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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인가? 무아(無我). 갈애(渴愛). 욕망의 근원

일념법진원 2010. 3. 31. 06:24

갈애라는 말은 목마를 갈자와 사랑 애자로써 욕망의 근원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석가모니는 갈애에서 벗어남에 대해서 해탈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갈애에 대한 설명 이전에 한 가지 알고 가야할 상식? 이 있다. 

석가모니와 예수의 말... 그들의 말 중에서 석가모니의 불립문자, 예수의 "나의 말을 옮기는 자가 그리스도의 적"이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이다. 이 말은 또한 노자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참다운 도가 아니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며, 예수를 믿고 숭배하는 자들에게서 나온 "방언" 또한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 사는 사람들, 즉 철학에 바탕을 둘 수밖에 없는 인간의 지식에 의한 앎으로써는 해석될 수 없음을 뜻하는 말이다.

 

예를 들자면...

인간은, 그대의 나는 육체는 내가 아니다. 라는 말에 대해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으나... 그들, 즉 도를 깨우친 인물들의 말은 "육체가 내가 아님(무아)에 대한 깨우침, 즉 천지만물과 분리되지 않은 자아로써 우주의식의 관점에서 보는 말이기에 자기 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나는 사람이다"라는 그릇된 앎?으로써는 해석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는 예수의 말이나 석가모니의 전해져 오는 말들, 즉 불경이나 성경의 근원에 대해서 수천년을 연구하더라도 그 본질에 대해서는 해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지식이 많은자, 어리석어 아상이 강한 자들에 의해 우상숭배사상으로 변질되면서 서로 편을 가르는 종교가 된 것이며 종교들에 의해서 더욱 더 왜곡된 것이다.

 

이 글, 갈애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인간의 근원, 자신의 본질, 자신의 나에 대해 좀더 가까이 잡근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고. 허허헛  

 

인류는 자신의 근원에 대해서, 즉 자신의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으나, 자신의 나에 대해서 무엇을 모르는 지에 대해서 조차 알지 못한다. 아니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을 수도 있다. 

인간, 나의 근원이 무엇인지, 인간의 기원은 어디서 부터인지... 어디에서 나온 것이며 어디로 가는 것인지. 왜 살아야 되며 왜 죽어야만 되는지.......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할지라도 그 근원에 대해서 올바르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으며 이에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태초의 인간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만, 육체가 나다, 라는 앎에서 시작된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인류의 기원에 대해서 신화나 전설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기에 인간의 모든 앎은 자신의 근원도 모르는 분명하지 않은 앎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모든 앎이 의구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며 자신의 삶, 인생에 대한 해답이 있을 수 없다.

 

불이일원론을 연설했던 인물들과 초월자 각성론에 등장하는 인물들... 그리고 불교라는 종교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로 알려진 중국의 옛 선사들의 가르침이 예수와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등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지만 그들의 말 또한 "마음"의 작용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에 납득할 수 없었다.

철학자?로 알려진 데카르트의 말에서 "생각에 의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라는 말과 인도의 철학자로 알려진 "상카라"의 불이일원론으로 전해지는 말에서 "세상은 실재가 아니며 오직 실재하는 것은 "아트만(참 나)"라는 말로써 설명되기도 하지만 에고(육체가 나라는 생각)의 생각의 영역을 넘어서 있는 말일 뿐이기에 철학은 그들의 말에 대해서 그들의 주장?으로 일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그대는 자신의 나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생각에 고심했던 인물들은 이곳의 글을 통해서 해법을 찾았으며 그 길을 걷고 있다.

그것에 대해서 생각, 생각, 생각의 미묘한 이치와 속성으로 설명하였으며 성인, 성자, 신으로 알려진 예수와 석가모니 등의 모든 선지자들의 말이 곧 생각의 미묘한 이치에 대해 설명한 것이지만 에고의 자기중심적인 생각, 해석에 의해서 변질되고 왜곡된 것임에 대해서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대가 나, 나, 나는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대는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깨달은 것입니까? 라는 질문에 소크라테스와 석가모니의 답변이... 나는 내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그것만을 안다. 라는 답변을 했던 것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한글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변질되었는지, 또는 어떻게 해석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은 그들만의 앎이 아니다.

 

그대는 그대의 나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가?

내가 나지 누구야? 라고 답변할 것인가?

아니면 내 이름이 철수, 내 나이가 40세, 내 고향이, 내 부모가, 내 학벌이, 내 재산이.......

내가, 내가, 내가.....

내가 나에 대해서 아는 것들. 그것들 모두는 누군가로 부터 들어서 아는 것이지만 그것에 대해서조차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진 적이 없었다. 아무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며 묻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석가모니의 전해져오는 말 중에서 "나는 갈애에서 해방되어 해탈을 얻었다"라는 말이 있다.

해탈, 진리라는 말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한 바 있으니 참고하기 바라며......

갈애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나의 근원, 즉 생로병사의 원인과 고통의 근원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에.

 

참고로 이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쓰여진 글들... 순수의식, 참 나, 특히 언어의 기원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할 것이며 언어의 기원에 대한 설명에 대해서 이해함이 우선될 때에 의심의 근원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납득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예수의 말 중에서 어린아이처럼 순수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과 사람이 거듭남이 하늘나라를 보는 것이며 성령이다, 라는 말이 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함이 성령이라는 말이며 그것이 곧 참 자아이며 하나님, 절대자라는 말이다. 여기서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어린아이는 태어난지 일주일이 지나지 않은 어린아이로 설명되며 그 이유는 그것이 인간 본연의 순수의식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위적인 어떠한 생각도 일어날 수 없는 상태로써 천지만물, 즉 자연의 일부에 속해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자연이 무위이며 그것은 인위적인 생각이 없음을 뜻하는 말임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기를...

 

인간은 일념,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집중에 의해서 절대자와의 합일됨이라고 설명되는 삼매의 상태... 그것이 인위적으로 일어났던 모든 생각이 무력화되면서 태어난지 일주일이 되기 이전의 어린아이의 순수함으로 표현되는 상태에 다다른다. 그것에 대해서 "깨달음, 아트만, 부처, 하나님" 등으로 표현한 것이다. 언어 이전의 소식이기에 언어로 표현될 수 없으나 에고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며 이에 대해서 생각의 미묘한 이치와 속성으로 표현하였다.

 

순수함, 순수의식의 상태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생각에 의해서 아는 앎이 "나"라는 앎이며 "나라는 말은 "몸이 나"라는 앎이다. 순수함의 상태에서는 몸이 나다, 또는 몸이 내가 아니다, 라는 생각이 없었으며 생각이 없다는 생각 또한 없었다. 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표현하였으나... "나"라는 주체, 즉 생각하는 나, 먼저 일어난 생각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을 아는 "나"가 있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말은 대상이 없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며... 주체가 없음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없다는 말 또한 주체인 "나"가 있기에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이 있는 상태에서는 생각이 없는 상태, 즉 어린아이의 순수함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 그리고 죽은 자의 생각... 그 상태가 "아무것도 없는 것"의 "완전함"의 상태지만 내가 있는 동안에는 상상할 수도 없으며 집작할 수도 없기 때문에 깨달음, 진리, 도... 등의 설명에 대해서 해석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생각, 생각, 생각의 속성과 이치에 대한 글들을 읽고 또 읽음으로써 납득할 수는 있는 것이다.

나의 말이 그대 본성, 순수함의 말이기 때문이다.

 

일념의 집중됨, 즉 삼매에서의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해서 空으로 표현된 것이며 사람으로써의 모든 앎이 올바른 앎이 아님, 즉 인간의 모든 지식이라는 앎이 아무것도 없는 것에 바탕을 둔 허구임을 깨닫는 것이기에 그 이치에 대해서 불이일원론으로 설명된 것이다.

 

순수의식이 "나"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보호자에게 의지하면서 자연스럽게 집착하게 된다.

천지만물과 같이 생식 본능? 에 의해서 집착이 시작되며 사회적 동물로 세뇌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모를 때부터 어떤 것을 나로 알게 된 것이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것(육체)에 대해서 나라고 알게 된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그것에 대해서 의심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 지금의 자아이다.

 

자아, 나, 인간, 인류의 고통과 괴로움의 원인은 욕망이지만 욕망의 근원은 갈애이며 갈애의 근원은 육체가 나다, 라는 앎이며 모든 것의 근원, 기원은 육체가 나라는 앎 이전의 순수의식으로 표현될 수 있지만 그것은 언어를 알기 이전이기 때문에 언어 이전의 소식이며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누구나 청소년기에 방황하는 시기가 있었으며 그 시절에 인생이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에 대해서 의구심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자라는 과정에서 길들여진 갈애에 의해서 이성에 관심이 집중되거나 또는 이상이나 사상에 세뇌 당하면서 사회적 동물로 길들여진 것이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어떤것(몸)에 대해서 "나"라고 아는 앎"에 대해서 "생각의 뿌리"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성인 성자, 신으로 알려진 인물들... 에고의 생각, 망념에 의해서 하나님, 부처님 등의 우상으로 숭배되어 모독을 당하는 인물들의 가르침이 자아의 본성인 순수의식으로 표현되는 그것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그것의 행방을 찾음으로써 인간은 천지만물과 분리되지 않은 자아로써 삶과 죽음이 없는, 근심과 걱정이 없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에 대해서 안심입명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세상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하는 것은 오직 그대의 나, 나 이전의 나, 나 없었던 나, 그것이 모든 것, 언어의 기원이며 신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 그대의 그릇된 앎에 의한 "나라는 생각"에 의한 환상물질들이며 꿈과 같은 것이다.

그대의 나를 알면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는 것이다.

 

예수는 그것에 대해서 진리라고 하였으며 인류의 생로병사에 따른 고통과 괴로움은 無上의 길로 표현되는 "내 생각"이라고 아는(내 마음대로 할 수 없기에 내 생각이 아니기에 "신"으로 표현되는 것이지만) 생각의 이치를 깨우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서 진리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에 다다름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세속을 떠나라는 뜻이 아니며 무소유를 주장하라는 뜻도 아니다.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변하는 것은 그릇된 앎에 의해서 끊임없이 생멸을 반복 순환, 윤회하는 생각, 생각, 생각의 유희일 뿐이다. 그것에 대해서 마음이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인간, 사람이면 누구나 진리의 말과 함깨하는 삶, 일념의 공부를 통해서 불생불멸의 "참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언어, 말, 말, 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의 모든 지식, 앎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끝없는 의구심만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대의 참 나, 그것이 모든 것의 기원이다.

 

우주, 천지만물의 창조자로써 태양처럼 모두를 바라보는 지혜를 배우기 바란다.

자연을 바로보는 지혜.

자연에 선과 악이 있겠는가?

자연에 옳고 그름이 있겠는가?

자연에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겠는가?

자연에 아름다움과 추함이 있겠는가?

자연에 깨끗함과 더러움이 있겠는가?

자연에 삶과 죽음, 고통과 괴로움이 있겠는가?

 

우주가 나는 우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이 나는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 고통을 겪는 것은 오직 나, 그릇된 나, 나,... 생각, 생각, 생각...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생각의 의 유희이다.

 

그대의 자성, 그것이 신이다.

자유와 평화. 오직 그대의 나를 찾는 길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마음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어리석음... 그것이 고통의 원인이었다.

인생의 목적.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네 안에 하니님이 있으니...

진리, 그것이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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