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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화두 / 목숨걸고 해야 할 일... (P11~P15)

일념법진원 2010. 4. 2. 10:46

세상 살아볼 만큼 살아본 사람이다. 이제 세상 어떤 일에도 웃어버릴 만큼 여유도 생겼다. 어떻게 살든 운명의 장난일 뿐인 것을 어쩌란 말인가.


비구니가 웃는다. 깔깔거리는 웃음은 아니다. 그렇다고 무거운 웃음도 아니다. 인자한 웃음도 아니다.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길들여진 탓일까. 말을 하지만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진지한 것도 아니며 진지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목숨 걸고 해야 되는 일이 ‘부처’가 되는 공부라고 했다. “부처”라는 말과 “공부”라는 말에 다시 실망하고 말았다.

 

 “공부”에는 소질이 없었다. 공부라는 말을 듣는 순간 “에이 싫어”라는 생각이 앞선다. 직업에 필요한 공부는 공부가 아니다. 전문서적은 끈질기게 읽어보고 내게 필요한 분야에 대해서는 연구도 많이 했었다. 결국에는 내 운명이 궁금하여 운명철학까지 공부를 해 봤으나 사주, 운명, 관상학 등의 학문들 역시 말장난임을 알게 된 뒤에 덮었다.

 

지금 보는 책들은 산야초 및 약초, 그리고 버섯 등의 약초와 관련된 책들이다. 가장 싫어했던 공부는 역사나부랭이였다. 인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모르고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른다. 그러기에 방황하는 것이다. 실체도 없는 무엇인가를 찾아내기 위해서 사는 것이라면 이미 틀린 것이다. 단군신화를 믿는 사람도 있으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있지만 어느 누구도 인생의 정답을 말하지 못했다. 아니, 아니 말을 했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런 말들을 들어본 적이 없다. 정말로 목숨을 걸 만한 일이 있었다면 그런 말을 난생 처음으로 들을 수는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비구니 입에서 話頭라는 말과 ‘이 뭣 고’라는 말, 선방(禪房), 큰 스님, 도인 등의 말이 튀어 나왔다. 종교에 대해서는 관심 밖이었기에 평소에 들어보지 못했던 말들이었다. 사찰에는 선방이라는 곳이 있으며 여름철과 겨울철에 ‘이 뭣 고’라는 화두를 든다고 하였다. 화두를 “든 다”는 말도 공부라는 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무엇을 위한 일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목숨을 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종교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던 사람이 “목숨을 걸고 해야 될 일”이라는 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차피 인생을 포기한 사람, 바쁠 일이 없는 사람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으나 불경테이프와 몇 권의 책을 빌릴 수 있었다.


현실 도피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 까지도 운명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느덧 산에 다니는 일이 하루의 일과가 되었다. 집에 있는 동안에는 약재를 다듬고 말리는 것이 일이다. 녹음테이프를 통해서 목탁소리와 어우러진 불경을 들으며 한가롭게 보냈던 날들도 있었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든 말든 관심이 없었으며 잔잔히 흐르는 목탁소리와 구슬픈 목소리의 불경들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을이 다가오는지 찬바람이 일기 시작할 무렵 다시 마음이 심란해진다. 삼십대 중반의 젊은 귀농인 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방황하는 삶을 본다. 내게 아저씨라고 부른다. “아저씨”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이다.

아저씨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겁니까? 라고 묻는다. 글쎄 무슨 일이든지 자신이 좋아 하는 일 하면서 사는 것이 최선이겠지.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귀농 자는 그 “좋아 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지 못하였기에, 또는 적성이 맞지 않았기에 무작정 귀농했다는 것이다.

 

단전호흡이나 마음수련원 등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 보다는 좀 더 현명한 삶을 살기 위해서 내려왔지만 고생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삶에 지쳐있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삼십대 중반의 젊은 시절에 “단학”이라는 책을 보았고 출근시간을 앞당겨 이용하여 유사한 단체의 교육을 경험해 보았다. 모든 유사단체들 또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파이를 차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가면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일 뿐임을 알게 되었다. 성큼 다가온 가을바람이 마음의 도피처를 찾으라고 독촉하였다.


젊은 귀농자로부터 몇 권의 책을 빌릴 수 있었다. 

제목이 그럴 듯한 세권의 책은 종교와 관련되었거나 신비로움을 조작한 유사종교단체를 위한 것들이었으며 제목이 싱겁기 이를 데 없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책을 보면서 그 책에 빠져들었다. 운명의 신과 다른 신들에 대한 이야기들이지만 분명한 것이 보였다.

 

세상을 돌보는 신이 있다, 라고 하면서도 참 자아를 깨달으면 신이 없다는 말이었다. 종교와는 상관이 없었다. 오직 내 안의 나를 찾음이 신이다, 라는 말이었으며 소위 “깨달음”이라는 말이었지만 깨달음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직 신이 있으며 내가 나를 찾으면 그 신이 나라는 것이었다.

 

그 책에서는, 사람들은 무지하다, 하지만 무지 역시 가공된 무지이다. 마음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면 마음은 실체가 없기에 도망가 버린다, 라는 말과 사람들은 꿈을 꾸고 있는 줄도 모르면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열차에 탔으면 짐을 내려놓으면 되는데 왜 짐을 지고 있는가. 라는 말, 그리고 사람들은 ‘이것이다, 저것이다 또는 다른 것이다, 라는 분별을 하고 있다. 한 여자를 놓고 “어머니, 누나, 할머니, 등으로 분별한다, 라는 등의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이 있으되 내가 깨달으면 “신”이다, 라는 말이었다.


작은 비구니 스님의 “목숨 걸고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라는 말에 대한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이런 말들이 ‘노자와 장자’의 道를 뜻하는 말인지도 몰랐으며 석가모니의 佛法(不二法)인 줄도 몰랐다. 예수의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말이 너와 이웃이 둘이 아닌 하나이다. ‘네 안에 하나님’이라는 말이 ‘너와 하나님이 둘이 아닌 하나’의 뜻인지도 알지 못하였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 헤르만 헷세의 ‘존재의 거듭남’.......

이런 말들에 대해서 들어본 기억도 없었으며 상상할 수도 없었다. 


21세기 첨단 과학은 우주의 실체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아인슈타인은 “무한한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우주이다, 하지만 우주가 무한한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무한한 욕망에 대한 어리석음을 꼬집었다. 상대성 이론의 간단한 설명(뜨거운 난로에 손을 대고 있으면 1분이 한 시간 같지만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있으면 한 시간이 1분과 같다)을 통하여 시간과 공간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했으며 우주는 보는 자가 있기에 존재함을 설명하려 하였다. 우주의 실체가 없다는 말은 사람을 비롯한 천지만물의 실체는 아무것도 없음, 즉 無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책을 통해서 비구니의 “목숨 걸고 해야 되는 일이 있습니다.” 라는 말의 실마리를 찾았고 그 길을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인생은 시작도 모르며 끝도 모른다. 세상의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해도 다 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세 살 먹은 어린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목숨 걸고 해야 하는 일이라는, 나를 찾는 일은 남들과의 싸움이 아닌 나와 내 생각과의 한판 싸움이었다. 나의 마음을 내가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삶은 고통과 괴로움이었다. 


그리고 나와 나의 생각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이겼다.

내가 나의 마음을 이겨서 승리한 것이다. 그런데 목숨 걸고 내 생각과의 싸움에서 이긴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나는, 나라고 알았던 몸은 병아리의 껍질에 불과한 것이었다. 마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삶과 죽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주 삼라만상이 나와의 싸움에서 이겨서 승리한 다른 나의 창조물이었다. 육체는 나무나 흙, 질그릇과 같은 것이었다. ‘노자’는 이에 대해서 무위자연이라 하였으며 “천지만물과 분리되지 않은 自我”라고 표현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주체가 없으니 객체가 없다. 허공과 앎이 있지만 지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행위 하는 몸이 있지만 그것은 꼭두각시일 뿐이다. 꼭두각시는 내가 아니다. 그것에는 마음이 없다. 그것은 모든 것의 기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은 곧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한다. 그곳에는 불행이나 슬픔이 없다. 삶도 죽음도 없다. 시작도 끝도 없다. 태어남도 없으며 멸함도 없다.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나의 의식의 산물이다. 그것이 나다. 경험자가 없는 나다.


육체의 얽매임에서 풀려난 정신, 자유가 있다면 자유라는 말이 없음이 자유이다. 행복이 있다면 행복이라는 말이 없음이 행복이다. 평화가 있다면 평화라는 말이 없음이 진정한 평화이다. 만족으로 해결될 수 없는 욕망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욕망이 죽어야만 한다. 마음은 욕망이며 욕망은 경험에 의해 저장된 기억세포의 작용에 의한 생각의 찌꺼기이다.


스스로 일어나는 생각이 나의 생각이라는 앎은 그릇된 앎이다. 나의 생각이라고 당연시함이 착각이다. 생각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미지의 신에 의해 행위 되는 것이었으며 나는 생멸하는 생각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한다, 라고 알지만 생각에는 주체가 없다. 생각의 주체를 찾을 수 없다. 그렇기에 신이다. 생각의 행위에 의해서 내가 존재함을 아는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생각에 의해 살아지고 있는 것이며 꿈인 줄도 모르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은 스스로 일어난다. 아픈 과거를 떠올리고 싶어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일들을 지워버릴 수도 없다. 나의 생각인 것 같지만 생각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생각해 보면 나는 과거의 기억들이다. 깊은 잠속에서는 내가 없으며 우주도 없다. 그 상태가 無我이며 진리이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마음은 채워도 마음이며 비워도 마음이다. 행복함도 마음이며 기쁨도 마음이다. 괴로움도 마음이며 슬픔도 마음이다. 마음의 본질인 참 나의 본질을 찾음이 생각을 지배하는 신과 하나 됨이다.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누구인가?”

몇 구절의 話頭를 들고 ‘나 아닌 나’를 찾아가는 길, 인생의 목적이 아니겠는가?

삼매라는 낱말이 있다.

육체에 얽매어 있는 동안의 최상의 정신집중 상태에서 實在 와의 합일됨이다.

목숨 걸고 해야만 되는 일, 사람으로 태어난 목적이다.

할 일 다 해마친 자.

神. 眞理이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의 삶이 철학의 바탕이며 인간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근원을 알지 못하기에 점성술이나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인생의 해답을 말할 수 없다.

세상 어느 누구도 만족하여 평화로울 수 없기에 탈옥수가 자유를 갈망하듯이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가지만 달려 나가서 다다르는 곳은 삶에 대한 회한과 고통스러운 죽음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되돌아보면 나는 경험된 기억이며 기억은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지식이다. 지식은 낱말에 대한 이해이며 세뇌된 낱말에 대한 확신과 집착된 기억이  관념 또는 고정관념이며 마음이라는 것이다.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찾아보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은 생각에 불과한 것이며 생각 없는 마음은 있을 수 없다.   

 

자아는 경험된 기억이 “나”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괴로움과 고통을 겪는다.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와 같이 실재가 아닌 “나는 누구인가”라는 한 구절에 대한 집중에 의해서 경험과 분리된 自我를 발견하게 됨이 소위 “깨달음”이라고 표현되는 진리이다.

 

자신의 나를 위해 다른 나를 짓밟아서 이기고 승리함이 행복이며 성공임으로 세뇌당한 인류의 삶, 서로가 서로를 이겨야만 되는 삶이 지옥이 아니겠는가.

소크라테스의 “검증되지 않은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라는 말과 노자와 장자의 말, 그리고 왜곡되어 전해지는 싯다르타와 예수의 말의 본질이 경험과 분리된 순수의식의 “참 자아”인 진리를 깨우침에서 비롯된 불이일원론이다.


우주를 비롯한 천지만물은 경험된 사고방식의 시작부분인 “나라는 생각”에 의한 관념의 산물이다. “나라는 생각”은 육체가 나다, 라는 생각이며 한 생각의 집중에 의해서 하늘의 구름과 같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흐르는 생각이 끊어짐의 一念의 無念처에서 “육체는 내가 아니다”라는 알아차림에서 꿈인 줄도 모르고 꾸던 꿈에서 깨어나는 것. 육체만이 내가 아닌 “참 자아”로써의 거듭남, 본래성품, 환생, 부활이다. 육체만이 내가 아닌 “참 자아”에 대해서 싯다르타는 “부처”라 하였으며 예수는 “성령”이라 하였으며, 노자와 장자는 “도”라 하였다.

“나 이전의 나”, “나 아닌 나”인 “참 자아”를 찾는 일.

인생의 목적이 아니겠는가?


나를 모르는 “나는 누구인가?”

나를 찾는 일.

우주의 주인이 되는 일.

살아있는 동안에 목숨 걸고 해야 될 일이 아니겠는가?

육체가 나라고 착각하는 한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진리. 오직 그것만이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