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신, 부처, 하나님, 순수의식, 순수사고, 창조자, 절대자, 오직 나, 참 나 등의 수많은 이름들이 지어진 것이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 주관과 객관으로 나뉠 수 없다.
빗물이 강에 떨어져서 강이듯이, 파도가 바닷물과 다름없이 바다이듯이...
이에 대해서 일즉다, 다즉일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것은 의식이다.
주체와 객체가 없는 "의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것을 우리말로 "깨달음"이라는 말로 표현할때에 깨달음은 주체를 대상화 시키는 일이다.
주체인 나가 나를 대상화시키려는 힘에 의해서 그것을 보게된다.
그것은 기억에 바탕을 둔 사고의 영역 밖에 있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되지만 해석될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주체가 사라졌을때에 남는 "의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표현되었으며 이에 대해서 무, 공, 텅빔 등의 말로 설명된 듯 하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상상해서는 아니된다.
그것에는 모양과 형상이 없으며 이름지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 말에 대해서 혼란스러울 수 있으나... 나무를 태워서 재가되고 그것이 흩어지면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듯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다.
육체가 나라고 아는 나를 대상으로 보기 위해서는 나를 천지만물 중의 하나인 물건으로 보라는 뜻이다. 물론 그럴 수 없다. 하지만 나의 생각이기에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내가 숨을 쉰다고 아는 앎에 대해서 당연시하지만 숨쉬는 일에 대해서 조금만 숙고해 본다면 숨은 자신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없이 행위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깨우칠 수도 있을 것이다.
숨쉬는 일.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지만 호흡을 조절하는 일이 노력에 의해서 가능할 수 있듯이 생각하는 일 또한 가능한 일이기에 노자와 장자, 석가모니와 예수 등의 인물들이 인류의 가야할 길, 인류가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화롭게 살수 있는 길을 연설했던 것이다.
인류는 천지만물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있다고 당연시 하는 앎에 의해서 고통을 겪는다. 그것이 나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집착과 욕망이 그 원인이지만 그것의 근원을 알 수 없기에 고통과 괴로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천지만물이 있다고 아는 원인은 "나", 즉 경험에 바탕을 둔 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나가 주체이기 때문에 대상이 있는 것이며 이에 대해서 석가모니는 연기법이라는 말로 설명하였다.
나무가 불에타서 근원이 없듯이, 사람을 비롯한 생명있는 모든 것들과 생명이 없는 모든 것들이 불에타서 재가되어 사라지는 나무와 같이 근본원인이 없는 것이다. 이는 또한 촛불이 타고나서 사라지는 것과 같이 지수화풍을 비롯한 우리의 몸 또한 이와 다르지 않게 본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류가 더욱더 발전하여 우주?라는 것을 정복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인간 스스로의 근원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으니... 무지가 아니던가?
자신의 나. 그것의 근원을 모르면서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근원을 모르니, 천지만물의 근원을 알 수 없으니...
그것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있게한 "신"이라는 것이 있다고 가정하는 편이 좋을 듯 하다.
명칭으로 이름지어진 모든 것들은 실체가 아니며 실재하지 않는것이라는 말을 염두에 두더라도 육체가 나로 아는 한 신이 있다고 가정하자는 것이다.
"나"의 근원이 신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일념의 공부에 대해서는 이곳에 충분히 설명되었으니 생략하고...
집중력이 향상되어 일념을 깨우친 이후에 일념의 도구로써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구절이 최선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구절이 최선인 까닭은 여러차례 설명된 바 있으나... 일념이 어느정도 깊어질 무렵부터 "지혜"라는 말로 표현된 "참다운 앎"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일념이 깊어질 무렵에 드러나는 앎에 대해서 스스로 세뇌, 도취되면서 내가 깨쳤다, 라고 알게된다는 것이다. 수많은 종교를 비롯한 유사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원인이며 그들에 의해서 세뇌된 사람들에 의해서 순한 양들은 속임수에 길들여져가고 있는듯 하다.
일념이 깊어져서 참다운 앎이 드러나더라도... "이것을 아는 나는 누구인가" 라고 물어들어가야만 한다.
그리하여 기억에 남아있는 모든 앎이 사라지고 스스로 생멸하던 생각이 시간과 공간도 망각한채 "나는 누구인가"라는 한 생각만이 몇날 몇일인지도 모르는채 이어져갈때에 비로소 내가 곧 그것임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지만 알아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그것이 그것이다.
인간은 경험에 바탕을 둔 기억에 의해서 육체가 나라는 동일시에 대해서 당연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육체에 대해서, 이것이라고 표현하게 된다. 물론 일념에 깊어지면서는 육체에 대해서 "이것"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에 대해서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육체는 신의 도구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육체, 즉 나는 신의 도구이다. 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라는 뜻이기도 하다.
육체와 마음의 모든 행위는 내가 아니다.
육체와 마음은 신의 도구일 뿐 진정한 내가 아니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
이것을 아는 나는 누구이며, 저것을 모르는 나는 누구인가...
이렇듯 끝없이 나를 대상으로 인식하게하는 작업이 수행이다.
그리하여 나가 내가 아님을 알더라도 "내가 내가 아님을 아는 나는 누구인가, 라고 물어들어갈때에 비로소 이세상 모든 것이 "나라는 생각(주체와 객체가 없는 의식)"에 의해서 창조된 것임을 깨우치는 것이다.
그것을 깨우친다면...
그대에게는 근심과 걱정이 사라진다.
세상 어느것에 대해서도 분노할 일이 없다.
어느 누구를 부러워하거나 질투할 일이 없다.
행복과 불행, 자유와 평화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생로병사의 고통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왜, 끊임없이 변하는 마음, 생각의 유희, 희노애락에 이끌려야 하는가?
자유와 평화라는 인식이 없음이 자유와 평화이다.
구속된자만이 자유를 갈망하는 것이다.
불행한자만이 행복을 갈망하는 것이다.
부족한자만이 무엇을 얻고자 고통을 겪는 것이다.
복이 없는자만이 복을 구하는 것이다.
부족한 것이 없으니 무엇을 소망하겠는가?
얻을 것이 없으니 여여한 것이다.
무엇이 두려운가?
실체없는 것들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은 아닌가?
삶과 죽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니 여여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여여, 즉 한결같은 마음, 변함없는 마음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어떠한 말, 언어로도 그것에 대해서 정의할 수는 없다.
그것에 대해서 참 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대의 참 나. 그것이 모든 것의 기원이다.
진리. 그것이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