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대한 이해.
생각에 대해서 이해한다면 생각에 대해서 이해한다는 또 다른 생각일 수밖에 없다.
글을 이해한다고 하여 생각의 이치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며 자칫 정진병자가 될 수밖에 없기에 생각(망념)으로 생각을 이해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행위는 일반적으로 극심한 정신질환을 겪게되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유체이탈이나 체널링 등, 환상의 세계((마음의 장난, 꿈, 신들림, 마음이 없다는 사람들, 자신은 내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사람들, 등... ))에서 내가 안다, 라는 상을 내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은 자신의 생각을 관찰하여 생각의 흐름을 안다고 말하며 신들린 사람과 같은 상식을 벗어난 행위를 서슴치 않는다.
사념, 망념(생각)으로는 생각을 헤아릴 수 없으며 오직 일념에 의해서만이 생각, 즉 생사이치에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육도윤회라는 말은 안이비설신의로 표현되는 눈과 귀, 코와 혀, 촉감과 의식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의 반복 순환함에 따라서 생각이 행위함을 뜻하는 말이며 이에 대해서 생각의 윤회라고 설명하였다.
정념이라는 말은 일념을 뜻하는 말이며 망념이라는 말은 자신도 모르게 감각기관을 바탕으로 흐르는 생각을 뜻하는 말이다. 생각의 연속성, 영원성에 대해서 설명한 바와 같이 생각, 망념은 감각기관을 바탕으로 하여 찰나지간으로 반복 순환하며 흐르기에 그 실체를 알아차릴 수 없으며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꿈과 같이 흐름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나라는 생각. 그것은 잠에서 깨어나면서는 잠들기 전, 또는 잠든 사이에 흐르던 생각(망념)을 기억하면서 다시 윤회하기 때문에 스스로 흐르는 생각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는 없다.
생각, 그것은 한 생각, 한 생각이 찰나찰나 생과 멸을 반복하지만 점과 점으로 이루어진 점선을 연상해서는 아니된다. 한 생각 한 생각의 이어짐이지만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원형으로 이루어진 선과 같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이기에 생각과 생각의 사이는 빈 틈이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일념에 의해서만 그것의 실체에 대해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생각에 대해서 연구하거나, 생각의 비밀등의 글에 대해서 고뇌했던 사람들은 이곳의 글들을 통해서 생각의 이치에 대해서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나... 글을 이해한다고 하여 일념의 수행을 더 잘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생각(망념). 그것은 나라는 생각이며, 나라는 생각은 육체가 나다, 라는 생각이기 때문에 생각의 이치를 이해하는 것과 일념을 유지하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며 생각에 대해서 고뇌하던 사람이 일념을 통해서 깨우칠 수는 없다.
육체가 나다, 라는 생각(망념)에 대한 일념의 이어짐, 즉 삼매는 자신의 나(육체)를 죽이는 일과도 같기 때문에 생각, 망념은 생각에 대해서 깊이 숙고하면 할 수록 더욱더 영악해져 가는 것이며, 이는 셍각의 이치를 모르는체 부처가 되겠다는 욕망이 앞선 상태에서 억지로 화두를 들고 수행하던 수행자들이 생각의 이치를 이해한다 하더라도 결코 일념공부를 지속할 수 없는 경우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석가모니의 말이 왜곡되어 전해지는 팔정도라는 말이 있다.
생각의 이치에 대해서 납득할 수 없는 사람, 사람,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여덟가지의 올바른 생각을 뜻하는 말이지만 팔정도는 일념을 뜻하는 말이다.
자신의 생각을 관찰하려 한다면 그것은 쓸모 없는 짓이며 가장 큰 어리석음이다.
생각을 관찰한다 함은 "내가 내 생각을 관찰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임과 같이 생각으로 생각을 관찰할 수는 없는 것이며 생각의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의 어긋난 수행의 결과들이, 하루종일 생각이 흐르는 대로 주절주절 말을 하는 사람들, 또는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한다고 말하며 자신은 자유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붓다 고타마는 바라문교의 교리에 따라서 수행 초기에 육체에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하였으며 홀로 자신의 호흡을 관찰하는 방법과 자신의 행위를 관찰하는 등의 위빠사나로 알려진 방법으로 수행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붓다 달마에 의해서 화두에 의한 공부의 방법이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듯 하다.
위빠사나라는 방법은 호흡을 관찰하거나 자신의 행위를 관찰함으로써 생각(망념)의 흐름을 억제하기 위한 방법이며 주력으로 알려진 집중력의 향상을 위한 방법이다.
일념 화두를 들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이해함이 올바른 이해일 것이며 종국에는 일념화두에 의해서 의심의 근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정도를 주장함은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자신의 앎만이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의 앎은 오도란 말인가?
올바른 앎이란 정도도 없으며 오도도 없음에 대해서 아는 앎이다.
오직 일념, 일념, 일념에 의해서 의심의 근원에 이를 수 있을 뿐이다.
생각의 이치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아는 앎이 다가옴에 대해서 옛 선사들은 견성이라고 하였다.
자신도 모르는 마음.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 생각, 생각... 그것에 대한 이해와 함께 글을 반복해서 읽어나감에 따라서 집중력이 향상되는 것이며, 오직 진리에 대한 생각을 함으로써 망념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일념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병행되었을 때에 비로소 참다운 앎이 다가오는 것이며 그 기쁨은 일상에서 얻어지는 욕망을 채움에 대한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과 평화가 함께 다가오는 것이다.
일념, 일념, 일념.... 그것이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기에 무상의 길이며 진리의 길이며 道라고 이름지어진 것이다.
그대의 참다운 나, 진정한 나, 그것이 유일신이며 모든 것의 기원이다.
진리. 그것이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