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세우라
조셉 아르파이아·롭상 랍가이 저, 서보경 역
달마어록 무명론 無明論
"당신께서는 우리의 불성과 모든 덕성이 각성이라는 근원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명은 어떤 근원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수많은 집착과 정욕과 악을 지닌 무지한 마음, 즉 무명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세 가지 독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이 세 가지 독에 중독된 마음은 셀 수 없이 많은 악을 갖고 있는데, 마치 나무가 하나의 등치에 수많은 잎과 가지를 갖고 있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세 가지 독은 수백만 개의 악을 만들어 내어 나무의 예와 거의 같다.
세 가지 독은 우리의 여섯 가지 감각과 그 각각의 식(識)에 물들어 있다. 그것들은 도둑이라고 불리는데 감각의 문을 빠져나와 마구 다니면서 한없이 욕심을 내고 탐닉하고 위선의 가면까지 쓴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그것의 근원을 잘라 버린다면 그 강물은 곧 말라 버릴 것이다. 만일 해탈을 추구하는 어떤 사람이 이 세 가지 독을 세 가지 진리로 바꾸고, 여섯 도둑을 육바라밀로 바꾼다면, 그는 자신을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삼계와 존재계의 육도는 무한히 광대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라면 어떻게 이 끝없는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삼계의 업은 오직 마음에서 나온다. 만일 그대의 마음이 삼계속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삼계를 초월한 것이다.
"그러면 육도의 업은 어떻게 다릅니까?"
참된 수행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먼 선행만 쌓는 사람은 삼계에 태어난다. 눈먼 사람은 어리석게도 열 가지 선업을 쌓고도 행복을 추구하는 바람에 욕망의 세계에 신으로 태어날 것이다. 오계를 지키고도 어리석게 애증에 몰두하는 눈먼 사람 분노의 세계에 집착하는 사람은 거짓된 가르침을 믿으며 축복 받기를 원하는 바람에 미혹의 세계에 악마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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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명론'이라는 말의 無明이라는 말은 한글로써는 '밝지 않은 앎'이라는 뜻으로써 인간 세상의 文明을 일컫는 말이다. 무명이라는 말에 대한 깨달은 자들의 공통된 말이 있는데 '인간들의 앎에는 겨자씨 만큼도 올바른 앎이 없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 있다면 석가모니의 말로 전해지는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라는 말이며 예수의 '나의 말을 옳기는 자는 그리스도의 적'이라는 말이다. 지성, 지식을 실제로 여기는 지성체들은 이런 말에 대해서 무슨 뜻인지 이해 조차 불가능한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나 불경 등의 경전들에 대해서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달마어록을 해설 한다는 '조셉'이라는 중생과 같이 깨달은 자들의 말을 해석하는 것이다.
세간에는 노자와 장자에 대한 책들도 많으며, 석가모니의 말에 대한 해석서들도 많다. 예수의 말이 왜곡되어 수많은 종교들이 생겨 났듯이 석가모니의 말 또한 수많은 종교들을 창조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잡서들에서는 그들 즉 도를 깨달은 인물들의 가르침의 핵심을 찾을 수 없다. 가르침의 핵심이라는 말은 깨닫기 위한 방법을 일컫는 말이다.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깨달은 자들의 진실된 말의 바탕이 무엇인지 짐작 하거나 상상 할 수 없다. 그들의 가르침의 바탕에는 육체 하나만이 나가 아니라 천지만물 모든 것이 '나'라는 앎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나'와 '너'라는 상대적인 분별심이 사라진 앎이 깨달은 자들의 진실된 말의 바탕이라는 말이다.
위의 말들이 달마의 말이거나 달마의 말이 아니거나 상관 없는 일이다. 만약에 달마의 말이라면 가장 하근기에 속한 중생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달마가 존재 했던 시대에 나왔던 이야기들이다. 현 시대에 살면서 그 시절 사람들의 의식 수준에 대해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아마도 달마의 말은 그떼 그 시절에 통용되는 언어로 설명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은 없다. 노자와 장자의 시대거나 달마의 시대거나 현 시대거나 하근기의 중생들은 말, 말, 말의 깊은 뜻에 대해서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말 그 자체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말, 소리는 자연계의 소리와는 다르다. 인간들은 말에 대해서 각기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관점으로 이해 함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긴다. 말을 하는 사람의 뜻에 대해서 생각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이해 한다고 착각한다는 뜻이다. 이런 사례는 인간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 되는 말이지만 특히 특히 종교에 세뇌 당한 광신자들이나 맹신자들의 사례로써 이해는 가능할 수 있다. 물론 종교 뿐만은 아니다. 인간들은 '영혼'이라는 것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는 근거도 없다. 아니 있다거나 없다라는 앎이 분별된 앎이며 그릇된 앎이기 때문에 올바른 앎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념을 깨닫지 못한다면 모두가 중생이다.
그런데 중생들 중에서도 가장 하근기 중생들... 도의 관점에서 본다면 비난 받아 마땅한 자들이 있다. 달마는 이런 자들에 대해서 죽여도 죄가 안된다는 말까지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예수가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단정짓는 자들이다. 짐승보다 더 뛰어난 인간이 없는데 짐승들과 비교할 가치도 없는 어리석은 자들을이 있다. 종교를 만든 자들이며 맹신자, 광신자들이 그러 하다는 말이다. 그들의 올바른 앎이 아닌 언술에 의해서 깨달은 자들의 진리의 말이 왜곡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달마어록이나 기타 깨달은 자들의 말을 해설 하겠다는 어리석은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세상에는 언술이 뛰어난 자들이 많고도 많은 것 같다. 그 중에서 현 시대에 가장 언술이 뛰어난 자가 있다면 '오쇼-라즈니쉬'라는 자와 '마하라지'라는 자, 그리고 서로가 깨달았다는 중생 들이다. 물론 예전에는 제 2의 불타라는 '용수보살(니가르주나)'이라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그 또한 여타 중생들과 다르지 않음에 대해서 설명한 바 있다. 명색이 '오쇼'라는 중생의 글은 인간들의 마음을 유린하기에는 충분한 말들이다. 하지만 '영혼'이 있으며 과학이 그것을 밝힐 것이라는 한 구절 만으로써도 '나는 중생이다'라고 자인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석가모니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석가모니의 말이 옳은 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부인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최소한 지적으로나마 석가모니의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어야 한다. '본래 무일물'이라는 말과 말변사 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 이해 조차 불가능한 사람들이 스스로 깨달았다고 주장 하기도 하며 그들의 말을 해석한다는 자들이다. 그러니 인간 세상의 적일 수밖에 없다.
사실상 그리스도의 적이라는 말은 단지 깨달은 자들의 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인간들의 관점에서 볼때 적이며 악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라는 것은 인간들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깨달은 자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이거나 동물이거나 식물이거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중생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분별 해야 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왜 그렇겠는가? 그렇다. 우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것이 우주 안에 있으며 우주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런 말 또한 이해가 쉬운 일은 아니니 비유를 들어 보자.
그대의 몸에 대해서 우주라고 가정할때, 그대의 머리카락 한올도 그대이며, 그대의 손톱이나 발톱 하나도 그대의 몸에 속하며 그대이다. 그대의 몸 중에서 그대 아닌 것이 없다. 그렇듯이 우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주 자체가 나이기 때문에 하늘, 땅, 별, 인간, 동물, 식물, 바람, 빛, 구름... 등의 모든 것들이 우주 안에 있는 것일 뿐, 우주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주'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우주가 있는 것이다. 만약에 우주라는 것이 실제하는 것이라면 그대의 본성이 우주라는 말이다. '본래무일물' 즉 본래 없는 것이라는 말은 천지만물이 있지만 그것의 근원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과학이라는 지성체들이 밝힌 바와 같다. 인간들이 보고 느끼는... 보고 느낀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분석을 하다 보면 분자 또는 원자가 남는데, 마지막으로 남겨지는 것은 '입자와 파동'이라는 것들이다. 입자와 파동이라는 것들 또한 실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생각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 즉 본래무일물이라는 말이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물건들에게는 '우주'라는 말도 없으며 '영혼'이라는 말도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설명한 바 있으니 참고하면 될 것이다. 그대가 '나'라고 주장하는 것 또한 이와 같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본래 없는 것 즉 '나 아닌 것'에 대해서 '나'라고 동일시 하는 착각에서 깨어날 수 없기 때문에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깨달은 자들의 모든 가르침은 '깨어나라'는 말이며 '깨어나기 위한 길,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을 위해서 진리를 전하는 것이다.
그 진리를 왜곡하는 자들이 서로가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며 달마의 말을 해석한다거나 기타 깨달은 자들의 말을 해석한다는 자들이다. 지금 달마어록에 대해서 안다고 상을 내는 '조셉'이라는 중생과 같이...
무명론에서 '삼계'라는 말과 '존재계'라는 말과 '육도'라는 말, 그리고 미혹의 세계에 '악마'로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세간에는 깨달은 자들을 대변 하는 인물이 석가모니인 것 같다. 그러니 석가모니의 말의 사례를 든다면... 석가모니가 말한 '삼계'라는 말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중생들 개개인의 과거 세계와 현제의 세계 그리고 미래의 세계를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존재계라는 말은 개개인의 삶을 떠나 우주 자연을 일컫는 말이며, 육도라는 말은 넓은 우주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안이비설신의'라는 말로써 다섯가지의 감각기관과 감각기관의 작용에 대해서 알게 되는 뜻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미혹의 세계에 악마로 태어 난다'는 말은 인간들의 삶 자체가 미혹의 세계라는 뜻이며, 인간들의 투쟁을 일삼아야만 하는 삶을 위한 행위 자체가 악마라는 뜻이다. 인간들의 겉모습은 누구나 천사 같다.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자신의 얼굴에 대해서 자신이라고 여긴다. 얼굴을 고치고 화장하고... 변장 하여 아름답게 꾸민다. 그런데 그 속내는 아무도 모른다. 자신이 자신의 마음 조차도 모른다. 인간의 마음은 모두가 똑 같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살아서 죽는 날가지 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그 원인 조차 알 수 없기 때문에 인생에 해답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해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생각의 이치에 대해서 감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깨달은 자들은 인간들이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은 물건들이다.
만약에 깨달은 자들에게 삶의 목적이 있다면 인간들에게 그 길, 진리의 길, 진정한 자유로 가는 인생의 길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인간세상의 지식이라는 문명은 그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지는 꼭 그만큼 '자존심'만이 강해지는 것이다. 그대가 아는 사실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끼리는 절대 평평하게 화합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렇기 때문에 지식은 '文明'이 아니라 '無明'이라는 말이 달마의 무명론이라고 이해 할 수 있다면 올바르게 이해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존심을 버려라'라고 주문하는 것은 아니다. 버리라고 한다고 하여 버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존심이라는 것이 분별이며 상대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허구'라는 사실에 대해서 우선 이해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일념법 수행을 통해서 그런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알때, 그때 비로소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깊은 뜻을 깨달아 앎으로써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 그들 가르침의 핵심이다.
달마의 말을 비롯하여 깨달은 자들의 말은... 하늘의 관점, 도의 관점, 부처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두가 중생이라는 말과 같이 '육체가 나다'라는 앎으로써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삶 속에서는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더라도 마음 한켠에는 항상 악마가 깃들어 있다는 말이다. 물론 '악마'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 하는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인간들은 누구나 육체가 나, 내것이라고 알기 때문에 육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육체가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집착이나 욕망이 사라진다. 아니다. '육체가 나'라는 착각에서 깨어날 수 없기 때문에 욕망을 모두 버릴 수 없다는 말이다. 욕망이 있기 때문에 고통과 괴로움, 슬픔과 환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욕망이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 악마가 되기도 하며, 상황에 따라서 천사가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자신에게 이익이 있을 때에는 천사의 모습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이익이 따르지 않으면 악마로 돌변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러니... 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불교라는 종교에는 '천수천안 관자재 보살'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은 깨달은 자들이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들의 삶이 천태만상이라는 뜻이며 인간들의 마음이 상황에 따라서 그렇게 변할 수 있으며 천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 하는 편이 더 바람직 할 것이다. 물론 석가모니가 한 말은 아니다. 석가모니의 말을 이해 할 수 없는 중생들이 다른 중생들에게 상상의 세계, 환상의 세계를 창조해 내 전달한 것이며, 광신자 맹신자로 변모한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에 의해서 창조된 것들이다.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그대가 광신자거나 맹신자거나 또는 하근기의 중생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말에 대해서 지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인간들의 모든 앎에는 근거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앎이 대상들과 경쟁이나 투쟁을 위한 앎이지만 깨달은 자들의 말에는 어떤 말이든지 분명한 근거가 있다. 인간들의 모든 말에는 근거가 없는데 근거가 없는 까닭은 언어의 근원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논리적이라는 말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인간들의 어떤 말이거나 논리적인 말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어의 기원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들의 말만이 논리적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들의 말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다.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이해 할 수 없겠지만 아래 설명을 통해서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말을 할 줄 알고 한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는 말이다.
언어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이나 부처님이나 귀신이나, 영혼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인간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이라는 말도 인간이 만든 하나의 낱말이며, '귀신'이라는 말도 인간이 만든 낱말이며, 부처님이라는 말도 인간이 만든 낱말에 불과 하다는 뜻이다. 하늘에 날아 다니는 검정색의 동물에 대해서 '까마귀'라는 이름을 지었듯이... 그렇지 않은가?
인간은 자신들이 '내가 있다'고 말함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기듯이 '하나님'이라는 것 또한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말을 했다고 착각 하는 것 같다. 오직 인간만이 '내가 실제로 존재한다'라고 생각, 생각, 생각하는 것이다. '하늘'이 인간과 같이 '주체'가 있어서 '내가 하늘이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하물며 '영혼이나 귀신'이 '내가 영혼이다'라고 말을 했겠는가? 아니다. 말을 만든 것은 인간이다. 오직 인간이 말, 말, 말을 만든 것이다. '영혼'이라는 말을 만들고 나서 그 말에 대해서 '있다'거나 '없다'라고 서로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말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거나 또는 다수겨로 정해서 옳고 그름을 결정 해야 한다.
여기서 한가지 묻고 넘어가자.
조물주, 절대자, 창조자, 운명의 신... 등이 있다고 믿는가? 없다고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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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고 주장하거나 또는 '없다'고 주장하거나 또는 '오직 모를 뿐'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들의 분별심이며 올바른 앎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라면... '말변사'의 뜻이라고 알 것이다. 명색의 동일시에 따른 착각의 산물들이라고 알 것이다.
단지 그것들의 이름, 명칭만 있을 뿐, 실제로 존재 하는 것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대가 주장하는 그대의 '나'라는 것 또한 이와 같다.
달마의 말에는 나무와 나무의 뿌리 그리고 나무의 잎에 대한 비유가 있다. 일념을 깨닫고 올바른 앎이 겨자씨 만큼이라도 있는 상근기의 인물들이라면 너무나도 단순하고 쉬운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을 나무로 비유한 것이며, 수많은 지식, 앎(욕망)들에 대해서 나무의 잎으로 비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지식이라는 말은 번뇌와 망상을 일컫는 말이며 '감각기관의 작용에 따라서 스스로 일어나는 '생각'의 윤회에 대해서 나무의 잎과 같다고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의 깨달음을 위한 방법들은 석가모니의 '무상한 것은 나가 아니며 수상행식(마음)도 이와 같다'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창조된 것들이다. 그들은 석가모니가 제시한 '나는 누구인가'라는 일념법에 대한 설명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방법들을 연구 하지만... 그 방법들 모두가 나무의 잎을 따는 결과일 뿐, 뿌리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는 말이다. 윤회하는 생각의 흐름(생각의 윤회)을 끊어 내기 위해서는 일념법이 유일한 길이며 방법이라는 말이다.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는 까닭은 생각의 이치와 속성에 대해서 설명한 바와 같다. 생각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생각이 없다는 또 다른 '생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없다는 말도 마음이 없다는 생각이다. 이렇듯 생각은 끊임 없이 또 다른 생각을 낳는다. 인간이 언어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생각'의 흐름을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세한 비유와 설명은 책을 통해서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무명에서 벗어 날 수 없는 중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언어의 창조에 대해서 덧붙여 본다.
인간은 '내가 사람이다'라고 주장함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기듯이 다른 것들 또한 그렇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달마어록을 해석 하겠다는 '조셉'이라는 중생이 그렇듯이 꽃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 또한 똑 같은 이치이다. 하나님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하는 것이라서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며 '하늘' 또한 '하늘'이라는 주체가 있어서 '내가 하늘이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이 예수의 말을 오해 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 하면서 자신의 알음알이로 예수의 말을 전했다는 말이다. 천지만물 중에 '나'라는 주체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직 인간이라는 물건 뿐이다. '말이 없다'는 말도 말이지만, 말이 없다면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말이 본래 없는 것이라고 말을 하더라도 '말이 없는 것'이라는 말은 남을 수밖에 없다. '말변사'라는 말에 대한 일부분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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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이라는 중생의 달마어록 해설 내용에 무한한 어리석음이 보이기에 간략하게 설명하려 한다. 아래의 빨강색의 글귀들은 위의 달마어록에 대한 '조셉'이라는 중생의 부연 설명이다.
"달마는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궁극적인 물음에 직면했다. 그 물음은 대답해질 수 없기 때문에 궁극적인 것이다. 모든 철학, 모든 신학, 모든 신비주의가 결국 이 궁극적인 질문에 이르게 된다. 그 어떤 대답도 존재할 수 없는 물음에 말이다.
그러나 달마처럼 엄청난 용기와 지성과 깨어 있음을 가진 사람은 얼마든지 '이 질문에는 대답이 없다."라고 말할 용기가 있다. 그것은 수백만 명의 철학자들과 사상가들과 신비주의자들이 시도했지만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간단히 말할 수 있다. "나는 모른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모른다."라고 말할 수 있은 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용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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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대는 위의 조셉이라는 중생의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하는가? 언뜻 보면 소위 이 나라에 알려진 삭발한 광신자, 맹신자(주장자를 들고 다녔다는...) 의 말이 떠오를 수 있다.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말을 했던 중생이 있었으며, 미국의 유명 대학 출신의 명색이 '현각'이라는 중생(이름이 뭐였더라... ) 또한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말로써 모른다는 아상을 간직하고 있다는데... 그렇기 때문에 중생일 수밖에 없다. 이런 말들은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에게는 하나의 웃자고 하는 농담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말이다. 하지만 지식으로 이해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심각하게 들리거나 또는 '참으로 옳은 말이구나'라고 동조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생에 해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생각의 생멸 현상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이치와 속성'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에게는 아주 아주 단순한 질문이며 답변 또한 간단 명료하다. 다만 일념의 뜻 조차 납득할 수 없는 중생들에게는 어차피 우이독경일 따름이다. 간단한 답변이 무엇이겠는가? 그렇다. '윤회하는 생각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답변이 바로 튀어 나온다는 말이다. 조금 더 나아가다 보면 '원인 없이 나타났다가 원인 없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알게 되겠지. 근원은 본래 무일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말을 했던 최초의 인물이 누구였을까 라는 의문이다. 아마도 소크라테스의 말에서 비롯된 것 같다. 왜냐하면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에게 어떤 중생이 묻기를, 당신은 당신 자신을 아십니까" 라고 물으니 소크라테스 하는 말이 "나는 내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그것 하나만은 분명히 안다'고 했단다. 그런데, 이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 달마의 말 중에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순치황제와의 대화 내용에서이다.
순치황제가 달마에게... "나는 절도 많이 짓고 젊은 승려들도 많이 양성하고 또한 절간에 보시도 많이 했는데 공덕이 얼마나 있습니까" 라고 물었단다. 달마의 답변은 간결한데 단 한 글자였단다. '없을 무'자의 '무無' 라고...
순치황제는 자신이 많은 공덕이 있다고 믿었는데 달마가 '무'라고 답변 하자 어이기 없었겠지. 그래서 달마에게 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물으니 달마 답하기를 '내가 달마다' 라고 답변한 것이 아니라 '나도 모릅니다'라고 했단다. 이 말은 '내가 나를 모른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달마의 '나도 모릅니다' 라는 말과 소크라테스의 '나는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는 말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물론 인간의 통념, 관념, 지식으로써는 이해를 초월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자신이 지은 것도 아니며, 자신이 자신의 태어남을 기억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자신이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디 그것 뿐이겠는가? 인간은 누구나 당연하게 몸이 나라고 알지만... 몸이 나라고 아는 것 조차도 타인들로부터 듣고 배워서 알게된 것이며, 나이 또한 처음에는 부모로부터 들어서 알게된 것이다. 아마 멍멍이도 인간들과 같이 오랜 동안 말을 배운다면 인간들과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몰론 구강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인간과 똑 같이 언어를 구사 할 수는 없겠지만... 부분 적으로나마 인간들의 말을 알아 들을 수는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모든 앎이라는 것들이 멍멍이가 말을 배워서 인간들의 심부름을 하듯이 인간들 또한 말을 배워서 아는 것일 뿐, 스스로 아는 앎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들이 말을 배워서 아는 것이라는 인간들의 모든 앎이 타인들로부터 들어서 아는 것들이라는 말이다.
위의 설명과 같이 '내가 사람이다'라는 말 또한 타인들로부터 들어서 아는 말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모든 앎이 자신의 앎이 아니라 타인들의 앎을 빌려온 것들이기 때문에 올바른 앎일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들의 '육체가 나다'라는 말과 자기를 주장하는 모든 앎들에 대해서 근거가 없는 말이라고 했는데... 만약에 인간들 모두가 '육체가 나다'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렇다. '육체가 나다'라는 앎 또한 타인들로부터 들어서 아는 것이다. 그대가 주장하는 모든 것들... 남들로부터 듣고 배운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수 없답면 그대의 진짜 나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타인들에게 들어서 아는 것이라는 말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이 없는 앎이라는 말이다. 자신이 경험한 것도 아닌 앎들에 대해서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인간이다. 그러니... 인간들의 모든 앎이 말도 안되는 소리이며, 어불성설이라고 단정 지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인간들의 앎에 대해서 겨자씨 만큼도 올바른 앎이 없다는 말의 뜻이다.
조셉이라는 중생은 말한다. 달마가 용기 있는 사람이라면 '나도 모른다'라고 할 것이며, 자신에게 묻는다면 '나도 모른다'라고 답변하겠노라고. 그리고 그렇게 답변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용기라고 주장한다.
'오직 모를 뿐'이라거나 '아무것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가장 무식하고 가장 어리석은 자들이다. 모르면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오직 올바른 말이 아니라면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올바르게 안다면 차라리 할 말이 없어지기도 하지만. 진정으로 올바른 앎이 무엇인지 안다면 말을 해야만 한다. 각자무언이라는 말은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수와 석가모니가 그러 했듯이 소크라테스가 그러 했듯이 올바른 앎이라면 죽음 앞에서라도 말을 해야 한다는 말이며, 죽음 앞에서도 '나는 기쁘다'라고 말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무명론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