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그것에 대해서 궁극에 이름, 또는 절대자와의 합일, 자아의 초월, 안심입명에 듦으로 볼때 그 단계는 헤아릴 수 없다.
전생의 업?, 카르마? 등의 말과 같이 살아오는 과정에서의 시대와 환경, 조건에 따라서 관념, 고정관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60 여억명의 사람들 모습이 모두 다르듯이 개체적 자아의 성향, 성품 등으로 분류되는 마음이라는 것이 모두가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잠깐 지나는 길에 사랑이라는 낱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사랑, 참으로 따듯한 말인 것 같지만 사랑이라는 말 보다 더 변덕스러운 말은 없는 듯 하다.
이해와 오해는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기에 지인들은 사랑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우주의식, 순수의식의 사랑이기 때문이며 중도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은 말이다.
사랑이라는 말과 중도라는 말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에고의 삶에서 참다운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공부의 깊이가 같은 인물들간의 사랑일 것이며 궁극에 이른 자들의 사랑이 참된 사랑이며 삶일 것이다. 그 이유는 영원히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불행이라는 생각이 없으며 부정적인 말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이라야만 사랑일 수 있는 것이다.
사랑과 증오 또한 같은 뜻의 다른 표현임을 깨우칠 수 있기 바라며......
깨달음의 세계에 대한 신비스러운 표현들에 대해서는 여러가지의 방편으로 설명되었다.
요약하자면,
지식과 지혜의 차이이다.
명상, 참선, 기도, 기체조, 요가 등의 행위를 통해서 정신이 집중되어 있는 시간이 늘어남에 대해서 유상삼매라고 하였으며 삼매의 시간이 길어짐, 수행이 깊어짐에 따라 스스로 드러나는 앎에 대해서 지혜라고 하였다.
지식으로 아는 앎과 일념에 의해서 알아차려지는 앎의 차이이다.
이 말은 미혹에서 벗어난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은 말이며 악에서 구원받는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은 말이다. 언어의 허구성을 깨우침과도 다르지 않은 말이다.
지식은 많으면 많은 만큼, 꼭 그만큼 자신의 내면과는 단절되어 있으며 꼭 그만큼 의구심이 커지는 것이기에 고통의 산물일 수밖에 없으나... 일념을 통한 깨우침은 그 깊이가 더해갈 수록 고통과 괴로움이 절감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신비스러운 것은 일념에 의해서 알아차리는 앎은 자신만의 앎이기에 지식으로써는 이해도 할 수 없으며 해석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상심심미묘법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곳의 글들에 대한 댓글 한 구절에서도 그 깊이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며 메뉴의 깨달은 자, 각성론의 글들에서도 그 깊이가 드러난다. 깨달은 인물로 알려진 사람들 조차도 궁극에 이른자와 명색을 깨우친자, 그리고 말재간을 부렸던 자들은 한 구절의 싯귀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일념을 통해서 드러나는 지혜, 그 앎에서 다가오는 기쁨은 세속의 어떤 기쁨과 비교할 수 없기에 환희로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며 오직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을 뿐이기에 그림의 떡으로써는 배부를 수 없다는 비유를 하기도 하는 것이다.
세상사 모든 일이 이와 다르지 않다.
처음부터 잘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이가 말을 배워서 말을 하듯이,...
바둑을 모르던 사람이 바둑을 배워서 바둑을 즐기듯이...
수도 없이 넘어지며 배웠던 자전거 타기가 배우고 나면 못 타는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지듯이...
그대가 세상에 나와 어리둥절하여 헤매다가 자신의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듯이...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종교나 유사 단체에 세뇌를 당하여 오직 자신이 숭배하는 신 만이 옳다는 착각, 세뇌에 의해서 서로가 죽고 죽이는 싸움질을 해 왔듯이...
지금 자신의 나만이 옳다는 아상에 빠져서 투쟁하며 괴로워 함을 당연시 여기듯이...
말을 배우면서 알았던 귀신이나 영혼, 죽음이라는 말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 당연하다고 여기듯이...
자신의 모든 앎, 지식이 말을 배운 뒤에 타인으로 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말, 말, 말로 만들어진 것들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것이 나의 앎, 나라고 당연시 하듯이...
그러면서도, 자신의 모든 앎, 지식이 그릇된 앎인지 알지 못함에 대해서 당연시 하듯이...
일념을 통한 참된 앎에 대한 깨우침은 궁극에 이른 인물들이 "육체만이 내가 아님에 대해서 보편타당한 앎"이라고 표현하였듯이 자신으로써는 너무도 당연하여 보편타당한 앎이지만 지식으로는 이해도 해석도 불가능한 것이다.
자주 드는 사례이지만 숨을 쉬는 일에 대해서 내가 숨을 쉬고 있다고 안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그대의 의지대로 숨을 쉬거나 멈출 수 없음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생각의 속성, 즉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감히 왜 모르는지 조차 생각해 볼 수도 없기 때문이지만... 그것이 생각의 미묘한 이치이며 속성이라고 설명하였다.
깨달음의 층차? 단계는 이와같이 헤아릴 수 없으나 삼매가 깊어진 만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가 온다는 것이 참으로 비스러운 것이다. 공부가 깊어진 사람들과의 만남은 항상 즐거움일 수밖에 없다. 공부가 깊어지면 깊어지는 만큼, 꼭 그만큼 불행이라는 생각이 사라지며 분별심도 사라진다. 더욱더 깊어진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부정하지 않으며 저항하지 않으며 절대적인 긍정의 미소만이 남겨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평화로움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며 그의 편안함에 이끌려 다른 사람들이 먼저 다가오게 되기에 주위가 밝아지는 것이다.
그렇게 공부가 깊어지더라도 자신의 공부의 정도가 얼마나 진척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 이 공부의 가장 어려운 점일 것이다. 오직 궁극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스스로 모든 의구심에서 풀려남을 깨우치는 것이며 "육체가 내가 아님에 대해서 알아차려 깨어나는 순간, 순간, 찰나지간에 깜짝 놀라게 될 뿐이다. 그리고나서 또 웃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빛을 보거나 깜깜함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비몽사몽간에 아는 앎이 아니다. 정신이 차려진 상태에서의 분명한 아차림이다. 진리에 대한 깨우침이다.
이 사람이 존재하는 동안에 공부의 정도를 확인받을 수 있다.
어느 누구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글을 충분히 읽고 이해하면서는 주력, 주의집중력을 길러야만 된다.
공부의 진행 속도가 빠른 사람들의 경우를 보니... 그들은 이곳을 알기 이전에 이미 명상이나 종교, 마음수련 등의 단체에서 정신집중의 힘이 길러졌던 인물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자동차를 본 적이 없는 인디안이 자동차의 운전을 할 수 있겠는가?
자동차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운전을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와 이 한글을 안다고 하여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해석될 수도 없다. 불경에 대해서 수천년간 연구를 해오고 있지만 그들은 아직도 불경의 내용이 생각의 작용에 대한 설명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영원한 생명, 새생명, 안심입명에 들고자 한다면...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갈망한다면...
행복하고 자유하기를 소망한다면...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면...
지금 두드려라.
두드리면 열릴 것이며 구하면 구해질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두으려라.
자신의 마음을 이겨서 승리하는 자가 되어라.
그것이 진정한 자유와 평화의 길이며 영원한 삶의 길이다.
그대가 고급 수행자라 할지라도 깨달음의 입문과 실천을 통해서 기본과 생각의 이치와 속성에 대해서 관념으로나마 이해해야만 한다.
그대의 나, 자성, 본성, 순수의식...
그것이 모든 것의 기원이다.
무엇이 두려운가.
걱정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하라.
그대의 자성. 그것이 우주의 창조자임을, 신임을 망각하지 말라.
진리.
그것이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