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성과 불성, 순수의식, 우주의식... 노자의 도, 아트만, 신, 참 자아, 참 나... 부처, 도인... 모두 같은 뜻의 다른 표현들이다.
불교라는 종교를 통해서 전해져온 말들이 너무도 많아져서 혼란스러운 것일 뿐이다.
진리는 단순하다.
나와 나로써의 나, 내 안의 나이기에 한 생각의 차이이다.
육체가 나다, 라는 앎이 무지의 시작이다.
지식이 입력되기 이전, 아이의 행위에서 그것, 자성을 엿볼 수 있다.
내가 괴롭다, 내가, 힘들다, 내가 기쁘다, 내가 슬프다... 등의 내가라는 생각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행위에 대해서 무위, 무위자연으로 표현된 것이다. (생각의 이치와 속성에서 참고... )
자성, 불성, 부처, 도인 등으로 표현되는 말은 불교를 통해서 전파된 말이며 반야심경을 비롯한 불경의 모든 내용들이 생각의 미묘한 이치에 대한 방편설이다. 육체는 생각없이는 행위될 수 없는 순수한 도구지만 "육체가 나"라는 앎의 오류를 시작으로 하여 아는 모든 앎, 지식에 의해서 인간은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대의 내가 아는 모든 앎, 지식은 또 다른 의심의 시작이다. 그대가 아는 앎, 모든 지식들은 의구심이 아닌 것이 없다.
나는 왜?
너는 왜?
사람의 기원?
지구의 멸망?
아무것도 없다는데, 왜 있는거야?
붓다 고타마의 생각의 미묘한 이치를 알아차림으로써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수행에 대한 가르침이 인간의 욕망을 대리 만족하게 하기 위한 종교로 변질되면서 손오공을 비롯한 수많은 신비의 세계가 창조된 것이다. 욕망은 결코 만족으로 해결될 수 없으며 마음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가르침임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불경의 모든 내용이 함축되었다는 반야심경에는 자성, 즉 자아의 본성에 대한 표현들이 여러가지의 사례를 들어 중복 기록되어 있다.
육체에 얽매임에서 벗어난 정신으로도 표현될 수 있으며 육체가 내가 아님의 뜻인 무아(無我)라는 낱말로 표현되었기에 에고의 상상을 넘어서 있으나, 이곳의 설명을 통해서 관념으로나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라는 말에 대해서 자성에는 생명도 없으며, 성별도 없으며, 생로병사도 없으며 희로애락도 없으며....... 불생불멸이라는 말이다. 언어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관념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다면 올바른 앎이다.
예수의 가르침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성경이 히브리어? 로 기록되었다고 전해지지만 그것이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나마 진리, 즉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불이일원론을 연설했던 인물들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단체는 석가모니와 노자와 장자, 그리고 예수를 믿는 단체들이며 나머지 모두는 논리, 이치에도 어긋난 환상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 들이다. 참고로 모든 종교 및 유사 단체들은 사이비도 아니며 사이비 아님도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모든 종교 및 단체의 가르침에서는 진리의 본질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이지만 해석될 수 없기에 이해를 넘어서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예수는 자성에 대해서 "어린아이처럼 순수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라는 말로써 순수의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진실로 말하노니, 사람이 거듭남이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며 성령이다, 라는 말로써 존재의 거듭남에 대해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네 안에 하나님이 있으며 하루종일 기도하여 깨어나는 날에 대해서 "그 날"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라는 말(불이일원론)로써 일념을 통한 삼매에서는 네가 곧 하나님, 창조자, 절대자라는 사실에 대해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예수는 순수의식에 대해 태어난지 일 주일 되는 아이를 사례로 듦으로써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는 시절에 대해서 순수의식으로 표현했다.
노자와 장자는 "도"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도"는 모든 것의 기원이며 언어로 표상할 수 있는 도는 참다운 도가 아니라는 말로써 "자성"이 그것임을 연설하였다.
우상숭배사상으로 변질되었으나... 예수를 신뢰하는 집단에도 기원 전부터 깨달음을 성취한 인물, 진리를 연설했던 인물들에 대해서 선지자(아담, 이스마엘, 야곱, 예수, 등) 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오고 있으며 고타마 붓다, 즉 석가모니를 신뢰하는 집단들 역시 과거 7불을 시작으로 하여 달마대사, 혜능선사 등의 많은 인물들이 그것의 본질에 대해서 연설한 바 있다.
우상숭배, 종교와는 상관이 없으나 그것(참 나, 아트만, 자성)에 대해서 분명하게 연설했던 인물들도 있었다.
인류의 스승, 성자로 알려진 소트라테스와 아인슈타인, 그리고 라마나 마하리쉬, 헤르만 헷세, 까비르 등이며 이곳 깨달은 자의 각성론에 설명된 인물들과 다르지 않은 연설을 하였다.
자성이라는 말은 자신의 본성이라는 말이며 본성이라는 말은 경험이전, 또는 경험과 분리된 순수한 의식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경험과 분리된, 또는 경험 이전이라는 말은 "육체가 나"라는 앎이 일어나기 이전, 즉 나라는 생각 이전의 상태이며 언어를 인식하기 이전으로써 언어, 말, 지식이 없는 상태로 설명될 수 있으나... 나라는 생각이 있는 한은 그것에 대해서 상상하거나 짐작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에 대해서 기억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것과 다르지 않기에 셍각이 끊어진 상태로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그들, 지인, 도인, 부처, 신, 성령... 등의 수많은 말로 변질되었기에 본질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 없으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이다.
그들의 가르침은 인간,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올바른 길에 대한 연설이라는 것이다.
"께달음의 실체를 밝힌다"라는 저서와 이곳의 글들을 통해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사람, 인간, 인류는 오직 진리의 길을 통해서만이 행복과 자유,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히서.... 자유와 평화 행복이라는 것이 욕망을 채워야만 된다는 그릇된 앎에 의해서 나를 인식한 다음부터 죽을 때까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싸워서 이겨야 됨을 당연시 하고 있으며 그렇게 살아왔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음에 대해서 당연시하고 있기에 죽음 앞에서는 고통과 회한만이 남는 것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욕망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살았던 모든 사람들... 그들 모두는 죽음 앞에서 "나는 기쁘다", 나는 행복했으며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라고 말할 수 없다.
행복, 자유, 평화를 목적으로 살아왔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대는 행복, 자유, 평화라는 말에 대해서 정의할 수 있는가?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부자가 되면 행복과 자유 평화가 있으리라는 그릇된 앎에 의해서 고통을 겪는 것이다.
행복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아마존 강 유역에서 금을 캐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황금을 발견하고 금을 소유함으로써 행복해 한다.
목숨을 걸고 금을 채취하여 미래의 행복을 꿈꾸지만... 그들은 죽을 때까지 주머니 가득 황금이 있지만 더 많은 황금을 모으기 위해서 평생동안 노동을 하다가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황금에 눈이 멀었던 자신의 비참한 삶에 대해서 알아차리게 된다.
혹시 그대의 삶이 그렇지 아니한가?
고귀한 인생의 목적이 한낱 재물, 지식, 명예에 대한 욕망으로 다른 나들과의 경쟁, 투쟁을 위한 삶은 아닌가?
사람으로 태어난 목적이 그것이란 말인가?
그대의 삶이 오직 나를 위한 삶이며 그 삶은 다른 나들과의 논쟁, 투쟁 전쟁과 다름 없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대의 후손들에게 그렇게 싸우고 이겨서 승리하라고 가르칠 것인가?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란 말인가?
똑같은 사람, 사람,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이겨서 승리하기 위해서, 다른 나를 짓밟기 위해서 사는 삶이 참다운 삶이란 말인가?
그러한 삶이 죄이기에 기도해야만 한단 말인가?
누구에게???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욕망을 채워서 만족할 수 없다.
수 천년의 역사를 보더라도 욕망을 채워서 행복과 평화, 자유를 찾은 사람은 없었으며 앞으로도 있을 수 없다.
그런것, 자유의지라는 것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의 길을 가라.
오직 그 길을 가는 과정에서 그대는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참된 기쁨, 자유와 평화.... 그것을 느끼는 나가 아닌, 그것과 하나된 그대의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상의 길이며 진리의 길이다.
깨달음. 그것에 목적을 두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 또한 욕망이며 그것에 목적을 둔다면 그것은 또 다른 환상을 창조하기에 더 큰 고통만이 가중될 뿐이다.
그렇기에 서두르지 말고 이 순간, 순간을 살아 가라고 하는 것이다.
현상세계와 깨달음의 세계와의 차이는 경험에 바탕을 둔 지식으로 아는 앎인 욕망(생각, 마음)에 이끌려 사는 세계와 일념의 공부를 통해서 아는 세계, 즉 지식으로 이해하거나 해석될 수 없는 앎, 통찰의 지혜를 증득함으로써의 삶의 세계와의 차이이다.
다만 일념에 의해서 얻어지는 참다운 앎인 지혜는 지식으로 설명되거나 해석될 수 없기 때문에 무상심심미묘법 등의 신비로운 세계로 전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각의 미묘한 이치에 대한 이해로써 사람이면 누구나 그 길을 갈 수 있다.
그대의 자성, 그것이 부처이며 모든 것의 기원이며 하나님이며 성령이다.
그것에 대해서 아트만, 브라흐만, 참 나, 신.... 등의 수많은 이름들이 지어진 것이다.
기억된 낱말들... 언어, 말이 없는 새로운 것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는가?
언어, 말, 말, 말 없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외계, 다른 세상? 영혼? 하나님? .......
그대의 나, 자성, 그것이 모든 것의 기원이다.
그것이 창조자이며 절대자이다.
생각, 생각, 생각... 자신의 자신도 모르게 흐르며 생로병사. 희로애락을 반복 순환. 윤회하며 고통을 만들어 내는 생각, 그것은 그대의 참 나, 자성이 아니다.
나라는 생각, 이전의 나, 자성... 그것이 모든 것의 기원이다.
그것이 나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음.
그것이 신이다.
인류의 자유와 평화, 행복... 오직 그 길에서만 그것과 하나되는 것이다.
진리. 그것이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