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염불, 참선, 명상, 주력, 행위의 관찰법, 위빠사나... 낱말은 다르지만 목적은 일념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들이다.
위의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서 일념을 깨우칠 무렵에 비로소 자신도 모르게 흐르던 "생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일념이 더욱 더 깊어지면서는 "마음이 생각에 불과한 것"이구나 라는 알아차림이 다가온다.
물론 생각의 미묘한 이치에 대해서 충분히 납득하여 아는 상태에서는 굳이 그것에 대해서 깨우침이라고 할 것도 없을 것이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집중이 깊어질때에는 "생각"이라는 것에 대해서 알게 된다는 뜻이다.
수많은 종교와 유사단체들, 그리고 위빠사나를 통해서 깨달았다는 사람들......
생각의 이치를 이해할 수 없으면서 화두수행, 또는 기도를 통해서 하늘나라를 보았다며, 천국을 말하는 사람들...
나는 없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
육체가 나다, 또는 육체가 내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
내가 우주, 천지를 공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화두를 타파했다는 사람들...
화두를 타파하니 환하게 밝아지더라는 사람들...
내가, 내가, 내가... 무엇을 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수많은 종교와 유사단체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육체가 나다, 라는 앎도 올바른 앎이 아니요,
육체가 내가 아니다, 라는 앎 또한 올바른 앎이 아니다.
옳다는 앎도 옳은 앎이 아니며, 옳지 않다는 앎 또한 옳은 앎이 아니다.
자신의 앎, 그것에 의해서 스스로 고통을 겪는 것이지만 백일 기도에 의해서 무속인이 신을 봄과도 같이 "나라는 생각의 뿌리". 그것은 나의 생각이라는 아는 생각, 상상의 영역을 벗어나 있기때문에 수천년을 연구하더라도 명쾌한 해답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이는 불경을 연구하려는 어리석은 자들의 행위와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반야심경--의 내용 중 맛과 향에 대하여 그것이 "생각의 작용"이라는 비유설명 참고.
모든 앎이 올바른 앎이 아님에 대해서 노자와 장자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참다운 도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며,
석가모니는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라는 말로 번역되어 전해진 것이며,
예수는 나의 말을 옳기는 자가 "그리스도의 적"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알려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면 우주를 아는 것이다" 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그들 모두가 한글로, 우리말로 연설을 한 것이 아님에 대해서 모르지는 않을 것이니...
위의 기도와 명상, 참선, 관법 등의 모든 행위는 일념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것이 주력이든 "이 무엇고?"라는 화두이든,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왜 무라고 하였는가?
달마가 동쪽에서 온 이유는 무엇인가?
왜 뜰앞에 잣나무라고 하였는가? 등의 무수히 많은 화두들의 목적이 일념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이다.
왜 사람들이, 그리도 많은 수행자들이 세계 각처에 많이도 있건만 깨우친 인물을 찾아볼 수 없겠는가?
자신의 앎, 지식... 그것에 대해서 나, 나, 나라고 아는 앎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념, 즉 화두일념이 오랜시간 동안 지속될 무렵에는 경험된 앎이 나인 나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서 <나라는 생각>그것은 일념에서 해방되기 위한 돌파구를 찾게될 수밖에 없다.
일념의 성취는 자신의 나(모든 앎)의 죽음, 즉 나라고 아는 육체의 쥭음과 다르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아상(육체가 나라는 생각)은 일념의지속됨을 거부하기 위해서 살아오는 동안 들어서 아는 모든 앎을 총 동원해서 일념의 지속됨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린시절부터 들었던 말들, 즉 신선, 용왕신, 천국, 지옥, 선녀, 하늘나라, 외계, 신선, 영, 영계, 귀신 등에 대해서 알지만 아는 것이 아니며 모르지만 모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두려움과 고통을 겪는 것이듯이...
일념공부를 하던 사람들이 부처를 본다거나, 불경의 어느 한 구절에 집착한다거나, 환상의 세계, 또는 외계의 세계 등... 그것이 어떤 지식이든지 자신도 기억할 수 없는 상상의 세계에 대한 앎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일념의 지속됨은 그런 모든 앎, 지식에 대해서 나라고 알고 있는 나의 죽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살아오던 습관에 의해)조급한 마음, 즉 욕망이 앞선 상태에서 일념이 깊어지면 *나라는 생각(아상)*은 자신의 죽음을 방어하기 위해서 환상의 세계를 창조하게 됨으로써 일념의 지속됨을 방해햐는 것이다.
그러한 환상의 세계에 대해서 마, 마귀, 귀신 등을 통칭하여 "번뇌마"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환상의 세계란 무엇인가?
형상이 없는 것에 대하여 이름 지어진 것이다.
그것의 이름이 "하나님, 상제님, 영혼, 천국, 지옥, 마귀, 귀신, 신령... 등이며 그갓둘에는 형상이 없기에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 들이다.
막연한 앎... 이름으로 알고 있는 것들의 세계... 그것에 대해서 마, 마귀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이지만 그것을 현실과 같이 착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신질환과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수행, 공부... 일념의 지속됨으로써 모든 의혹에서 풀려나 안심입명에 드는 길이며 죽음과 삶이 없는 길이다.
노자의 말과 같이 천지만물과 분리되지 않은 자아로써 근심 걱정 없이 존재하는 영원한 삶의 길이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화두가 중요한 이유는...
일념의 길목에서, 마음의 평온 이후에 더 깊어질 무렵, 즉 아상(육체가 나라는 생각)이 무력화 될 무렵이 되면 하나씩 알아차리면서 지혜가 드러나지만 그 앎이 지식에 북과한 것이지만 그런 앎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어 나를 드러내는 습관에 의해서 나를 드러내게 된다.
무아라는 말에 대한 앎을 염두에 둔 사람들이 일념이 깊어지면 "내가 없다"라는 앎이 진한 꿈과 같이 현실처럼 다가오게 되며... 이런 앎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없다"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안다, 라는 앎에 대해서...
이것을 아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의심을 다시 일으켜야만 그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설렴, 육체가 내가 아니다, 라는 깨우침이 일어나더라도...
---육체가 내가 아님을 아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일념으로 모든 의구심이 사라질 때에 스스로 웃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언어의 기원, 말 변사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인간의 도리를 지키며 사는 삶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도, 그것은 자신의 그릇된 앎을 그릇된 앎이라는 앎에서 시작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자신의 나를 속이면서 무엇을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이 글은 그대, 자성에 바탕을 둔 말이다.
언어, 말로 존재하는 모든 것, 이름 있는 모든 것은 실다운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모든 행위를 관찰하는 일, 그리고 항상 미소를 잃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다른 나들과 논쟁, 투쟁, 전쟁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인간, 어느 누구나 똑 같은 무게의 짐을 지고 태어난 것이다.
오직 그대, 자신만의 관점에서 옳고 그름, 선과 악, 등의 분별에 의해서 고통을 겪는 것이다.
자아, 육체, 그것은 천지만물과 다르지 않은 것이며, 이는 한송이 꽃이거나 개미와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나... 그것이 모든 것의 기원이며 절대자이다.
네 안에 하나님.
네가 그것임을 의심하지 말라.
네가 그것임을 시험하지 말라.
네가 곧 그것이니...
두려워 하지 말라.
담대하라.
이 세상 그대의 나, 그것에 의해 창조된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