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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유상 삼매 / 무상삼매

일념법진원 2010. 5. 7. 08:25

도원의 글.

삼매의 올바른 경험이다.

그런 상태에 대해서 유상삼매라는 말로 표현되는 이유는 삼매를 경험하는 경험자인 나가 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는 나, 또한 내가 아니며 일체가 생각의 환상물질임을 깨우치게 될 것이며 그것에 대해서 "불성", "성령", "아트만", 신. "참 나", "참 자아", "자성", "순수의식"... 등의 낱말로 표현되어 전해지는 것이다.  

 

국어 사전에는 삼매라는 낱말에 대해서 한 가지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일심불란의 경지로 표기되어 있으며 불교용어 역시 三昧로써 석 삼자와 새벽 매자로 표기되어 있다.

불경의 자등명이라는 말과 법등명이라는 말에 대한 집착으로 참선을 통해서 삼매를 경험했다는 사람들... 그들은 명상중에 어떤 빛을 보았다며 삼매를 말하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무속인이거나 종교인들이 기도를 통해서 경험하는 꿈과 같은 환상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나라는 생각". 그것은 윤회의 습관에 따라서 필사적으로 일념을 거부해야만 하며 그 이유인 즉, 일념의 유지는 에고, 즉 나라는 생각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한글로 삼매라는 낱말에 대해서 정의하자면... 일념. 즉, "나는 누구인가"라는 한 구절의 생각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태이다. 

앞서 소개되었던 "도원"의 경험과 같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일념 중에 어떤 생각이 일어남을 알아차림과, 일어난 생각이 에고의 망념이라는 것을 앎에 웃음 지을 수 있는 정도에 대해서 최고 높은 경지의 유상삼매라는 말로 정의될 수 있다. 

 

수행의 초기에는 홀흡을 관찰하는 일, 또는 행위를 관찰하는 일, 또는 몇 구절 진리의 말을 암송하는 일, 숫자를 반복해서 헤아리는 일... 등으로 시작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일념집중의 상태가 한 시간 가량 이어질 수 있다면 이 또한 유상삼매이다. 

 

일념공부를 시작할 때에는 망념중에 일념, 한 생각인 나는 누구인가, 라는 생각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시작될 수밖에 없다.

도원의 경험담 중에서 일념화두를 시작하는 단계에서 일념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 시계의 초침을 보며 초침에 집중하면서 1초에 나는, 2초에 누구, 3초에 인가... 라는 방법으로 시작하였다는 말이 있다.

시계의 초침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알아차림이 있었다면... 생각. 생각, 생각... 그것이 내 생각이지만 결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분명한 인식이며 참다운 앎이다. 내 생각이지만 생각을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앎은 마음, 마음, 마음이라는 것의 실체에 대한 앎과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마음 속은 알 수 없다는 옛말이 있듯이 찰라지간으로 변해만 가는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 에고의 삶이기에 생로병사의 고통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이일원론으로 표현된 마음의 실체에 대해서 연설했던 인물들, 그들이 사람, 인류에게 전하고자 했던 가르침의 핵심이 바로 생각의 미묘한 이치와 속성이며 마음의 미묘한 작용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에 대해서 진리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며 인간, 인류의 자유와 평화는 오직 그 길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더라도... 수천억명의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고를 반복해 왔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반복되고 있지만... 삶과 죽음, 그것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치앞도 알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갑자기 천재지변, 인재에 의해서 수십명, 수백명, 수천명이 사라지기도 하지만... 세상 어느 누구도 죽음 앞에서 까지 나는 기쁘다, 나는 불행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라고 말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극 소수의 인물들이 있었을 뿐...

 

인간, 사람은 누구나 그 길, 진리의 길을 갈 수 있다.

수행자 "도원"의 경험담과 같이 일상의 삶에서 일념의 공부를 통해서 나와 에고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듯이... 깨달음. 그것 또한 열정만 있다면 누구나 가능한 것이다. 다만 일념을 통해서 아는 앎, 지혜에 대해서는 말로 설명될 수 없으며 설명을 하더라도 경험된 지식으로써는 이해될 수 없기 때문에 신비의 세계로 표현될 수밖에 없으나, 지식과 참다운 앎의 차이라고 설명한 바와 같이 일념에 의해서, 순수의식에 다가감으로써 알아차리는 참마운 앎은 기쁨이며 참다운 앎에 의해서 진정한 행복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한 생각의 깨우침으로 행복과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기에 진리이다.

진리와 행복, 자유, 평화는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마음은 누적된 생각의 찌거기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였다.

마음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순수의식에서부터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앎, 지식들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이며, 에고의 모든 앎, 지식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또한 언어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진실될 수 없다고 하였다.

 

깨달음이라는 낱말로 표현되는 모든 말, 낱말들은 한자, 또는 외래어를 한글로 해석하는 수준을 벗어날 수 없으며 종교를 통해서 알려진 경전들의 해석 또한 에고의 지식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음은 당연할 것이다. 이해와 오해를 비롯한 상대적인 모든 말들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깨우칠 수 있다면... 그것이 진리이다.

 

유상삼매와 무상삼매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우물물에 가라앉아 있으나 끈에 묶여 있는 두래박과 끈이 끊어진 두레박으로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자 "도원"의 경험과 같은 높은 경지의 유상삼매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이나 근심 걱정이 사라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가족에 대한 애착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완전함에 대한 갈망이 더 큰 정도로써 고통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님에 대해서 알지만 아는 것이 아님으로 표현될 수 있기에 물에 잠겨있는 두레박이지만 두레박의 줄이 끊어지기 이전의 상태로 표현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에게는 없는 것이 아니다. 

일념의 집중된 상태가 하루종일... 시간과 공간이라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일념의 경지... 즉 몇 날, 몇 말 동안 오직 일념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만이 면면히 이어지게 되면서는 일념, 그것이 스스로 알아서 오직 한 길을 찾아가게 된다. 일념의 힘에 의해서 의심의 근원으로 이끌어가게 되는 상태... 이에 대해서 신이 이끌어 간다, 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며 궁극에 이르렀을 때에 비로소 "육체가 내가 아니라는 알아차림, 앎으로 깨어나는 것이며, 이에 대해서 무상삼매라는 말로 표현되는것 같다.

 

무상삼매는 우물물 속에 잠겨있는 두레박이지만 두레박을 끌어올릴 수 있는 줄이 끊어진 상태이기에 다시는 에고로 돌아올 수 없다.

 

누차 강조하는 말이지만... 깨달음. 그것에 잡착하여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나라는 생각, 마음, 욕망, 집착... 그것들에게 일념은 죽음과 같이 두려운 것이기 때문에 앞서 설명된 경우((갑자기 깜깜함의 경험))와 같이 깨달음에 집착하여 조급한 마음으로 일념공부를 하게 되면 마음은 집착했던 낱말들에 대한 환상을 창조함으로써 필사적으로 일념의 유지를 막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채널링, 외계의 세계, 기의 순환, 귀신과 악령, 조상신, 천신, 지신, 용왕신, 하늘나라, 천국과 지옥, 성령, 하나님, 부처님, 영계, 영혼... 등의 모든 환상의 세계에 대한 경험은 일념을 거부하기 위한 마음의 작용에서 비롯된 것이며 꿈과 같은 환영에 불과한 것이다.

 

이 사람의 글을 통해서 공부를 하던 사람들에 대한 사례를 통해서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이 공부, 일념의 공부는 서둘러서도 아니되며 게을러서도 아니된다는 말에 대해서, "깨달음의 실체를 밝힌다" 라는 저서에서는 송아지 한 마리를 길들이는 데에도 2년은 걸리는 것이니 절대로 서둘러서는 아니된다, 라는 구절이 있을 것이다.  

스스로 공부를 지어 나가다가 길을 잃어 고통에 몸부림쳤던 사람들이 저서를 만남으로 하여 바른 길을 가던 중에 깨달음에 집착하여 서두르다가 환상을 보았던 사례이다.

 

"깨달음의 실체를 밝힌다"라는 저서에서 --- 일념의 무념처에 대한 설명이 있으며, 무념처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은 일어나지 않고 오직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만이 면면히 이어지는 상태이며, 그것에 대해서 "깜깜한 어두움" 이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 같다. 

자등명이나 법등명에 대해서는 이곳의 설명을 통해서 미리 알고 있었기에 삼매에서 빛을 보았다는 말에 대해서 웃어버릴 만큼 공부가 깊어진 상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깜쌈한 어두움"이라는 말을 염두에 두고 그 말에 집착하여 일념이 아닌 일념에 들었던 결과... 밤도 아닌 대 낮에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는 경험을 하였기에 "나는 깨달았다"라고 한다는 것이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했던 시간이 짧았던 사람, 그리고 깜깜했던 시간이 전자보다 좀 더 길었기에 깨달았다는 사람은, 운전을 허던 중에 갑자기 눈앞이 깜깜하여 깜짝 놀라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깜깜함에 대한 경험은 무속인의 산신, 또는 광신자, 맹신자들의 방언, 천국이나 영계를 보았다는 경험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 그것은 지식으로 아는 앎과 일념에 의해서 알아지는 참다운 앎과의 차이이다.

께달음. 그것은 문자가 없었던 시대의 말들이 구전으로 전해지면서 에고의 욕망에 의해서 변질되고 왜곡되면서 종교 나부랭이들과 신들이 창조된 것이다. 

노자와 장자, 그리고 예수와 싯다르타, 소크라테스, 아인슈타인, 헤르만 헷세, 상카라... 등의 불이일원론을 연설했던 인물들의 말이 다르지 않음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다면 깨달음. 그것의 실체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와 평화, 그리고 행복... 그것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살아왔던 사람들의 경험으로 보더라도 욕망을 채움으로써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마음 밖에서 어찌 마음을 찾을 수 있겠는가?

자유와 평화, 안심입명.... 오직 일념에 의해서 그것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진리의 길, 무상의 길, 참 자아의 행방을 찾아 나서는 일.

나, 그리고 인류의 자유와 평화을 위한 일이며 진정한 행복을 찾는 일이다. 

그대의 나. 그것이 모든 것의 기원임을 알아차림이 깨달음이다. 

진리의 길이기에 道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나의 말을 듣고 옳거든 그 길을 가라.

진리의 길이며 새 생명의 길이다.

진실로 말하노니, 사람이 진리로 거듭남이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며, 성령이다.

그대의 자성, 순수의식... 그것이 불성이며 부처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

 

http://cafe.daum.net/husimwon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