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라는 말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으며 지식과 지혜의 앎의 차이와도 다르지 않음에 대한 설명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이해와 오해에 대한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라는 말은, 소위 옛말에 "서울에 다녀온 사람과 서울에 다녀오지 않고 서울에 대해서 말을 들었던 사람과 싸우면 서울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이긴다" 라는 말과 같은 뜻이며, 이는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의 지독한 아상을 드러냄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어릴적부터 그렇게 세뇌(길들여진, 버릇)된 탓이지만, 생각의 미묘한 작용의 한 단면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다면 현명한 자이다.
어릴적 부터의 길들여진 버릇이라는 말의 뜻은 누구나가 그러하듯이... 태어남 이후 성장 과정을 통하여 "나"(육체가 나. 육체=나)를 인식하면서부터 끊임없이 나와 대상과의 비교 분별을 통해서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이 그 원인이다.
자아의 나는 지식이며 앎이다.
나라고 아는 모든 것은 타인들로부터 들거나 보거나, 느낌 등의 감각기관의 작용에 의해서 아는 것이 "나"기 때문에 "나"는 경험에 바탕을 둔 기억(지식)이며, 나의 모든 앎(이름, 나이, 지식, 앎)이 누군가로 부터 들어서 아는 것이기에 참다운 앎이 아니라는 뜻이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다녀와서 서울에 대해 아는 사람과, 서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 서울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의 앎에 대해서 제 삼자가 듣는다면 누가 서울을 아는 사람인지 구분할 수가 없을 테지만... 당사자들 만은 분명히 안다.
서울엘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자신의 앎, 지식이 옳다고 주장한다면 서울에 다녀온 사람은 굳이 그의 말에 대해서 끝까지 논쟁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리 알던 말던 상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의 모든 일들이 그러하다.
몇 몇의 사례를 든다면... 쇠를 녹이는 용광로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뜨겁다는 말과 차를 끓이는 물의 뜨겁다는 말의 차이로 비유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사례들은 모든 사건에서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극박한 상황, 즉 죽음의 문턱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과 그 상황을 상상하여 이해한다는 사람과의 차이 또한 이해한다면 오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의 마음을 모르면서 타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사람...
일념의 뜻, 생각의 이치에 대해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道", "불법"에 대해서 옳다, 아니다... 등의 논쟁을 넘어서 투쟁, 전쟁을 일삼는 사람들의 어리석음...
그들의 삶이, 논쟁, 투쟁 전쟁을 일삼는 삶이 에고의 삶이 아니겠는가?
무엇을 위하여?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논쟁, 투쟁, 전쟁을 해야만 한단 말인가? 허허헛
어떤 부류는 예수의 말만이 진리이다, 라고 주장하며 어떤 부류는 석가모니의 말만이 진리이다, 라고 알며 이를 당연시 한다.
자신들이 믿는 신, 그 신만이 옳다며, 진리라며 목숨까지도 불사해가며 전쟁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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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지혜의 차이가 이와 같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개체적 자아가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앎이며, 지혜라는 말은 무지의 반대되는 뜻이 아님에 대해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라는 말은 생각의 이치에 대해서 납득한 이후에 일념, 일념, 일념을 통해서 스스로 알아차려지는 앎을 뜻하는 말이며 이에 대해서 깨달음의 세계, 깨달음의 지혜, 붓다의 지혜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비근한 예를 든다면...
기독교의 방언이라는 말이 이와 같은 뜻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곳 카페의 글을 통해서 일념을 공부하여 지혜를 증득해 가는 인물들에게는 신, 하나님, 억겁의 전생, 윤회, 영혼, 사자의 서, 사후의 세계, 체널링, 천국, 지옥 등의 모든 말들이 실체가 없으며 실재하지 않는 말, 말, 말로 만들어진 소리임에 대해서 당연시 하는 참다운 앎이 드러나며... 수행의 경지?... 일념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서 더욱 더 분명한 앎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명색의 이치라는 말로 설명되었다.
카페의 글들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은 말들이다.
처음 글을 접하게 되면서는 이해할 수도 없으며 단 한 구절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 수 없기에 답답하기만 하여서 "그런데요" 라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으나... 글을 반복하여 읽어 나가면서 일념을 공부하게 된 이후에야 비로소 그 뜻을 알아차리게 됨에 따라서 홀로 웃는 일이 많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똑같은 한국말임에도 불구하고 일념을 깨우친 인물들의 앎과 지식으로 아는 앎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와도 같으며 경험된 사고방식의 지식으로써는 아무리 설명을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독교의 "방언"이라는 말이 창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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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 바탕을 둔 지식은 많으면 많은 만큼 세분화된 분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일념을 통해서 알아지는 내면(순수의식에 다가감으로써)에서 드러나는 앎이 참다운 앎이다.
참다운 앎은 일념의 길어짐에 따라서 고통과 괴로움의 원인이 분별과 욕망,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지혜가 드러남과도 다르지 않은 것이며 조금씩 더 깊어지면서는 언어, 말, 말, 말의 근원에 다다르게 되며, 또한 모든 의심의 근원에 이르게 된다.
일념을 통하여 의심의 근원에 다다름에서 비로소 "아무것도 없는 것"의 완전함에 머물게 되는 것이며 이에 대해서 소위 "깨달음, 부처, 불성, 성령, 하나님 나라, 천국, 불생불멸, 생사자유자재, 영생"등의 이름이 지어진 것이며 이에 대해서 노자와 장자는 "도"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며 "모든 것의 기원"이라고 표현했다.
말, 언어 없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말, 언어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며, 세월이 가는 것이 아니다.
우주가 나는 우주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세상이 내가 변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월이 내가 간다고 말하느 것이 아니며,
자연이 내가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부처님, 등의 신들이, 형상들이 행위하는 것이 아니다.
행위하는 것은 오직 인간의 마음이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 또한 인간의 마음이다.
세상... 인간의 관념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 그것에 대해서 상상해서는 아니된다.
그것 또한 그대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의 상태... 그것은 그대가 깊이 잡들어 있는 상태와 유사할 뿐이지만... 그대는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존재하고 있었으나 그 상태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도 없으며 기억할 수도 없다.
비유일 뿐이다.
깊이 잡들어 있는 동안... 무엇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동안에는 그대의 나도 없었으며, 시간도 공간도 세상도 없었다. 없었다라는 생각도 없었으며... 없었다, 라는 말도 없었다.
없는 것도 없었다고 표현한다 하더라도 말, 말, 말 만은 남는다.
이에 대해서 주체가 사라진 상태라는 말로 설명하였다.
주체가 없기에 객체가 없지만... 그것을 상상할 수 없다.
오직 일념, 일념, 일념을 통해서... 무상삼매에서 그것을 경험할 수 있지만...
경험과 동시에 그곳에는 주체가 없기에 경험자가 없다.
수행자가 경험을 하지만... 경험자는 내가 아니다.
거기에 개체적 자아인 "나"라는 것은 없다.
이에 대해서 無我라는 말이 창조된 것이지만...
육체가 나, 라는 앎도 안다는 생각이며,
육체가 내가 아니라는 앎 또한 아니라고 안다는 생각이다.
그러니 언어로 표상할 수 있는 도는 참다운 도가 아니다, 라는 말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대의 참다운 나, 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으나...
언어는 상대적이기때문에 어떤 말로도 정의될 수 없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며, 소리와 형상으로써는 여래를 볼 수 없다는 말의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일념, 일념, 일념... 그것이 그곳에 데려다 줄 수 있을 뿐이다.
진리. 그것이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