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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맡김의 지혜 / 아이와 순수의식

일념법진원 2010. 4. 3. 11:49

언어의 뜻을 인식하기 이전, 즉 말을 배우기 전의 아이들을 보라.

예수의 말 중에 "어린아이처럼 순수하지 않으면 천국,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라는 말에서 아이의 순수함에 대해서도 분명히 언급한 것으로 전해진다. 

 

어린아이의 순수함이란 인간의 본성, 자성, 순수의식을 뜻하는 말이며 이에 대해서 태어난지 일주일 되는 아이라고 말한다.

이 또한 꼭 올바른 표현일 수는 없다. 그 까닭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어미의 뱃속에 있을 때에도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지만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가장 순수한 시기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생명이 있는 최초의 시기로 비유한 것이다.

 

아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지혜가 무엇이겠는가?

부정하지 아니하고 거부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맡김, 또는 긍정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까닭은 지식에 의한 분별이 의심에서 시작된 것이기에 스스로 일어나는 생각은 의구심이며 의심은 부정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어떠한 분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아이에게 세상이 있다는 생각이 있겠는가?

그 아이에게 영혼, 귀신, 천국, 지옥, 윤회... 삶과 죽음 등의 고통이라는 인위적인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순수의식의 아이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없다는 말도 없으며 없다는 생각도 없으며... 있다는 앎도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무위자연이며 순수의식의 상태이다.

 

태어난지 일주일 되는 아이에게 선과 악, 잘함과 못함, 성향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순수의식, 본성, 자성, 신, 창조자, 절대자, 운명의 신 등으로 표현되는 "나 없는 나", "나 아닌 나"의 시절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었다. 다만 그것, 그런 상태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을 뿐이다.

깨달음, 그것에 대해서 어린아이와 같음으로 설명한다면 사람들은 싱겁게 웃어버릴 수 밖에 없다.

어느 누구나, 나도 경험한 바 있으며 그런 어린아이를 항상 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더 신비로움으로 포장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상태에 대해서 언어로 표현되다 보니 신비로움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나가 없음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듯이 언어가 없음에 대해서도 상상할 수 없지 않은가?

 

배움, 앎에 의해서 오직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좀더 신비스러운 것을 갈망한다.

육체가 나다, 라는 앎이 없었던 상태에 대해서 감히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죽을 때까지 무엇인가를 찾아서 해메다가 죽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 내일과 미래를 향해서 달려 나갈 뿐... 자신이 찾는 것이 무엇인지도 분명하지 않다는 데에 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하여 평화로울 수 업기 때문이다.

 

않으면 눕고 싶고, 말을 타면 종을 부리고 싶다는 옛 말이 있지만...

몇 일, 아니 24시간 동안만이라도 누워있으라고 한다면.... 그 짓도 못할 짓이며...

하루종일 말을 탄채로 있으라고 해도 그 짓 또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대는..... 어떤 상황에서 끊임없이 만족하여 평화로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루종일 춤을 추고 있다면???

히루종일 말을 타고 있다면???

하루종일 누워 있아면???

하루종일 술을 마신다면???

아루종일 이성과 같이 있다면???

하루종일 먹어야만 한다면????

하루종일 굶어야만 한다면???

 

다른 무엇을 갈망하는가?

그리고 그 이후에는 또 무엇을 갈망할 것인가?

 

아이에게는 분별이 없다. 없다라는 생각도 없다. 생각이 없다는 생각도 없으며 모른다는 생각도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말에 대해서 불경에는 역무무명진 등의 난해한 글들로 포장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설명될 수밖에 없다.

그 상태. 일념의 무념처에서의 알아차림......

그것은 태어난 아이가 사회적 동물로 세뇌되는 과정에서의 최초의 앎, 즉 인위적으로 일어났던 생각이며 그 생각이 "육체가 나다"라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내가 아닌데... 그렇다고 하여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 없느니...

 

그것에 대한 알아차림에 대해서 우리 말로는 깨달음이라는 낱말로 표현된 것이며 마하리쉬는  "나라는 생각의 뿌리"라는 말로 표현하였을 것이다. 

 

태어난지 일주일 된 어린 아이에게 "내가 나다, 내가 내가 아니다." 라는 앎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라고 하였으며, 당신은 당신을 아십니까? 라는 말에...

나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나를 모른 다는 것, 그것만은 안다, 라고 했던 것이다.  

 

주의 집중력, 주력, 그리고 화두일념을 통해서 생각..., 즉 그동안 알았던 그릇된 앎에 의해서 끊임없이 반복 순환되고 있었던 생각의 윤회가 끊어지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분별심(자신만의 앎에 의한 관념, 욕망)이 잦아듦에 따라 평온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며 더욱 깊어지면서 하나씩 하나씩 고통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꿈을 꾸면서도 괴로움을 겪듯이... 일념을 유지하기 위한 일에 대해서 힘들다고 생각하듯이...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생각, 생각, 생각에 의해서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되는 것이다.

 

행위하지만 행위한다는 생각이 없는 아이의 행위... 무위이며 자연이다.

아이에게 배워야 할 것은 긍정도 아니며 부정도 아닌 무위자연이지만... 에고의 생각은 항상 부정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긍정을 배우라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가 다르지 않다.

자라나면서... 사회적 동물로 세뇌되는 과정에서 이상, 사상에 길들여져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앎, 지식, 관념, 고정관념, 마음... 그것들은 나 아닌 것을 나로 아는 앎, 즉 육체가 나라는 의구심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나 이외의 모든 대상에 대해서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에게도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며, 불친절한 사람에게는 욕설을 퍼 부어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글을 보면서도 자신의 생각, 자신의 앎이 옳음에 대해서 당연시 하기 때문에 자신만의 분별에 의해서 이해? 오해할 수밖에 없다.

어떤 글을 보든, 누군가의 말을 듣든... 그것이 어떤 대상이든지 우선 그것에 대해서 자신의 앎이 옳다고 주장해야만 한다. 그것에 대해서 업, 업보, 전생의 업, 습관, 습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이며 우리말로는 버릇이지만...... 그것이 자신도 모르는 "나라는 생각"에 의해서 일어나는 생각의 윤회에 따른 결과이다.  

 

순수한 어린아이, 순수한 영혼?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긍정"이며 "신뢰"이며 "맡김"이다.

이는 곧 "저항하지 않음"이며 물과 같이 바람과 같이 구름과 같이 유연하게 살아가라는 뜻이기도 하다.

물, 그것이 수증기가 되든지, 얼음이 되는지, 공기중에 있든지 그 본성에는 변함이 없듯이... 그렇게 살아가라는 뜻에 대한 성자들의 설명에 의해서 "침례", "물로 세례를 받음" 등의 말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여느 종교에서 물을 이용하는 행위들... 모두가 순수의식과 물을 비유한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념의 시간이 길어지면서는 여러가지의 이익?이 따른다.

근심과 걱정이 사라짐으로 하여 건강이 회복됨은 당연한 것이며 자신의 행위를 관찰함에 의해서 매사에 신중하기 때문에 실수를 하는 일도 줄어들게 되며... 항상 여유로움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에는 뿌리가 없기 때문에 종교들에 의해서 하나님이라는 말, 성령이라는 말, 마귀라는 말, 영혼이라는 말, 윤회라는 말, 천국이라는 말, 지옥이라는 말, 말, 말들이 창조된 것이며 형상도 없는 말, 말, 말들에 대해서 세뇌되는 것이다. 

인류... 결코 만족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욕망의 근원, 의심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대가 그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나서 숨을 쉬고 그 숨이 언제 어느때 멈추어 질지도 알 수 없듯이... 지금 그 자리에 있고자 소망하여 있는 것이 아니듯이... 그대의 한 생각에 의헤서 한송이 꽃이 꺾여 지듯이 육체, 몸 또한 꺾여진 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우주가 나는 우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듯이...

자연이 나는 무위자연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듯이...

세상이 변해가는 것이 아니다.

찰나지간으로 변해가는 것은 오직 그대의 나라고 아는 생각, 생각, 생각... 그것에 의해서 마음이 변해가는 것이다.  

 

문명사회를 위한 발전... 무엇이 발전이란 말인가?

지구를 멸망하게 하기 위한 행위... 그것에 대해서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인류의 자유와 평화... 그대의 나가 있기에 그것, 자유, 평화라는 것이 있다면...

오직 무상의 길, 참 나를 찾는 길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진리. 그것이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

 

http://cafe.daum.net/husimwon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