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을 통해서 인생에 대해 얻은 지혜가 있다면, “모든 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다만 살아가는 과정일 뿐이다”라는 말과 “오직 현실에 충실 하라”라는 말 정도일 것이다. 당시 알았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에 대해서는 “네 꼬락서니를 알아라,” 라는 말로 이해했으며 무엇을 해야 되겠다는 분명한 주관이 없었다.
내게는 특별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누구를 귀찮게 하지도 않았으며 귀찮게 하는 사람도 없었다. 매사에 조심스럽고 완전한 사람이기만을 원했던 것일까.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무슨 일이든지 못하는 것도 없었다. 손재주가 좋다는 말은 어린 시절부터 들었던 말이다.
가난한 농촌 겨울의 일은 가마니를 짜는 일이었다. 여름철의 땡볕아래서 하는 일보다는 쉬운 일이겠지만 밤에는 호롱불 아래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새끼를 꼬고 낮에는 헛간에 앉아서 가마니를 짠다. 어머니는 갓난아기를 등에 업은 채 가마니틀의 우측 편에 앉아서 잣대를 엇갈린 새끼줄 사이로 밀어 넣는다. 밀어 넣을 때에 잣대의 끝에는 두어 가닥의 짚이 매달려 들어갔다가 나오면 아버지는 밀어 넣은 짚을 쿵 하고 내려 누른다. 두 차례나 또는 세 차례를 엇갈려 내려쳐진 새끼줄 사이로 밀어 넣은 다음에는 빈 잣대를 밀어 넣고 아버지는 빈 잣대에 짚은 걸어주고 잣대가 나간 다음 다시 쿵 하고 누름 판으로 내려 누른다.
어머니의 등에 업힌 아기의 머리는 먼지구덩이 속에서 어머니의 몸놀림에 따라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거린다.
가마니를 짜는 잣대의 끝은 모양이 예쁘다. 대나무를 깎아서 만든 것이다. 손잡이는 헝겊 쪼가리를 감아서 손이 아파지 않도록 했지만 잣대의 끝은 둥근 모양과 짚을 밀어 넣기도 하고 짚을 끌어당기기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부엌칼과 낫으로 활을 만들기도 하고 하늘에 날리는 연을 만들기 전부터 대나무로 작은 잣대를 만든 적이 있었다. 무엇인가 만드는 일을 좋아했고 손재주가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
너무도 평범하여 눈에 띠지 않던 젊은이가 군에 입대하여 비로소 자신감을 찾았다. 군대생활 동안에는 인기가 좋았다. 통신병과였음에도 불구하고 보병들을 상대로 하는 일급 전투원 측정에 출전하기도 할 만큼 건강 체질이었으며 부대 내에서는 포스터를 쓰는 일부터 서무행정을 보는 일, 축구선수, 스케이트 선수 등으로 발탁되면서 포상휴가를 많이도 받았었다.
취직하기가 쉽지 않았던 79년도 초에 제대하여 그해 봄에 형님의 소개로 도로공사 건설현장에 취직을 했다. 당시 임시직원의 월급이 구만 구천 원이었다. 직책은 토목 실험실 보조였다. 흙의 성분을 분석하여 흙의 상태에 따라 함수량을 결정하는 일, 콘크리트의 재료를 분석하여 배합 비를 결정하는 일 등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분야였다. 능력을 인정받아 불과 1년여 만에 스카웃 제의를 받았으며 중소기업 건설현장의 실험실장으로 발탁되어 과장 대우를 받을 만큼 성실성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마을에는 할머니 두 분과 할아버지 두 분, 그리고 정신지체 장애자 둘이 거주하고 있다. 노인들은 이런 골짜기에 뭐 해먹을 것이 있다고 들어왔느냐며 의아스러워 하신다. 버려진 밭을 일구면서 마음을 비우려 애를 써 본다. 설천면 소재지에 오일장이 서는 날, 괭이와 삽, 낫과 톱을 사고 콩, 옥수수, 호박, 고추모를 사다가 농사 준비를 한다. 돈을 버는 일은 이미 포기했다. 버려진 밭 이천 평을 괭이하나 들고 천천히 일궈나간다. 책에서 보았던 인디안 농법으로 농사를 짓기 위해서 두 달 가량을 괭이하나 들고 묵은 밭에서 나무뿌리, 그리고 잡초들과 씨름을 했다.
도시를 탈출하기 전에 주민등록의 말소를 부탁했고 핸드폰의 번호도 바꾸었다. 회사에 조언해야 될 일에 대해서만 통화하기로 했다. 서너 달이 지나면서 마음이 가라않기 시작했다.
체념이었다. 그래, 인생 뭐 별것 있는가,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모두가 죽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옛날 농사일을 하시던 아버님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그분은 왜 그리도 힘겹게 사셨을까, 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 그분은 어린나이에 부모님을 잃고 머슴살이를 하셨기에 자식들에게 모든 정성을 쏟았을 것이다.
그래, 운명이다.
운명의 신에 의해서 살아지는 것일 뿐이다, 라는 생각이 들지만 마음이 평화로운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새벽녘에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오면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서글픔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차라리 괭이를 메고 밭으로 간다. 산길을 거슬러 올라 밭 어귀에 이르자 산돼지 몇 마리가 화들짝 놀라며 달아난다. 생각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다만 어떤 일에 몰두함으로써 마음이 편안해짐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지마을에 온지 세 달이 지날 무렵 핸드폰을 끊었다. 회사의 업무에 대해서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었으며 경영에 대한 끊임없는 불평들이 싫었기 때문이다.
밭에는 동그란 둔덕을 일 미터 간격으로 만들어 콩과 옥수수를 심고 둔덕과 둔덕 사이에는 호박과 박 씨를 심었다. 옥수수가 허리만큼 자라면 옥수수 옆에 울타리 콩을 심어도 된다는 말을 듣고 울타리 콩도 한 되 사다 놓았다.
도시를 떠나기 전부터 궁금했던 운명철학에 관련된 책과 약초관련 책을 몇 권 구해서 공부를 시작했다. 이웃 마을에 사는 약초꾼과 만나면서 약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운명철학의 깊이를 알면서부터는 운명철학이니 운세니 하는 것들이 말장난에 불과한 것임을 알게 되었기에 약초분야에서 최고가 되고자 하였다.
약초꾼을 쫓아다니며 약초를 배우고 책을 통해서 약재의 이름을 익히면서 생활비가 벌어졌다. 생활비래야 한 달에 이십여 만원이면 충분하다. 할아버지 때부터 한약방을 했었다는 사람으로부터 비방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산에서 나오는 약재 20여 종류를 48시간동안 은근한 불로 달이면 만병통치약이 된다는 것이었다. 농사는 팽개쳐두고 산야초와 약초에 전념했다.
딱히 해야 될 일은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타고난 습성일까. 무슨 일인가를 하지 않고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허긴 인생을 포기하고 도피한 주재에 마음이 편하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래, 무슨 상관인가. 내 팔자가 그렇다면 약초꾼으로 살자. 그리 살다보면, 운명에 순종하다보면 좋은 일도 일어날 수 있겠지.
작은 배낭하나 매고 약초 곡괭이 하나 들고 산과 친구가 되기로 했다. 가볍고 단단한 나무를 골라 곡괭이 자루를 좀 더 길게 만들었다. 마을 주변에 있는 산들은 대부분이 해발 천 미터가 넘는 높은 산들이다. 마을 주변에 산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산중에 수많은 생명체들이 존재하고 있다. 나 역시 수많은 생명체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마을에는 이야기를 나눌만 한 사람이 없다. 같이 왔던 친구는 돈을 벌어야 된다며 염소를 기르고 닭을 기르면서 또 읍내에 돌아다니며 일거리를 찾아다닌다.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노가다를 하면서 십억, 백억 단위의 공사를 수주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도 돈은 돈이 아니었다. 운송업자가 쌀을 옮기든 금덩이를 옮기든 그것은 물건일 뿐이다. 어차피 돈을 벌기위해서 사는 것은 아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을 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먹고 사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필요한 돈, 먹고 살기만을 위한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한 달에 사나흘 동안만 남의 일을 하면 된다. 농사일을 거드는 일, 집수리를 도와주는 일 등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꼭 돈을 벌기위한 목적으로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주어지는 일에 충실하다보니 남들이 보기에는 원 없이 사는 사람으로 보였던 적도 있었지만 항상 무언가 완전한 것을 찾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 죽을 날을 기다려야만 할 때에 살아온 날들을 회상하며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내고 싶었다.
사십대엔 그런 꿈이 있었다. 한적한 산 중턱, 아담한 곳에 작은 휴양소를 하나 짓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모습이었다. 건설업에 열정을 쏟을 무렵이었다.
버스가 다니는 길에서 마을까지는 약 20분 거리이다. 서두르지 않고 20분을 걷고 다시 40분 정도를 걸어가면 마지막 마을이 나타난다. ‘벌한’ 마을이다. 그곳에서는 ‘버라니’라고 불리는 마을이며 집성촌이다. 내 팔자려니 하며 사는 늙은이들과 스스로 실패자라고 생각하는 중년 사내들, 도시에서 빠져나와 또 다른 성공을 위해 힘겨운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 어느 누구도 만족하여 평화로움을 즐기는 사람은 없다.
한 시절 정부지원 자금을 융자받아 구천동에 농산물 판매장을 했다는 친구는 이제 폐인 아닌 폐인이 되어 있었다. 일주일에 사 나흘 동안은 술에 취해 있다.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에는 소외된 노인들을 돕는 착한 사람이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임야와 토지가 많았지만 사업에 실패하면서 모두 빚을 갚기 위해 헐값에 팔아야 했단다. 마누라는 도망갔고 세상은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술에 취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모양이다. 술에 취하지 않고 딱히 바쁜 일이 없을 때에 나를 찾는다. 같이 약초를 캐러가자는 것이다. 약초와 약나무들을 팔아서 두 아들의 학비를 보태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초가을 무렵 그들로부터 작은 암자에 사는 승려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비구니들이 산다는 절이 동쪽 산 중턱 그늘진 곳에 있었다. 밖에서 보이지 않는 곳. 그곳에 늙은 비구니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중년의 비구니 몇 몇이 머물기도 하고 떠나기도 한다는데 그 중 한 비구니가 癌과 투병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종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여느 단체와 같이 종교단체 또한 먹고살기 위한 직업일 뿐이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이 지구만큼 큰 파이 하나를 놓고 여러 종류의 가면(나는, 우리는 파이에는 관심이 없다)을 쓰고 있는 것일 뿐 모두가 다르지 않았다. 어떤 가면을 만들어 써서라도 다른 사람들 보다 조금 더 많은 파이를 차지해야만 행복일 것이라는 세뇌에 의해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 투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졌다.
지리산 주변의 도로공사 현장에 근무하던 젊은 시절. 현장 사무실 앞에 드리워진 높은 산 중턱에 보이는 암자에 비구니들이 산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에 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이라는 노래 가사가 떠오르는 것은 사내들의 호기심일 것이다.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다며 ‘비방’을 알려주던 여인의 말이 떠올랐다. 대전에 살면서 胃癌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다는 여인은 어린 시절을 이곳 산중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봄철과 가을철에 방재에 와서 한 달 쯤 머무는 동안에 친척들의 일손을 돕기도 하고 약초를 캐기도 하였다. 내게 오라버니라고 부르며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끌려갈 마음은 없었다. 오라버니 이 ‘비방’(약재 다리기)은 절대로 남들에게 이야기 하면 안 된다고 다짐 했었다.
암자를 몇 차례 다니다 보니 여자들이 사는 곳이기에 도와줘야할 일거리들이 있었고 암과 투병중이라던 비구니와 차를 마시기도 하고 암자 뒷산을 다니며 약재를 채취하기도 했다. 절간의 법당이라는 곳에 들어가 부처님 전에 절을 해 보기도 하였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암자에는 먹을 것이 많았다. 천도제 등의 제사를 지내는 탓인지 떡과 과일은 충분한 모양이다. 나이가 많은 주지스님은 안면이 익어지자 한 봉지씩의 떡을 싸주곤 하신다. 덕분에 산에 다니면서 점심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 운명의 신에 의해 살아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보다, 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추슬러보지만 서글픔은 시도 때도 없이 밀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비구니로부터 청천 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 약재를 채취하고 돌아오는 길에 던진 한마디 말이었다. 살아왔던 날들의 이야기를 묻기에 솔직하게 대답하였다. 도시에서 사업을 하면서도 그렇게 살아왔다. 솔직하고 싶어서 솔직했던 것은 아니다. 건설업을 하면서 터득한 것이다. 공사를 수주하기 위한 목적으로 거래처를 다니면서 거짓 광고를 하게 되면 그 거짓말을 기억해야만 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다른 거짓의 가면을 쓰는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공사 수주를 위한 부풀리기 식의 거짓 광고는 계속 거짓광고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차라리 솔직한 편이 마음이 편했다. 있는 그대로 알리고 아니면 포기하고.......
그것이 현명한 방법임을 알았기에 그렇게 살았다. 솔직함이 악용 당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마음 편하게 살고 싶었다. 어차피 주어진 운명이라는 생각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일에도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구니로부터 “목숨 걸고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라는 말을 들으면서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하며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하하 참나, 세상에 목숨 걸고 해야 될 일이 대체 무엇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정말 그럴 일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농담이라도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세상에 정말 목숨 걸고 해야 될 만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농담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비구니는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지만 반백년을 살아오는 동안에 어디에서도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목숨을 걸만큼 가치가 있다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어디에, 무슨 일에 목숨을 걸 수 있단 말인가? 만약 평소에 알던 친구가 그런 말을 했다면 ‘미친놈 너나 목숨 걸고 해 봐라’ 라며 농담으로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조그맣고 야무진 얼굴, 잿빛 승복을 입은 비구니가 그런 말을 하고 있다.
“목숨 걸고 해야 되는 일이 있습니다.”
속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말하는 태도로 보아 농담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농담을 할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다.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