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이란 궁극적으로 인간생명의 비밀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 무엇인지 모른다. 인간의 기원, 인간의 근원인자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인간이라는 동물의 무리들이다.
인간은 스스로 인간에 대해서 "지구상에서 지능이 가장 뛰어난 동물"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스스로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동물이 사람이며, 사람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은 '내가 사람이다'라고 아는 한 누구나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경험이전의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이해 할 수 없다. 인간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 스스로 우리가 '인간'이며 '사람'이라고 단정짓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 이전의 사고방식인 '순수의식',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이라는 말로 규정되는 어린아이에 대해서도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당연한 논리이다.
하지만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에게는 '내가 사람이다'라는 분별된 생각이 없다. '내가 인간이다'라는 생각이 없다. 내가 동물이라는 생각도 없으며,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도 없으며, 내가 있다는 생각도 없으며 내가 없다는 생각도 없다. '내가 여자'라는 생각도 없으며, '내가 남자'라는 생각도 없다. 우주가 있다는 생각도 없으며, 우주가 없다는 생각도 없다. 부모가 있다는 생각도 없으며 부모가 없다는 생각도 없다. 죽음이 있다는 생각도 없으며, 삶이 있다는 생각도 없다. 내가 태어났다는 생각도 없다. 희로애락이라는 생각도 없으며, 말도 없으며, 생로병사라는 생각도 없으며 말도 없다. 근심과 걱정이 없으며 고통이라는 생각도 없다. 언어가 없다. 마음도 없으며, 생각도 없다. 없다는 생각도 없으며, 있다는 생각도 없으며, 없다는 말도 없으며 없다는 말도 없다. 없다. 본래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로 지어진 것들 모두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이런 사실에 대해서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사실이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사실이다. '사실'이라는 말은 '일 사'자와 '열매실'자로써의 '사실'이라는 말이며, 과실을 보는 것과 같이 실제라는 말이다. 이런 말에 대해서 진실된 말이라고 한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다.
'순수의식'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어린아이'가 있다. 순수의식이라는 말은 의식이 순수하다는 말로써 '의식'이 없다는 말이다. 의식이 있으되 '나'와 '너'라는 상대적인 분별이 없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사실상 어린아이의 상태에 대해서 언어로 규정짓는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언어로써는 언어가 없는 상태에 대해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가 없다'는 말 또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린아이의 순수의식에 대해서 연구하거나 또는 무의식, 잠재의식 등에 대해서 연구하거나 또는 마음이나 정신 그리고 영혼에 대해서 연구 하는 모든 행위들은 사실상 쓸모 없는 짓들이다. 만약에 그런 것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알고자 한다면 언어의 근본원인에 대해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 언어의 근원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것이 곧 영혼을 아는 것이며, 마음을 아는 것이며, 순수의식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은 결코 언어의 기원에 대해서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다른 말, 말, 말들을 창조해 나가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지식이며 문명이며 과학이라고 한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이 경험의 오류라는 사실에 대해서 납득할 수 없다. 그것이 지식의 한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은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사실이라고 여기는 것들 모두가 사실이 아니며 사실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의 첫번째 오류는 '내가 있다'는 앎이다. 말을 배우기 이전의 어린아이서절에는 '내가 있다'는 앎이 없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없다'는 앎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앎이 없다는 앎도 앎이며, 앎이 있다는 앎도 앎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있다'는 앎과 '내가 없다'는 앎이 상대적인 앎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적인 모든 것들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는 상대적이라는 말과 절대적이라는 말이 공존한다.
본래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본래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본래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영혼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우주가 있었던 것도 아니며, '나'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경험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의 말, 말, 말에 의해서 그렇게 알게 된 것이다.
지식의 상징은 과학이다.
과학은 모든 물질의 근본 원인 인자에 대해서 입자와 파동이라고 주장한다. 태양의 빛에 대해서도 입자라고 주장하거나 파동이라고 주장한다. 둘다 옳바른 앎이 아니다. 입자와 파동 또한 그것을 인식하는 '내가 사람이다'라는 주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있다'는 주체는 객체와 상대적이다.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가 있기 때문에 입자와 파동이라는 대상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내가 본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다. 육체가 '나'라는 생각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론이나 이치적으로는 지적으로도 이해가 가능한 말이다. 과학이거나 문학이거나... 인간들의 학문으로써도 이해 할 수 있는 말이 '주체가 없다면 대상이 없다'는 말이다. 주체가 있기 때문에 대상이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또한 언어가 있기 때문에 '나와 세상이 있다'는 말과도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언어가 없다면 어떨까' 라고 가정할 수도 있겠지만, 언어가 있다는 말도 언어이며, 언어가 없다는 말도 언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문제만 무성할 뿐 해답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세상의 모든 학문들이 이와 같다.
신학이라는 학문은 존재계 자체에 대해서 '신의 창조물'이라고 주장한다. 최 첨단 과학이라는 것들 조차도 영혼이 무엇인지, 마음이 무엇인지, 정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심리학이거나 정신분석학이거나, 신학이거나... 인간들의 지식의 한계는 이미 스스로 확인된 것 같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아는 것일까?
인간은 누구나 꿈을 꾼다.
누구나 희망을 말하며 더 멀리, 더 높이, 더 행복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행복하거나 평화롭거나 자유로울 수 없는 까닭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이 오류라는 사실에 대해서 깨달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있다'는 앎이 상대적인 앎이며 그릇된 앎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있다'는 것은 '내가 죽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내가 있다는 드러나는 마음의 내면에는 '내가 죽을 것이다'라는 어두움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이라는 불치병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아무도 알 수 없다.
인간들은 과학에 의해서 밝혀질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정장 올바르게 아는 앎이란 아무것도 없다.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며, 영혼이 무엇인지 모르며, 잠든 동안에 일어나는 사건인 '꿈'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문명이라는 말이 생겨나면서부터 인간은 과학이 인간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아득한 옛날이나 현 시대가 행복한 사람은 없다. 종교들이 난무하고 득세하는 세상을 넘어서 이제 '명상'이라는 말이 득세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만약에 인간들이 문명의 발전으로써 행복할 수 있다면 종교라는 말이나 명상이라는 말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 무엇인지 모른다.
언어가 없었던 순수의식의 어린아이 시절에 '내가 있다'고 알았던 최초의 앎이 상대적인 앎이며 그릇된 앎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있다'라는 앎이 경험의 오류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문명이라는 말은 문자의 밝음이라는 말이며, 말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앎이 경험의 오류이다. '내가 있다'는 앎이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의 최초의 앎이며 그 최초의 앎이 오류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한 방법이 '명상'이라는 말이다. 명상이라는 낱말의 '명'자는 '어두울 명'자이며 '상'자는 '생각할 상'자이다. 생각은 생각이지만 '어두운 생각'을 하는 것이 명상이라는 것이다. 어두운 생각이라는 말은 표면으로 드러나는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내면에 대해서 생각하라는 뜻이다.
일념법이라는 명상법은 무한한 잠재 능력을 찾는 일도 아니며, 불행과 상대적인 행복을 찾는 일도 아니다. 자신의 '나'와 다른 대상에 대한 동일시에 대한 착각에서 깨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내가 있다'라는 앎이 착각이다. '마음이 있다'는 앎이 착각이다. '육체가 나라는 생각'이 착각이다. 마음이 나라는 생각이 착각이다. 불행과 상대적인 행복이 있다라는 앎이 착각이다. 선함과 악함이 있다는 앎이 착각이다. 삶과 죽음이 있다는 앎이 착각이다.
마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와 강아지에게는 마음이 없다.
어린아이 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생로병사의 고통을 사실로 여기는 것이다.
고통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본래 없는 것이다.
신을 찾는가?
그대 안에 있는 것이다.
진리의 길을 가라.
일념명상법이 진리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