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색이 케이건 교수라는 사람의 글들을 통해서 다시한번 인간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정리하는 과정인데...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간들의 모든 앎은 '논리적'이라는 말을 앞세우지만, 논리적이라는 말 자체가 '비논리적'이라는 말에 대해서 설명했듯이, 인간들의 앎이라는 것들 모두가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에 세뇌된 탓이지만... 추론에 바탕을 둔 또 다른 추론일 뿐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말만 무성할 뿐, 해답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데크르트의 '생각에 의해서 내가 존재함을 아는 것이다'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는데, 일념법 수행으로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에게는 '생각에 의해서 내가 존재함을 아는 것이다' 라는 말...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며 그져 보편타당한 앎이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 또한 일념을 깨달아 생각의 속성과 이치에 대해서 아는 올바른 앎으로써는 그 뜻에 대해서 분명히 알며, 일체유심조의 뜻 또한 너무나도 당연하게 다가오는 말들이기 때문에 그져 보편 타당한 앎일 뿐이다.
더 나아가 석가모니의 말로 전해지는 말이 있는데... '말변사'라는 말이다.
이미 자세히 설명되었으니 요약하지만... '말변사'라는 말은 우주와 천지만물, 그리고 세상사 모든 것들이 '말로 변화된 사건'들일 뿐. 실제가 아니라는 말로써 '명색의 동일시에 대한 착각'에 의해서 있다고 아는 것들이라는 말이다.
죽음은 나쁜 것인가?
아니다.
좋은 것도 아니며, 나쁜 것도 아니다.
만약에 인간들의 삶이 항상 평화로운 삶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행복할 수 있다면, 죽음은 나쁜 것이겠지만, 세상에 스스로 나는 행복하다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항상 평화롭고 행복하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인간들의 삶이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는 생각, 생각, 생각들... 그 생각들에 속수무책으로 이끌려 다니며 살다가 생각에 의해서 죽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내가 생각한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인간의 곤념으로써는 그런 사실에 대해서조차 이해할 수 없다.
책에 설명된 바와 같이 인간의 '내가 생각한다'는 착각에 의해서 '내생각'이라고 아는 '생각'. 그것은 찰나지간으로 끊임없이 반복 순환되는 윤회의 연속이지만,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생각의 윤회에 대해서 미뤄 짐작하거나 상상하거나 감지 할 수 없다.
자유게시판의 '사색가'의 '인생은 꿈이다'라는 글과 같이... 인간이 자신의 생각의 윤회에 대해서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있다면 '꿈'이다. 이미 설명된 바와 같이 꿈이란 스스로 윤회하던 생각이 깊은 잠을 통해서 휴식을 취해야만 하는데... 꿈은 잠들기 직전에 (자신도 모르게)일어났던 생각들에 대해서 잠에서 깨어나면서(휴식하던 생각이 깨어나면서) 마지막으로 일어났던 생각들을 기억함을 시작으로 윤회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었다.
책의 내용 중에는 '무념무상'이라는 말에 대해서 여러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했는데... 무념도 무념이라는 생각이며, 무상 또한 무상이라는 생각이며, 생각이 없다는 생각도 '생각이 없다는 생각'이며, 생각을 안한다는 생각 또한 '생각을 안한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언어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듯이 생각 또한 언어에 바탕을 두고 윤회하기 때문에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생각의 흐름에 대해서 감지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테카르트의 말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언어와 생각... 그것들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의 근원에는 근원이 없다. 언어의 근원에는 언어가 없으며, 생각의 근원에는 생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근원이 없기 때문에 근원이 없는 것에 대해서 '본래 무일물' 즉 '아무것도 없는 것의 완전함'이라는 말로 표현했지만... 언어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해서 표현될 수 없다.
언어의 근원에는 언어가 없듯이 인간의 근원에는 인간이 없으며, 생각의 근원에 생각이 없으며, 마음의 근원에는 마음이 없다. 우주의 근원에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다. 근원에는 근원이 없다.
언어의 근원에는 언어가 없기 때문에 언어로써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말에 대해서 표현될 수 없다고 설명한 바 있는데... 인간들은 흔히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말을 사용하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말, 말, 말이 남겨질 수밖에 없듯이,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말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을 뿐.......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다만 관념에 의해서 두려워 할 뿐이다.
삶과 죽음 그리고 영생에 관하여... 라는 책을 쓴자거나 또는 철할자라는 사람들의 모든 말들은 추론일 뿐,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사람들일 수 없다는 뜻이며, 소크라테스와 대카르트의 말의 뜻 조차 이해할 수 없는 자들일 뿐이다.
의심의 근원에는 의심이 없다.
삶과 죽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석가모니의 남겨진 말 중에는 '나는 삶과 죽음의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에, 나는 사람도 아니다', 이름하여 불타니라' 라는 말이 있는데... '별은 별이 아니다' 라는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으로써 언어로써만 존재하는 것일 뿐, 실다운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 그 동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의 상태이다.
기억하거나 상상할 수 없으나... 그 '아무것도 없는 것'의 상태와 죽음과는 차이가 없다고 설명한 바와 같이 인간은 결코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내일을 걱정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며, 오직 지금 이 순간을 기쁨으로 존재하라고 하는 것이다.
영생은 좋은 것인가?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영생'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영혼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며, 삶과 죽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듯이 영생이라는 말 자체가 어리석은 자들의 망상에서 비롯된 추론일 뿐, 근거가 없는 말, 말, 말들일 뿐이다.
명색이 케이건 교수라는 자는 죽음은 나쁜 것인가, 라는 제목에 대해서 '박탈이론'을 확고히 한다고 하는데... 인간들의 추론이 그토록 어리석을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자신들의 삶,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들이 죽음에 대해서 논의하기 때문이다.
논리적이라는 말이 논리적일 수 없다고 설명한 바 있는데...
경험할 수도 없는 죽음에 대해서 논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지금 살아 있다면... 그런 논쟁은 쓸모 없는 짓들이 아니갰는가?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는 뭐라고 답하겠는가?
그렇다.
그것을 논하기 전에 삶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할 것이며, 너 자신을 알면 모든 의심이 사라진다고 할 것이며.
데카르트에게 죽음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는 뭐라고 답하겠는가?
생각에 의해서 네가 존재함을 아는 것이듯이 생각에 의해서 네가 죽는다며 죽음을 두려워 할 뿐, 죽음이라는 것 자체가 생각에 의해서 있는 것일 뿐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석가모니에게 죽음에 대해서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겠는가?
일념법을 통해서 생각의 윤회가 끊어지면... 삶과 죽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할 것이며, 예수에게 묻는다면... 죽으면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네가 깨달아 알면 네가 곧 하늘나라를 보는 것이며, 성령이며, 하나님이라고 할 것이다.
노자와 장자에게 물어본다면 뭐라고 답하겠는가?
신이 되기 전에는 만족해 하지 말라. 네가 신이 되면... 삶과 죽음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말을 배우는 과정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으나... '나 아닌 것'에 대해서 '나'라고 인식함과 같이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죽는다는 관념의 구속, 언어의 구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누구나 현실이며 현제라고 말하지만... 현제를 사는 사람이 없으며, 인간은 누구나 과거에 바탕을 두고 미래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매일 매일을 기쁨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지우면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스스로 깨달았다는 세상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만은... 마음의 뿌리는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기억할 수 없는 무의식에 잠재해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써 마음을 찾을 수 없으며, 마음으로 마음을 이길 수 없으며, 마음으로 마음을 채울 수 없으며, 마음으로 마은을 비울 수도 없다고 했다.
오직 일념법 수행을 통해서 마음의 근원에 다다를 수 있을 뿐...
영생이라는 말은 육체가 영원히 산다는 뜻이 아니며,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이 영원히 산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인간의 관념으로써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으나... 존재계의 모든 것의 기원이 있다면 그것이 영원한 것이며, 그것이 '육체를 벗어난 나'이며, 마음을 떠난 '나'이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며 변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에 대해서 삶과 죽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나라고 설명한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든지, 저렇게 설명하든지... 인간의 관념으로써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언어도단이며, 불립문자라는 말까지 창조된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삶과 죽음의 한계를 벗어나 무위자연의 자유를 누길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며, 그 방법에 대해서 석가모니의 말이 외곡되었으나 '불법'이라는 말이며, '중도'라는 말이며, 노자와 장자로부터 전해지는 '도' 라는 말이다. 예수는 그 방법에 대해서 '길이며, 진리며, 새생명'이라고 했다고 전해지는데... 모두가 외래어들이 한글화 되면서 왜곡된 것들일 뿐, '일념법 수행'을 일컷는 말이다.
그나마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데카르트의 '생각에 의해서 내가 존재함을 아는 것이다' 라는 말일텐데...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들 모두가 생각의 속성과 이치에 대해서 깨달아 알때, 온전한 앎으로써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진리란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올바른 가르침을 일컷는 말이다.
현 시대의 인간들의 삶이 추론에 바탕을 둔 논쟁이며, 논란이며, 경쟁이며, 투쟁이며 전쟁이듯이 오직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지식으로써 어찌 평등하게 화합할 수 있겠는가?
일념법 수행으로 언어라는 것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분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알때, 그때부터 비로소 평화로운 삶일 수 있으며, 이 순간을 살아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 올바르게 알게 될 것이며,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다.
그대와 그리고 인류의 자유와 평화... 오직 진리의 길에서 하나될 수 있다.
일념법이 진리이다.
진리. 오직 그것이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