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내 생각임을 당연시 하지만 결코 내 생각일 수 없는 그것의 힘에 대해서 "신"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일채유심조의 설명과 같이 생각, 마음... 그것에 대해서 나라고 아는 앎에 대해서 당연시하기에 철학에 바탕을 둔 삶에서는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없으며 인생에 해답이 있을 수 없다.
인류의 궁극적인 목적이 자유와 평화이지만...
이 세상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듯이 자유와 평화 또한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말로 만들어진 소리들이기에 말 변사라고 하였다.
말, 언어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대는 기억된 언어가 없는 새로운 것들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 없다.
그대의 생각이지만, 그대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기억된 언어, 낱말들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기억된 낱말, 기억된 언어의 범위 이내에 대해서만 상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세상을 비롯한 모든 앎, 환상의 세계 조차도 기억된 낱말에 한정된 생각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음 만으로도 그대는 고통과 괴로움의 미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일념공부를 지속해 나가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나 아닌 나"의 친구...
그는 타국땅에서 일념중에 그것에 대한 깨우침으로 웃어버릴 수 있었으며 더 깊은 삼매에 들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라는 생각이라는 놈"이라고 표현했던 2차에고를 경험한 것이다.
그것을 아는 나가 있음을 아는 나로 존재하는 것이다.
생각, 그것은 무상(無上)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을만큼 위 없으며 깊고 깊은 미묘한 것이다.
깨닫고자 하는 욕망, 욕망, 욕망으로 일념을 지어나가는 행위의 결과는 기억된 낱말, 문장에 대한 환상을 창조하는 결과로써 또 다른 정신질환일 수밖에 없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약이다. 아는 것이 병이며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이 이를 두고 만들어진 말일 것이다.
얼마 전에 명색의 이치를 조금 깨우친 인물들에 대해서 소개한 적이 있었다.
연지, 승현이라는 닠네임으로 이곳에 소개된 사람들...
고통을 넘어서 우울증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카페의 글들과 "깨달음의 실체를 밝힌다"라는 저서를 통해서, 그리고 이 사람을 만나면서 기쁨을 되찾았다고 감사의 말을 전해오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그들은 스스로 깨달았다며 이 사람에게 분별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하였으며 깨달음, 그것에 대해서 지기님과는 다르다고 하기도 하였다.
어떤이는 어느 누구를 깨닫게 해 줄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다고 한다.
스스로 깨달아서? 자유하고 평화롭다면 그만이다.
종교나 유사단체등의 세뇌에 의해서 생로병사의 고통과 괴로움에서 해방되어 기쁨과 평화로움으로 존재하며 자유할 수 있다면 그 또한 깨달음일 것이다.
이 사람은 꼭 깨달아야 된다라고 말한바 없다.
깨달음이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또다른 기억된 생각에 대한 환상의 세계에 빠져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며, 귀로 듣는 것이 아니며 혀로 맛을 아는 것이 아니며, 코를 통해서 향기를 맡는 것이 다니다.
생각이 있기에 생각에 의해서 내가 존재함을 알듯이... 기억된 생각과 현재의 상황과의 비교에 의한 분별에 의해서... 기억세포에 바탕을 둔 순간생각세포의 작용에 의해서 아는 것이다.
찰나, 찰나지간으로 윤회하는 생각에 의해서 아는 것이며 아는 모든 것은 안다는 생각, 생각, 생각인 것이며 모른다는 것 조차도 모른다는 생각, 생각, 생각인 것이다.
생각의 이치와 속성에 대한 설명에서 참고하기 바란다.
얼마 전에 몇 몇 공부인을 만났던 자리에서 운영자 목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목석 또한 그들의 말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말인 즉... "깨달음의 순간이 깜깜하다"라는 것이다.
"깨달음의 실체를 밝힌다"는 저서에 생각의 끊어짐에 대해서 "깜깜한 어두움"으로 표현된 말에 대한 이해?, 오해의 결과이다.
이미 자등명, 법등명이라는 말에 대한 그릇된 해석에 의해서 삼매에서 빛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있기에 설명된 바 있다. 빛에 대해서는 오해가 풀렸으면서도 "깜깜한 어두움"이라는 말을 염두에 두고 상상하면서 일념에 들다보니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깜깜함이 현실로, 실재와 같이 다가온 것이다.
깜깜한 어두움을 경험함이 깨달음일 것이다, 라는 상상의 세계에 빠져든 결과이다.
연지라는 닠네임의 소유자는 깜깜함을 경험한 시간이 짧았으며 승현이라는 닠네임의 소유자는 그 깜깜함 상태의 시간이 조금 더 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들었던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대해서 의심할 수 없었다고 한다.
왜냐고 물으니...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이 명색을 깨우친 인물들이라고 소개했었기 때문이란다.
무한한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과 우주이지만, 우주가 무한한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하였든가.
운전을 하던 중에 대낮인데도 갑자기 깜깜하여 급브레이크를 밟았다는 말에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깨달음, 그것은 환샹의 세계가 아니다.
다만 이해를 넘어선 앎이기에 설명도 해석도 불가하며 오직 일념을 통해서 스스로 알아지는 참다운 앎이기에 신비로운 세계, 환상의 세계로 설명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지혜를 증득함에 대한 비유들이 천국, 불국토, 미르바나의 세계인 것이다.
우주가 "나는 우주다"라고 말하는가?
개구리가 나는 개구리다, 라고 말하는가?
나무가 나는 나무다, 라고 말하는가?
산이 나는 산이다, 라고 말하는가?
바람이 나는 바람이다, 라고 말하는가?
구름이 나는 구름이다, 라고 말하는가?
바다가 나는 바다다, 라고 말하는가?
펄럭이는 깃박이 나는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이라고 말하는가?
세상이 나는 세상이라고 말하는가?
세상이 나는 변한다고 말하는가?
세월이 내가 간다고 말하는가?
시간이 내가 흐른다고 말하는가?
공간이 내가 비었다고 말하는가?
허공이 내가 허공이라고 말하는가?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누구인가?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을 아는 나는 누구인가?
그것을 모르는 나는 누구인가?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은 그대의 나... 마음이다.
그리고 마음, 그것은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나라는 생각... 의심의 근원이다.
의심의 근원에서는 의심이 없다.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모르는 것이 없다.
앎을 모를 줄 아는 앎. 그것에 대해서 지혜라는 말로 표현될 뿐.
이 또한 말 변사이니...
서두르지 말라.
담대하라.
깨어나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그대의 나. 그것이 모든 것의 기원이다.
진리.
그것이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