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想이 진리이며 진리가 무상이다.
무념(無念)과 무상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며 궁극에 이른 자의 상태에 대해서 무념무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육체가 나, 라는 생각으로써의 삶에 대해서 "에고"라는 말로 표현한다면, 에고에게 무념이나 무상은 있을 수 없다. 무상은 무상이라는 생각이며 무념 또한 무념이라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념과 무상은 진리와 다르지 않은 말이다.
진리의 길에 대해서 도를 닦는다, 라는 말로 표현되었던 이유는 생각의 미묘한 이치에 대해서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기억된 생각과 순간생각세포와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었던 시대에 그것에 대한 설명을 위하여 만들어진 말들이다.
모양을 그릴 수도 없으며 이름을 지을 수 없는 것이라는 말과, 언어로 표상할 수 있는 도는 참다운 도가 아니라는 말, 불생불멸이라는 말 등과도 같이 이해조차 할 수 없으며 수천년을 연구하지만 해석될 수 없는 말들이었다.
21세기를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글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책과 이곳의 글들을 통해서 깨달음, 도, 참 나, 아트만, 하늘나라, 지옥, 성령, 부처, 불성이라는 말등에 대해서 관념적으로나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영어를 배웠다고 하여 영어권에 사는 사람들과 소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외국인이 우리말을 구사한다고 하여서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없듯이 한글을 안다고 하여, 지식이 많다고 하여 이곳의 글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잘 났다는 상으로 읽는다면 어느 한 구절도 바로 볼 수 없다.
그대의 탓이 아니다. 그렇게 세뇌되어 가공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글을 쓰는 사람 조차도, 나 이외의 다른 사람으로 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이 사람이 사람이라면, 그것은 그대의 나, 그대의 본성과 하나된 사람이다.
사람들은 사람을 보면서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먼저 판단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우선 의구심으로 상대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며, 자신 이외의 모든 대상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곳의 글들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우선 반대를 위한 목적으로 글을 보게 되며, 반대할 이유를 발견하면 합리화 시키려는 노력을 시도하게 된다.
지식이 많아서 아상이 강해진 사람들은 이 글을 볼 수 도 없다.
석가의 말 중에 올바른 법을 만남에 대하여 백천만겁 난조우의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백천만겁 난조우의 인연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고통스러워 하다가 작은 깨침으로 기쁨을 노래하는 이들이 있다.
기쁨을 찾는이들을 보면서 이것이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진리의 길을 가던 이들이 아상에 빠져 벗어날 수 없는 지경이 되었기에 아상의 원인에 대해 설명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상은 자존심, 즉 내가 존재하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아상이 없을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나에 대해서 분명히 아는 것이 없기에 다른 나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나를 인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내가 아니면 다른 나가 존재할 수 없기에 모두가 나이며,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이에 대해서 천지만물과의 구분이 사라진 자아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였으며 천지만물과 분리되지 않은 자아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불이일원론 또한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그렇다고 하여서 내가 우주다, 또는 우주가 나다, 라고 단정짓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나는... 이라고 말하는 그것이 에고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없기에 대상이 없는 상태에 대한 설명이기에 주체가 나인 자아로써는 이해할 수 없으며 해석될 수도 없다. 다만 관념으로나마 이해될 수 있을 것이기에 설명하는 것이다.
여러가지의 방편들을 통해서......
일념, 집중, 주력을 통해서 아는 참된 앎의 깊이에 대해서는 스스로 알아차릴 수 없다.
공부가 깊어진 만큼 더 아는 것이 없어지기 때문이며 내면에서 일어나는 참된 앎에 대해서는 드러날 수 없기때문에 정작 수행자는 자신의 수행의 정도에 대해서 짐작할 수 없다.
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들 또한 본질에 대한 설명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자신의 공부 정도를 알아볼 도리가 없다.
그러다가 이 사람을 만나면서 비로소 자신의 공부에 대한 깊이를 알게되면서 아상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공부는 거기서 끝이난다. 그렇기에 우주보다 더 무한한 어리석음이지만......
살아오는 동안 내내 자신의 삶에 대해서 비관해오던 사랍들의 사례이다.
참으로 진리를 추구하던 사람들은 공부의 깊이를 알더라도 상을 내지 않으며 슬기롭게 더욱더 깊고 높은 곳을 향하여 길을 떠나게 된다. 좌절과 고통으로 얼룩진 삶을 살았던 사람들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진리의 길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일념공부를 통해서 알게된 자신의 앎이 사람들의 지식을 넘어선 앎이라는 자부심에 알음알이의 상을 내게 되며 깨달음에 목적을 둔 일념(망념, 망상)에 빠져들게 된다.
사회로부터, 가정으로부터 소외를 당했던 사람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공부의 깊이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나서 보니... 내가, 냐의 앎이 세상 어떤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안다, 라는 앎에 의한 아상을 버릴 수 없는 탓이다.
"깨달음의 실체를 밝힌다"라는 저서에도, 이곳에도 수차례 언급되었던 말이 이해와 오해는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라는 말이며 일념중에 일어나는 참된 앎에 대해서도 "이것을 아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앞세워야 한다고 하였지만... 아상이 들어나기 시작하면 듣되 들음이 없게 되는 무지에 빠지게 된다.
설령, 육체가 내가 아님을 알아차린다 하더라도 "육체가 내가 아님을 아는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어 들어가야만 궁극에 이른다는 말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들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까맣게 잊는 것이니... 어찌하겠는가.
그렇기에 법기(그릇)가 따로 있으며 백천만겁 난조우라고 하였던 것이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공부, 수행, 참 자아를 찾는 일 만이 살아가는 이유이며 목적이 되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행복을 위한 길이라고 하였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있을 수 없기에 그 길을 통해서 자유와 평화를 찾아야 하는 것이며 살아있는 동안 내내 기쁨과 평화로움으로 존재할 수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일념공부, 수행이 깨닫기 위한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욕망이며 욕망은 만족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욕망이 앞선다면 생각, 마음은 기억된 낱말, 말, 말에 대한 환상을 창조하게 되는 것이며 그 결과는 정신질환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길거리에서 예수를 믿어야만 천국에 간다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깨달음. 그것은 "나라는 생각의 죽음"이라고 하였으며 수행은 일념과 나라는 생각과의 싸움이라는 말로 비유하기도 하였음을 상기하기 바란다. 나라는 생각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이다. 나라는 생각은 자신의 죽음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억된 낱말들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내면서 일념의 유지됨을 필사적으로 저항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서둘러서도 아니되며, 게을러서도 아니된다고 말한 것이다.
욕망, 재물욕, 명예욕, 지식욕... 등의 모든 욕망은 크면 큼만큼 고통 또한 커지는 것이다.
그대의 나, 그대의 순수의식, 자성... 그것이 모든 것의 기원이다.
우주의 주인된 자가 두려울 것이 무엇인가?
무엇을 얻기 위하여 구걸하는가?
무엇을 위하여 무릎 꿇는가?
행복, 자유, 평화... 오직 진리의 길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상의 길이며 진리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