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지속적인 학습에 의해 지식이 축적되면서 육체에 대한 집착은 더욱더 강해지며 죽음이라는 낱말에 대한 뜻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태어난 이후에 처음 일어났던 ‘육체=나다,’ 라는 생각과 ‘나는 죽을 것이다,’ 라는 생각은 고정 불변의 관념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지금의 자아, 즉 지성체이다.
죽음이라는 낱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철부지 시절에는 미래에 대한 근심이나 걱정 따위가 있을 수 없었다.
인생이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왜 살아가는지?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고뇌하던 시절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었지만 부모의 간섭과 사회에서 제시하는 이상의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한 채찍질에 의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경쟁사회의 일원인 사회적 동물로 세뇌되어버린 것이다.
나의 뜻이지만 나의 뜻이 아니며 부모의 뜻이지만 부모의 뜻도 아니며 현상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회적 동물로 길들여진 것이며 성공을 위한 투쟁하는 삶에 대해서 의심조차 할 수 없는 당연함으로 세뇌 당해버린 것이다.
스스로 지성 체가 된 사람들은 규정을 만들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가 투쟁하는 삶을 살아감을 당연시 하면서도 서로가 죽고 죽이는 싸움만은 하지 말자고 약속하였으며 이것이 헌법이라는 것이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서로가 경쟁해서 이기는 자는 성공이며 지는 자는 실패자다, 라고 세뇌된 것이다. 싸우고 경쟁하여 이겨서 성공하는 사람이 행복할 것이다, 라고 당연시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싸우고 승리하여 행복하거나 평화로운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이기에 절대불변일 수밖에 없는 가장 깊은 고정관념은 육체가 나이며 나는 죽을 것이다, 라는 앎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도 욕망을 버릴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순수의식의 기쁨을 망각함에 따른 것이며 자연으로의 회귀하고자 하는 본능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을 통해서 순수의식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면서, 나와 현상계를 인식하기 이전의 짧은 시간 동안이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의 기쁨을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으되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육체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인간의 생명이 영원하다면 인간은 부질없는 욕망 따위에 이끌려 다니지 않을 것이며 항상 자연과 같은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은 결코 만족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는 수 천 만년 동안 살아왔지만 욕망을 채움으로 만족하여 죽음 앞에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인간의 욕망은 세뇌에 따른 관념화된 습관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며 학습된 경험에 의해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마 그럴 것이다, 라는 세뇌의 결과이다.
미래에는 행복과 평화가 있을 것이다, 라는 거짓된 세뇌.
세뇌에 의해서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가지만 미래의 그곳은 죽음일 뿐임을 모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대의 마음이 우주 너머의 어디선가 ‘툭’ 하고 떨어진 것이 아닌 것임을 이해할 수 있기 바란다.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자신만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나머지의 삶을 기쁨으로 존재할 수 있기 바란다.
*** 2차 에고의 탄생 ***
2차 에고는 아장, 아장 걸어 다니던 아이가 어느 날 “나도 할 수 있어” 또는 “내가 할 거야”라는 말을 시작함으로써 나를 인식하는 시점을 전후로 정의할 수 있다. “내가 할 거야”라는 나(육체가 나라는 생각)를 인식하기 이전에도 그림책을 통해서 배웠던 여러 가지의 말들을 할 수 있었다.
대상과 이름과의 동일시에 대한 습관에 의해서 마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며 마음이 강을 이룸과 같이 마음이 형성됨이 2차 에고의 탄생이다.
2차 에고라는 말은 이름과 형상의 동일시의 습관에 따른 창조를 설명하기 위한 표현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상물질과 이름과의 동일시를 뜻하는 말이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모든 이름(우주 삼라만상)들은 2차 에고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이것=땅, 저것=태양” 등의 대상과 이름에 대한 동일시가 습관이 되면서 “육체=나다,”라는 동일시가 확립되기 시작하는 시점이 2차 에고의 탄생이며 현상계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이름으로 창조한 것이 2차 에고인 ‘나라는 생각’이다.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實在)가 아니라는 말은 감각기관으로 보고 느끼는 모든 것들의 근원이 ‘아무것도 없는 것’ 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이것이다, 저것이다, 또는 다른 것이다, 라고 이름 지어 분별하지만 끝없는 분별을 하지만 그것들의 본질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육체가 나다, 라는 그릇된 인식(과념)에 의해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이름 지은 것이며 과학에 의해 밝혀진 바와 같이 우주 삼라만상을 비롯한 인체(人體)의 분석 결과는 아무것도 없는 것, 즉 무(無)이다.
육체가 나라는 그릇된 앎으로 착각하는 것이기에 집착과 욕망에 의한 고통이 따르는 것이며 육체가 나다, 라는 고정관념에서 깨어나면 고통이나 슬픔 고통과 괴로움은 꿈과 같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기에 ‘도’를 깨우친 인물들은 사람들에게 미묘한 생사이치를 깨달아 “꿈에서 깨어나라”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삶, 인생이라는 것이 지나고 나면 후회와 회한만이 남는 꿈이며 환상이기에 참 자아의 본성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의 삶을 통해서 부질없는 욕망에 집착하지 말고 일념에 의한 고요함의 기쁨으로 존재하라는 것이다.
생각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생멸을 반복 순환하는 망상이지만 찰나 지간에 육체의 행위에 간섭하여 육체의 안전을 도모한다.
*생각*은 그토록 절묘하여 생각에 대해서는 연구조차 불가능한 것이며 오직 일념의 무념상태에서만 미묘한 이치를 깨우칠 수 있기에 진리를 깨우침에 대해서 생사자유자재, 또는 생사이치(生死理致)를 깨우침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나 없는 나’에서 ‘나 있는 나’를 인식하는 과정과 그 이후에 일어난 생각들에 대한 기억과 기억된 생각들의 뜻에 대해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던 혼돈시기를 지나면서 기억세포에 있던 낱말들(이름과 형상과의 동일시)의 뜻을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는 과정에서 육체가 나다, 라는 앎의 확고한 관념이 첫 번째의 창조이며 엄마, 아빠, 집, 형, 땅, 인형, 하늘, 땅…… 등의 형상과 이름들에 대한 동일시에 대한 분명한 앎이 말로 만들어진 사건, 즉 말 변사이며 이것이 “창조(創造)”이다.
인간은 시작도 끝도 감지할 수 없는 생각의 영원성, 연속성에 의해서 자신의 부재, 즉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반복 순환하는 생각이 끊어진 상태(깊이 잠이든 상태)에 대해서 기억할 수도 없으며 상상할 수도 없다. 이러한 생각의 영원하고자 하는 속성에 의해서 인간은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게 되며 사후(死後) 세계에 대해서도 여느 집단에 의해 세뇌 당하는 정도에 따라서 실재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며 영원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서 다른 세상을 상상으로 창조하기도 한다.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에 대해서 기억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이유 또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의 연속성인 미묘한 작용에 이끌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나라는 생각”의 유희이다.
대상과 이름에 대한 동일시의 분명한 인식이 창조이며 창조과정을 통해서 확고해진 낱말들에 대한 고착화된 기억이 고정관념인 앎, 지식이며 그 이후의 지식(언어의 기억)에 집착된 기억들이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관념이며 더 강하게 각인된 낱말들에 대한 집착된 기억이 고정관념이다.
지금의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는 마음(기억세포에 저장된 낱말에 대한 확신)이 3차 에고인 자아이다.
1차 에고는 순수의식이기에 에고로 표현될 수 없다.
깨달음은 다른 생각이 일어날 수 없는 상태인 일념(一念)만이 하루 종일 지속됨에 의해 기억된 모든 생각이 무력화 되면서 최후에는 육체가 나라는 생각까지도 그릇된 앎임을 깨우치는 것이다.
일념의 무념 처라고 표현되는 삼매에서는 태어나서 최초로 일어났던 생각인 “육체가 나라는 생각”이 사라짐으로써 순수의식의 본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과” “육체가 나라는 생각”의 죽음의 차이에 대한 설명이기에 육체를 나라고 당연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생각의 영역을 넘어서 있는 말이며 그들의 언어 또한 우주의식, 도의 관점 등으로 표현되는 것과 같이 생각, 사념(思念)의 영역을 넘어서 있기에 해석될 수 없는 것이다.
3차 에고는 대상과 이름, 이름과 대상을 동일시하는 습관, 버릇의 탄력에 의해서 어떠한 이름이나 또는 사상 등의 낱말들에 대해서도 그것들과 나와의 동일시에 대해서 당연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는 아이가 자아를 인식하기 전에 낱말의 뜻을 알지 못했듯이 경험하지 못한 말들에 대해서도 말, 언어로 세뇌당하면 그것에 대해서 당연시하게 된다.
태어남, 죽음, 행복, 불행, 성공, 실패, 괴로움, 고통, 사랑, 사상 등의 낱말에 대해서 사전을 찾아보거나 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생각에 불과한 낱말들이지만 그 동안 이어지던 형상과 이름과의 동일시에 대한 습관에 의해서 이상, 또는 사상과 자신을 동일시하기에 고통을 겪는 것이다.
스스로 일어났고 또 일어나는 생각들의 행위가 고정관념화 되기 전인 2차 에고상태의 아이에게는 마음이 있으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부드럽고 유연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힘이 든다거나 불행이라는 생각이 있을 수 없다.
3차 에고는 이름과 대상과의 동일시에 대해 당연하게 여기게 되며 지식으로 흡수된 앎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깨어날 수 없기에 고통을 겪는 것이며 생각의 미묘한 이치를 터득함으로써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종교에 의해서 자신의 뜻과는 배치된 우상숭배로 모독을 당하고 있는 예수는 “사람이 거듭남”에 대해서 ‘성령’이며 ‘하나님 나라’라고 하였다. 사람으로 태어나 삶도 죽음도 없이 기쁨만으로 존재할 수 있는 ‘나 아닌 나’인 참 자아로 회귀하기 위해서는 열정이 필요하지만 사람이면 누구나 죽음 앞에서도 여유로운 미소 지을 수 있는 참 자아인 진리, 신과 합일될 수 있는 것이다.
지고의 실체인 ‘나’가 주체이며 마음이나 생각은 참 자아가 아니다, 라는 설명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태양에 의존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신(생각의 빛)의 뜻에 따라 살아지는 것이다. 나만의 고정관념인 마음이 본래 나의 마음이 아닌 신의 뜻임을 이해한다면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부질없는 욕망에 이끌려서 부지런히 달려 나가서 다다르는 곳은 차디찬 죽음이다. 자신의 본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깨어나기 위한 노력을 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며 나는 마음과 현상계를 초월한 우주의식이다, 라는 마음으로 순간, 순간을 (물이 어느 곳에서나 본성은 변함이 없듯이)자신과 마주함으로의 행위로서 자유와 평화를 위한 진리의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다.
그대의 본성이 신이었으며 삶의 목적이 있다면 자신의 본성으로 회귀함인 것이다. 나의 생각을 나의 뜻대로 할 수 없음을 이해하여 지금 존재함을 환희로움으로 맞이할때에 삶은 축제이다.
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생각은 신에 의해 행위 됨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신의 뜻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삶이 평화로운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생각의 정체를 확인함에서 신과 합일되지만 그 후에는 “신”이 “참 자아”에 의해 이름, 언어로 창조된 것임을 깨우치게 되기 때문에 신의 위에 있다거나 신을 돌파함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 다음편 마음과 생각의 미묘한 관계 ---
http://cafe.daum.net/husimwon 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