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의 깨달음을 증거하는 말이 '별은 별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불교라는 종교의 경전에는 '명색'이라는 말이 있다. '이름 名'자와 '빛 色'자의 명색이다. '명색'이라는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 있다면 '소리와 형상'이라는 말이다. 인간세상에서도 흔히 사용되는 말이 '명색이 사람인데...' 라는 말이다. 그렇다. 명색이 사람이다. 이름과 형상이 사람일 뿐, 본래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별은 별이 아니다'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본래 명상이란 근원적 무지에서 깨어나기 위한 방법론이다.
'명상'이라는 말에서 '어두울 명'자와 '생각할 상'자를 쓰는 까닭은 인간의 모든 앎이 올바른 앎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지식을 버리기 위한 방법이라는 뜻에서의 명상, 즉 어두운 생각이다. 인간들에게는 이상, 사상, 이념, 통념, 관념... 등의 무수히도 많은 생각들이 있다. 이상, 사상, 이념, 통념, 관념... 등의 말들에서의 '상'이라는 글자의 뜻은 '생각할 상'자이며, '념'이라는 글자 또한 '생각할 념'자로써의 생각, 생각, 생각을 일컫는 말이다. 인간들의 모은 앎이 근원적으로 무지라고 하는 까닭은 이런 생각들, 즉 이상이라는 생각이나 사상이라는 생각, 통념이라는 생각 등의 서로가 다른 자신만의 사고방식(생각)에 대해서 옳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다. 생각은 생각이다. 생각은 모두가 동일한 생각이지만 이상이나 사상이나 이념 등의 말에 세뇌 당하다보면 오직 자신들의 생각만이 옳다는 주장에 대해서 사실로 여기게 된다. 어떤 부류들이 자신들의 생각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입시킨 결과들에 대한 표현들이 이상, 사상, 이념, 통념, 관념 등의 다른 생각들이다. 인간의 무지서 비롯된 어리석음은 어떤 다른 사람(언술이 뛰어난 자들)의 생각에 속수무책으로 이끌려 다닌다는 것이다. 공산주의 사상에 목숨을 거는 사람도 있으며, 민주주의 사상에, 자유주의 사상에, 우상숭배 사상에 목숨을 거는 사람도 있으며, 기타 우월주의 사상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 모두가 그러하다.
지금 이 글을 보는 그대는 어떤 사상이나 이상이나, 이념... 또는 관념, 통념등에 속해 있는가?
행복한 세상이 있다거나 행복한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상,사상, 관념, 통념)에 물들어 있는가? 아니면, 민주주의 사상이나 자유주의 사상이나 공산주의 사상 중에 어떤 사상이나 이상이나 또는 다른 어떤 이념이 옳다고 주장하는가에 대해서 묻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을 비롯한 모든 앎은 근원적 무지에서 시작된 것이며 무지에 속한다. 무지에 의해서 삶과 죽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생로병사의 고통에 대해서 사실로 여기는 일 자체가 무지에서 비롯된 그릇된 앎이라는 뜻이다. 삶과 죽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님을 아는 앎이 올바른 앎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명상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알아차리거나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결국에는 다른 말, 말, 말에 세뇌 당하는 것이다. 다른 말이란 다른 사람들의 말에 의해서 자아 도취에 빠지거나 최면에 빠지거나 우상숭배 사상에 세뇌 당한다는 뜻이다. 결국에는 또 다시 다른 말, 말, 말들에 묶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며, 언어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얻고 싶어 한다. 자신이 얻은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항상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평불만이 없는 사람이 없다. 명상을 통해서 얻을 것이 있다면 자신의 모든 앎이 무지라는 사실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이다. 지식(知識)이 지식이 아니라 무지(無知)라는 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깨달아 아는 것이다.
여기에서 석가모니와 예수를 비유로 드는 까닭은, 인간세상에는 오직 그들만이 지식을 모두 버리고 아는 참다운 앎, 올바른 앎에서 비롯된 말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들이다.
인간들의 '내가 있다'는 앎 자체가 그릇된 앎이며 무지이다.
이와 같은 뜻의 다른 표현 중에는 석가모니의 '나는 사람도 아니다'라는 말이 있으며, 별은 별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별은 별이 아니다 라는 말은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라는 말과도 다르지 않은 말이며,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과도 다르지 않은 말이다. 그런데 이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 있다. 예수의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말이다.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라는 말이다.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말이다.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말이다. 인간들은 명상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행복이라는 말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인간이다. 명상이란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이,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방법이다.
인간들은 노자의 '도'에 대한 설명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고 여긴다.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참다운 도가 아니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런데 뭔가 아는 듯 한 말인 것 같다. 언어를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고 한다. 언어가 그토록 미묘한 것이다. 언어가 없다는 말도 언어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모두가 상대적이며 상대적이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는 뜻이다. 어차피 우이독경이다. 그대가 인간이라면, 내가 사람이라고 안다면 이런 말들은 우이독경일 수밖에 없다. 소의 귀에 염불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명상이란 어두운 생각. 즉 일념법수행의을 일컷는 말이다. 인간들이 추구하는 이상이나 사상이나 미래의 어떤 복을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는 정신적인 일이며, 생각을 자신의 내면에 고정시키는 일이다. '일념법' 수행 방법에 대해서는 책 두 권과 카페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니 생략한다.
인간의 근원적 무지에 대한 올바른 표현이 있다면 석가모니의 '별은 별이 아니다'라는 말과 '나는 사람도 아니다'라는 말이다. 물론 예수의 말은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말이며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라는 말이다. 만약에 일념법 수행으로써 석가모니의 말과 예수의 말이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면 소위 깨달음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는 올바른 앎이며 하나의 '알아차림'이다. 통찰은 그 다음에 일어나는 것이다. 짐작하건데 카페의 회원들 중에는 이런 말에 대해서 보편 타당한 앎으로 여기는 인물들이 많은 것 같다.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 많기 때문이다.
인간의 근원적 무지에 대해서 관념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도록 설명해 보자.
근원적 무지라 함은 인간들의 '내가 인간이다'라는 앎이나 또는 '내가 사람이다'라는 앎이 올바른 앎이 아니라는 말이다. 철학이라는 학문은 인간에 대해서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정의 하는 것 같다. 무지에서 비롯된 말이다. 왜냐하면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에 의해서 (내가 사람이다)라고 안다는 것은, 경험이 없다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어린아이 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사살에 대해서 이해 하거나 짐작하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너희가 어린아이 시절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길잃은 양새끼와 다르지 않다'고 했던 것이다.
어린아이시절 또한 경험이지만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시절의 경험에 대한 기억이 없기 때문에 '내가 사람이다'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으며, 마음이 있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으며, 내가 옳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으며 이상이나 사상이나 이념이 옳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삶과 죽음이 있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행복이나 평화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 세상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환상이다. 꿈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나라고 한 것이다.
경험된 생각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며, 경허된 생각이 없다면 '내가 있다'는 것은 그릇된 앎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스스로 '우리가 사람이다'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사람이라는 말에 대한 사전의 설명이 그러하다. 지구상에서 가장 지능이 뛰어난 동물에 대해서, 그것의 이름을 '사람'이라고 짓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사람이다'라는 주장은 올바른 앎에서 비롯된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본래 명상은 깨어나기 위한 방법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라는 예수의 말과 오직 진리에 의존하라는 석가모니의 말에서의 진리란 '일념명상법'을 일컷는 말이다.
인간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올바른 앎이라면 결코 옳은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에게는 '내가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험에 바탕을 두고 '내가 사람이다'라고 아는 사람들의 말, 말, 말을 들어서 아는 앎으로써 '내가 사람이다'라고 알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별은 별이 아니다'라는 석가모니의 말과 같이 '나는 나가 아니다'라는 앎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사람의 말에 의해서 최초의 앎이 생겨 났다면, '내가 사람이다'라고 아는 앎은 그릇된 앎이라고 아는 앎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위와 같은 말은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만이 이해가 가능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적으로도 이해 할 수 있는 말은 (기억할 수는 없으나) '어린아이 시절에는 '내가 남자라거나, 내가 여자'라고 아는 앎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와 강아지에게는 '나와 너'라는 분별된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다. 분별이 아닌 생각에 대해서 순수의식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인간들의 모든 앎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 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근원적 무지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들의 모든 앎이 겨자씨 만큼도 올바른 앎이 아니라고 하는 까닭이다.
행복이라는 말과 불행이라는 말이 상대적인 말이다. 공산주의라는 말과 개인주의라는말이 상대적인 말이다. 너와 나라는 말이 상대적인 말이다. 자유라는 말과 구속이라는 말이 상대적인 말이다. 삶이라는 말과 죽음이라는말이 상대적인 말이다.
더 나아가 마음이 있다는 말과 마음이 없다는 말이 상대적인 말이다.
기분이 좋다는 말과 기분이 나쁘다는 말이 생대적인 말이다.
맛이 있다는 말과 맛이 없다는 말이 상대적인 말이다.
인간들의 文明이라는 말은 문지에 대해서 밝음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명상이라는 말은 '어두울 명'자와 '생각할 상'자로서 어두운 생각을 하라는 말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의 관념으로써는 이해를 넘어선 말이 명상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자신들의 명상법이 옳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석가모니가 위빠사나 명상을 했다고 주장함에도 서슴치 않는다. 석가모니의 말을 단 한구절도 올바르게 알아들을 수 없는 자들이 석가모니의 제자라고 상을 낸다. 예수의 말에 대해서 단 한구절도 올바르게 알아드을 수 없는 자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하며, 예수를 석가모니를 우상으로 숭배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세상에는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논쟁과 투쟁, 그리고 전쟁의 연장선이다. 전쟁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며 평화롭기를 바라는 것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들이 인생에 대해서 서로가 옳다고 주장한다. 논란이다. 올바른 앎이 아니라 오직 자존심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존심이라는 말 자체가 착각의 산물이며 그릇된 앎인 무지에 의해서 가공된 앎이다.
명상이란 인생의 해답을 찾는 길이며, 자아의 완성을 위한 유일한 길이다.
서가모니와 예수의 가르침의 근본이 명상이다.
명상과 진리는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일념법. 일념윤회법. 진원법이 진리이다.
진리에 의존하라.
진리. 오직 그것이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