례의 성공과 실패.......

보증을 섰던 회사의 도산으로 빈털터리에서 다시 시작하여 설립한 회사가 안정권에 들기 까지는 3년에서 5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을 믿었기에 배신을 당한다. 싸움이 싫기에 포기해 버린다. 법정싸움을 해 봐야 뻔하다. 싸우는 동안 회사는 망가질 게 뻔하고 비용과 시간만 낭비될 뿐이다.


부유하지 않은 농부의 일곱 형제 중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부친의 부단한 노력 끝에 큰형과 둘째형이 철도청에 취직이 되었다. 그 분의 자식들에 대한 사랑은 극진하였다. 사람은 서울로 가야하며 말 새끼는 제주도에 가야된다, 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분이었다. 자식들만큼은 절대로 뼈 빠지도록 고생해야 하는 농사일을 하면서 살게 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서울에 사는 사돈에 팔촌 쯤 됨 직한 친척을 찾아다니셨다. 햅쌀이 나오자마자 쌀 한 가마와 고추, 마늘 등의 농산물을 지게에 지고 새벽녘에 집을 나선다. 마을에서 김제역까지는 약 이십 리길이다.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몇 학년쯤인지에 대한 기억이 분명치 않다. 쌀 한가마를 지게에 지고 이십 리 길을 걷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도 모를 때의 일이다. 지금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짐을 화물로 보내고 기차를 타고 갔는지 또는 짐을 기차에 실고 갔는지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기에 알지 못한다.

큰형과 둘째형이 철도청에 취직이 되었다며 마을에서 양복을 빌렸다는 말을 들었다. 집에는 양복이 없었던 것이다. 양복을 빌려서라도 걸치고 가야만 했을 것이다. 1960년대에 농촌마을에서 어느 집 자식이 서울에, 그것도 철도청에 취직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화재거리다. 일단 농촌에서 도시로 떠나는 것,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며 출세로 알던 시대였다. 나 또한 기차구경을 못했을 때의 일이다.


형님들은 취직시켜준 먼 친척이라는 아저씨의 집에서 서울이라는 낯선 곳을 익혔을 것이다. 서울과 낯이 익어갈 무렵 서울보다 값이 비싸지 않은 곳인 부평역에서 십 여분 거리쯤 되는 곳에 사글세방을 얻었다는 말을 들었고 어머니는 가끔 김치와 마른반찬을 준비해서 서울엘 다녀오시곤 했었다. 초등학고 6학년 되던 해에 어른은 ‘너는 중학교를 서울로 가라’라고 하셨다. 형들이 자리를 잡았으니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서울에서 살라는 말이었다. 손에 기름때도 묻히지 말고 하양 와이셔츠에 넥타이 매고 펜대를 굴리며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어른은 자식들 모두를 그렇게 살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 구정 명절 때에 운동화 한 켤레와 새 옷을 사서 입혔을 것이지만 기억에는 없다. 생전 처음으로 기차라는 것을 보았고, 기차를 타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서울로 향했다. 서울역에서 다시 인천행 기차를 타고 부평역에 내렸을 때에는 멀미에 시달려 초죽음이 되어 있었다. 중학교 시험을 보면서도 속이 울렁거렸을 만큼 멀미에 시달려야만 했다.



수질개선장치에 대한 특허등록증이 나오면서 동생의 사무실 지하창고를 빌려 사용하다가 구로동에 새로 지은 오피스텔로 사무실을 옮긴지 6개월이 지날 무렵부터 자금부족에 시달렸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면서 사람들이 싫어졌다. 이십 여 년 동안 건설업계에서 일을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건설에 관련된 일을 포기했다. 젊은 시절 익혀왔던 직업을 버리고 다른 분야의 직업을 선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님을 모르지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회사가 망하면 그 분야에서 월급쟁이를 해서 다시 일어설 수도 있다. 하지만 “사장”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아온 날들에 대한 자존심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차라리 다른 분야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새로운 분야의 도전에서도 대기업의 벽을 넘을 수 없음을 절감하면서 실패를 인정해야만 했다.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알량한 자존심만은 버릴 수 없었다. 



산골에서 입을만한 옷가지 몇 벌과 책 몇 권을 챙겨 오지마을로 귀농을 한다는 사람의 트럭에 몸을 싫었다. 회사는 대리점을 하던 친구에게 모두 넘겨주었다. 불과 사흘 만에 혼자만 알고 있던 특허의 비밀과 회사의 현황들을 인계하면서 한 가지만을 당부했다.

운명철학관을 운영하는 사람의 소개로 알게 되어 회사에 자금을 투자했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내 사주팔자가 너무 좋아서 상상을 초월한 부를 이룰 것이라며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 자금을 지원했었다.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것만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털털거리던 1톤 트럭이 도착한 곳은 무주의 덕유산 남쪽에 소재한 오지중의 오지로 알려진 ‘방재마을’이었다. 방재라는 말은 아름다운 고개라는 뜻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사십여 가구의 작지 않은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일곱 체의 집이 남아 있었다. 산 능선을 따라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길은 포장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버려진 마을이나 다름없었다. 마을 입구에는 흙과 나무로 지은 집들이 오랜 비바람에 지쳐 비스듬히 누워 지팡이에 의지하고 서 있다.

모두 떠나간 자리, 떠날 수 없는 노인들 몇 몇만이 남아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십여 년 동안 비어있는 집들, 추석 명절에 한번 쯤 들르는 집 주인들은 본체를 버려두고 작은 방 하나만을 별도로 정리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같이 온 귀농 인이 미리 연락을 하였기에 빈 집 한 체를 빌릴 수 있었다.

부엌의 흙벽이 무너진 곳은 함석조각으로 대충 막혀있고 아궁이에 걸려있는 가마솥은 바닥이 뚫려 있다. 무너진 아궁이를 걷어내고 우선 군불을 지필 수 있도록 손질을 한다. 방바닥은 신문지를 여러 겹으로 붙여서 우선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산골짜기의 3월은 따듯한 봄과는 거리가 멀었다. 땔 나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무슨 일을 해서 어떻게 먹고 살아야 될지 아득하기만 했다. 어린 시절 농촌에서 살았던 기억이 있으니 농사일을 해 볼 요량이었다.


현실 도피자였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 어느 누구에게도 당당하지 못한 일이면 아쉬운 소리를 못하는 사람. 성장과정에서 얻어진 습관이다. 중학교 3학년 무렵에 부친으로부터 들었던 말이 있었다. 방학이 되어 시골에 내려갔을 때에 ‘너는 이제 다 컸으니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야 한다, 라는 말씀이었다. 그 말을 들은 뒤부터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회인이 되어 자립을 하기 전까지는 부모님께 절대로 걱정을 끼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사회인이 된 후에는 부모님을 도와드려야 된다는 생각정도였다.  

자식을 위해서 평생을 고생하시는 부모님께 당연히 해야 될 일일 것이다. 너무도 평범한 소년기를 보냈다. 학창시절에도 단 한차례의 실수를 하지 않았다. 공부는 중간이었으며 상을 받아본 적도 없고 벌을 받아본 적도 없는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으며 착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안은 무미건조한 학창시절이었다. 사회에 나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는 어떤 계통의 공부를 해서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해 본 적도 없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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