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라는 말의 한자의 뜻을 보니. '영묘할 영'자와 '넋 혼'자이며, 사전적 의미는 아래와 같다.
(靈魂)【명사】
1. 죽은 사람의 넋. 유혼. 혼령. 혼신.
¶ ∼의 안식처/ 씻김굿은 망자의 ∼을 천도(薦度)하는 굿이다.
2. 『불』 인간의 모든 정신적 활동의 본원이 되는 실체.
3. 『가』 신령하여 불사불멸하는 정신. 영신.
4. 육체와 구별되어, 육체에 머물면서 마음의 작용을 맡고 생명을 부여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비물질적 실체. 혼(魂).
¶ ∼의 양식. [준말]영(靈). ↔육체.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
삶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육체는 삶의 세상이며 영혼이라는 말을 창조함으로써 영혼은 죽음의 세상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이기 때문에 삶이 있으나 올바르게 사는 삶이란 없다. 인생이란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들의 삶이기 때문에 올바른 삶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생에 해답이 없듯이. 인간들의 삶이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더라도 결코 올바른 삶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들의 삶에 대해서 '길잃은 어린 양새끼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고 했던 인물이 예수이다.
삶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어찌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만은.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올바른 삶이란 없는 것이다. 올바른 삶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며, 삶이 고통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죽음은 영혼이며 죽음의 세상에서라도 편안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들어진 이름, 명칭, 낱말이 '영혼'이라는 말이다.
삶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삶이라고 주장하며,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죽음이라고 아는 앎이 올바른앎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이 '어떤 것'에 대해서 '인간'이라는 이름을 짓고 그것에 대해서 '사람'이라고. '나'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그리고 말, 말, 말로써 '내가 있다'고 주입된 것이다. 말, 말, 말로써 어떤 것에 대해서 '나'라고 이름 짓고 그것에 대해서 '나'라고 주장하는 것이 사람이며 인간이라는 물건이다.
인간은 누구나 '내가 있다'고 알게 되었던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다. 만약에 인간이 그 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있다면 '영혼'이라는 말은 창조될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인간은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다른 말, 말, 말들을 창조함으로써 그 말들과 '나'를 동일시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길, 순수의식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길을 알렸던 인물들이 있다. 예수와 석가모니이다. 그들의 말이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에 의해서 왜곡되면서 우상숭배사상으로 변질된지 오래지만. 그나마 그들의 가르침의 본질은 남겨져 있다. 그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지만.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으로서는 영혼이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어떤 깨달았다는 중생은 영혼이 있고 없고는 과학이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과학으로 밝힐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과학은 우주의 근원을 알 수 없으며, 인간생명의 근원이 무엇인지 조차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를 깨달은 인물들은 어찌하여 그런 사실에 대해서까지 명백한 논리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도를 깨닫는다는 것'은 인간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며 인간생명의 비밀을 알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알며, 창조의 비밀에 대해서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그대 또한 일념법 수행으로써 인간생명의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있으며, 석가모니의 말과 같이 부처가 될 수 있으며, 예수의 말과 같이 '성령'이 될 수 있다. 그대의 본래의 '나'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신이며, 영혼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하나님이나 영혼, 즉 절대자나 신 등이 없다고 주장해야만 한다. 그리고 종교나부랭이들은 '절대자'가 있다고 주장해야만 한다. 그리고 대다수의 인간들은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더라도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자신의 몸과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뜻대로 조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질병을 치료한다는 의학에는 '신경성'이라는 질병이 있다. 신경성 위장병을 비롯하여 정신적인 모든 질병에 대해서 신경성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 같다. 그리고 신경성 질병에 대한 치료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 이름들이 치매, 뇌성마비, 파킨슨씨병, 경직성 척추염, 소아마비, 척추마비 등등이며 모두 뇌나 중추신경계에서의 문제로 발생한 질병이란다. 그렇기 때문에 신경은 '귀신 신'자의 신경물질로써 하나님의 성령으로 만들어진 것이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예수의 말을 왜곡시킨 종교이다.
어떤 광신자들의 글을 보니.
인체 모든 기능의 근본 원인처는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외과적이든 내과적이든 모두 신경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몸은 하나님의 형상(창1:27)대로 지으셨기 때문에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 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5-27)라고 하심 같이 모든 지체가 하나의 신경망에 의해 통일되게 기능하도록 유기적인 관계로 엮여 있다. 성경적인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제... 로 계속 되는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창조된 것이 인간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말들은 예수의 가르침의 주된 요점 조차 이해 할 수 없는 언술이 뛰어난 어리석은 자들의 말재간에 불과한 말이지만 인가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은 속수무책으로 광신자나 맹신자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말들이다. 하나님이라는 것, 영혼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옳은 말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 중에 가장 중요한 말이 있다면.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말이며, '하루종일 기도하여 깨어나라'는 말이다. 또한 너희가 하루종일 기도하여 깨어나는 날. 그날 너희와 나와 하나님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말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간에 갈등에서 비롯된 논쟁과 전쟁만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나부랭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할 것 없이 서로가 진리라고 주장만 하는 것이다. 올바른 앎이 겨자씨 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문명이 발전되기 전. 종교라는 말이 생겨나기 전에 존재했던 사람들에게는 '천지신명'이라는 말이 있었다. 차라리 '천지신명' 하나만을 믿는 편이 더 낫겠지만 그 또한 해답이 없기는 매 한가지이다. 옛말에 '상사병'에는 약이 없다는 말이 있다. 한자로 '相思病'이다. '서로 상'자와 '생각할 상'자로써 상대에 대한 생각에 의해서 생겨난 병이라는 뜻이다. '신경성'이라는 질병의 신경이라는 말 또한 '신'자가 귀신 신자란다. 과학은 신경에 대해서 실모양의 기관인 물질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종교는 신경에 대해서 하나님의 영적능력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둘 다 옳바른 앎이 아니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모든 앎이 이와 다르지 않다. 인간들의 모든 앎은 장님 코끼리만지기 라는 동화와 같다. 장님들은 자신들이 손으로 만져본 부분에 대해서 그것이 코끼리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은 모두 옳다.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다. 하지만 장님이 아닌 사람들이 본다면 웃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런데 사실은 장님이 아닌 사람들의 모든 주장이 장님들의 주장과 똑 같다는 것이다. 오직 자신의 앎만이 옳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그대의 앎은 어떠한가?
그대 스스로 아는 앎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말이다. 장님이 코끼리라는 이름을 듣지 못했다면 꼬끼리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만져본 부분에 대해서 코끼리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대 또한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시절에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앎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긴다. '내가 있다'라고. '육체가 나다'라고. '내가 사람이다' 라고. '내가 옳다'라고.
그대가 '내가 사람이다'라고 안다면 올바른 앎이 아니라는 뜻이다.
위의 '그대가 내가 사람이다라고 안다면 그것은 올바른 앎이 아니다'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니다. 예전에는 없었다. 석가모니의 시대에는 석가모니의 제자 몇 몇만이 그런 말에 대해서 알아 들을 수 있었으며, 예수가 존재 하던 시대에는,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불경보다 더욱 더 심하게 왜곡된 것이다. 그런데 현 시대에도 이런 말에 대해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 '도'를 공부하는 수행자들이다. 석가모니가 존재했던 시대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까닭은 그만큼 지식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이며, 문명이 발전된 만큼 인간들의 고뇌가 더 깊어지기 때문이다. 지식은 알면 아는 만큼 더 많은 의심이 생겨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시에 찔린 발가락에 통증이 느껴졌다면, 그것은 발가락이 아프다고 말하는 것인가? 뇌세포에서 감지하여 아프다는 생각이 일어난 것인가? 가시에 찔림과 동시에 찰나지간에 '아파'라고 말하지만, 아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프다는 생각이 일어난 것이다. 인간의 근원에 대해서 무지한 인간들의 모든 앎은 올바른 앎일 수 없다. 인간생명의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인간세상에 영혼이라는 것이 실재로 있다면, 영혼. 그것이 인간생명의 기원이다. 하지만 그것의 행방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세상에서는. '내가 인간이다'라고 아는 한, 찾을 수 없다.
영혼이 있다는 생각도 하나의 한생각이며, 영혼이 없다는 생각도 하나의 생각이다. 내가 사람이라는 생각도 하나의 생각이며, 내가 부처다라는 생각도 하나의 생각이다. 마음이 있다는 생각도 하나의 생각이며 마음이 없다는 생각도 하나의 생각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도 하나의 생각이며, 내가 죽었다는 생각도 하나의 생각, 한생각이며 한생각의 차이이다. 몸이 나라는 생각과 몸이 나가 아니라는 생각이 한생갹의 차이이며, 신경이 있다는 생각과 신경이 없다는 생각이 한생각의 차이이다. 영혼이 있다는 생각도 하나의 생각이며 영혼이 없다는 생각 또한 하나의 생각이며 한생각의 차이이다. 행복과 불행, 자유와 평화, 선함과 악함 등의 모든 말, 말, 말들이 그러하다. 상대적인 말에 대해서 실재라고 여기는 것은 그렇게 주입식으로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뇌 당했기 때문이다. 말, 말, 말에 의해서...
어린아이와 강아지가 뛰어 놀고 있다.
어린아이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강아지에게 '미륵부처'라고 이름을 지어 준다면. 그리고 끊임없이 그런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것들은 자신이 '예수'이며 자신이 미륵부처'라고 알게 된다. 처음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불러 줄때에 그 이름은 그져 뜻이 없는 소리이다. 하지만 계속 부르게 되면 그 '예수'라는 이름과 어린아이는 하나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예수야'라고 부르게 되면 아이가 달려온다. 이것이 이름과 형상과의 동일시의 시작이다. 명색의 동일시이다. 그대의 나의 이름이지만, 그대 또한 그대의 이름을 그대라고 생각 하듯이.
강아지 또한 이와 같다. 계속하여 그 이름. 미륵부처야... 라고 부르다 보면 그 강아지도 자신과 이름을 동일시하게 된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 모두가 그런 방식으로 세뇌 당한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세뇌 당하기 이전에는 우주 자연과 분리된 '나'라는 것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의 오류라고 한 것이다. 강아지에게는 미륵이라는 이름이 자신이듯이 그대는 '사람, 인간, 나, 이름, 마음'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거기에다 행복, 불행 등의 희로애락과 생로병사를 '나'와 동일시 하게 된 것이다. 타인들로부터 말,말, 말로 세뇌 당한 결과이다. 그것을 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대의 뇌세포에 자장된 모든 기억들은 그런 방식으로 주입된 것들이다. 그리고 주입된 모든 지식은 상대적인 언어이다.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대에게 절대적으로 추구해야 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추구해야만 한다.
만약에 행복이나 자유, 평화라는 것이 절대적인 실재이며 실체라면 인간들의 삶은 그야말로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꼭 해야할 일, 성취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들이 추구하는, 원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상대적인것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상대적이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상대적인 것들이다. 행복과 불행이 상대적이며, 선함과 악함이 상대적이며, 삶과 죽음이 상대적이듯이... 상대적인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상대적인 것들 모두는 주체가 사라지거나 대상이 사라지면 동시에 사라져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이 찾아 헤매는 모든 것들이 이와 같이 상대적인 것들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만약에 예수가 인간이라면, 사람이라고 가정한다면 예수는 인간이 무엇인지 그 근본원인을 아는 인간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이 예수의 말을 올바르게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인 말로써 예수의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왜곡시킨 것이 성경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말은 옳은 말이다.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말과 함께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되면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라고 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겠는가?
진원법으로 명명한 일념법으로써 뇌세포에 저장된 모든 생각들, 말, 말, 말... 낱말들이 모두 지워져야만 그때 비로소 모든 것의 기원인 실체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때 비로소 우주자연과 분리되지 않은 '진정한 나', '참 나'와 하나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생각의 이치를 모르는 인간은 그것을 '영혼'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 우주의 기원이며 인간생명의 기원이며, 모든 것의 기원이라고 한다. '그것'이 언어의 기원이며 우주의 기원이며, 자연의 기원이며 그릇된 나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이 그것을 깨달아 아는 날, 그 날 비로소 모든 고통과 슬픔, 환상이 사라지는 것이다. 삶과 죽음, 고통과 슬픔이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의 길을 가라.
영원한 자유와 평화를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지수화풍이 있는 세상이 있기 때문에 지수화풍이 없는 세상이 있다.
삶과 죽음이 있는 세상이 있기 때문에 삶과 죽음이 없는 세상이 있다.
그것이 나의 나라이다.
나의 나라로 오라.
진리. 오직 그것이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