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서 인연법과 연기법에 대해 설명한 바와 같이 인연법이라는 말은 하늘과 땅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있는 것이라는 인간의 관념으로써의 앎이며, 연기법이라는 말은 인간이 관념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설명했다.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은 지식으로써 연기법이라는 말을 이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연기법이라는 말의 본래의 뜻은 무명에 의해서(경험의 오류에 의해서) 있는 '그릇된 나'가 있기 때문에 우주가 있는 것일 뿐, 우주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며 '나'라는 것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창조된 말이다.
연기법이라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본래의 뜻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는 말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무명과 행에 의해서 식識(앎)이 생겨났으며 그 앎에 의해서 감각기관의 작용과 감촉 등의 느낌을 알게 된 것이라는 말이며, 그 느낌을 알게 된 것의 원인에 대해서 '마음'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섯가지의 감각기관과 감각에 의해서 알게 된 촉감을 합하여 여섯가지의 앎과 여섯가지의 앎의 대상인 '색성향미촉법'이라는 앎(생각)이 끊임없이 반복 순환됨을 이르는 말이다.
연기법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다섯가지의 감각기관의 작용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설명하기 위한 방편설이다. 또한 마음의 작용에 대해서 '수상행식'이라는 말로 표현된 까닭은 무명과 행에 의해서 얻어진 앎에 따른 생각이 끊임없이 윤회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그 윤회작용을 끊어 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가공된 줄 모르는 마음이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초기경전에는 '마음'이라는 말이 없다. 석가모니의 말이 한자로 전해 지면서 왜곡될 수도 있었겠지만, '수상행식'이라는 말이 마음이 작용을 일컫는 말이며, 12연기법 또한 마음의 작용이 감각기관의 작용에 의한 생각의 윤회라는 뜻이다. 이는 또한 생각의 끊임없는 윤회작용이 마음이라는 뜻이며, 사유라는 말에 대해서 설명한 바와 같이 올바른 앎에 바탕을 둔 사유로써 마음의 실체를 깨달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때 고통이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아는 앎이 올바른 앎이라는 말이다.
이곳 카페와 더불어 일념법, 일념 명상법을 수행하는 인물들이라면 생각이 마음의 뿌리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앎으로써 마음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담는 그릇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으로써 앎이기 때문에 한치의 의구심이 없는 앎이다.
12연기법이라는 말의 결론적인 말은 인간의 고통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무명과 행에 의해서 얻어진 앎이 '명색'으로써의 허구일 뿐, 올바른 앎이 아닌 앎에 대해서 사실로 여기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두려움과 고통의 주된 원인은 '내가 사람이다'라고 아는 그릇된 앎에 의해서 말, 말, 말로 가공된 허구라는 말이다.
인간의 모든 앎은 허구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모든 앎의 바탕이 '내가 사람이다' 라고 아는 '그릇된 앎(원리정도몽상)에 바탕을 둔 앎이기 때문이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의 오류이다.
인간은 누구나 본래 인간이 아니라 이름 지을 수 없는 순수의식이다.
순수의식을 기억할 수 없다. 하지만 기억할 수 없는 순수의식 시절에 타인들의 말에 의해서 "내가 사람이다" 라고 세뇌 당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다. 어린아이 시적에 대해서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사람이라고 아는 앎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본래 사람이 아니었다.
육십억 인류 모두가 '사람은 본래 사람이 아니다' 라는 말에 대해서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내가 사람이다'라는 앎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린아이 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거 없는 말이다. 사실 무근이다. '내가 사람이다'라고 아는 앎에는 어떤 근거도 제시할 수 없는 것이 '내가 사람이다'라는 앎에 대해서 의심조차 할 수 없는 육십여억명의 인간이다.
사실상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런 사실 즉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 말,말의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관심 조차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들의 삶에 있어서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내가 사람이다'라는 착각, 원리전도 몽상, 꿈과 같은 현실에서 깨어나야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세상이 평화롭기 위해서는 '사람은 본래 사람이 아니다'라는 사실에 대해서, 그런 사실이 절대 다수의 인간들의 보편적인 앎, 일반적인 상식이라야만 할 것이다.
'사람은 본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명상이며, 사유이다. 인간의 관념으로써는 어린아이 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이해 할 수 없는 것 뿐이다. 하지만 아니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는 단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하여 논쟁으로써 해답이 나올 수도 없는 문제 아닌 문제이다. 이런 사실은 어떤 법으로도 판단할 수 없다. 그대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내가 사람이다'라는 말(앎)이 사실에 바탕을 둔 말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내가 사람이다" 라고 당연하게 여기지만 그 당연하다는 앎(말)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올바른 명상과 올바른 사유로써의 알아차림이란 이렇듯 분명하고도 명백한 앎이다. 남들의 말 따위에 이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앎으로써 의심이 없는 앎이다. 남들이 두렵다고 하여 나도 두려워 해아만 하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는 앎이기 때문에 올바른 앎이라고 하는 것이다.
올바른 앎이란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이다. 인간들의 모든 앎이 허구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이기 때문에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고 한 것이며, 나의 말을 옮기는 말라고 했던 것이다.
'사람은 본래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는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일념법 명상으로써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에게는 가야할 길이 보이는 말이며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다.
관념으로나마.... 지적으로나마 이런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을때, 그때 비로소 예수의 말과 석가모니의 말의 진의 여부를 가릴 수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말과 예수의 말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간략히 한 구절에 대해서만 설명하자면.
예수의 가르침 중에는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말과 함께 '몸 밖에서 하나님을 보니라'라는 말이 있다. 육체가 나라는 착각에서 깨어남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석가모니의 '나는 신도 아니며, 용왕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며, 더 나아가 나는 사람도 아니다'라는 말 또한 같은 맥락이다. '내가 사람이라는 착각' 육체가 나라는 착각에서 깨어나야만 부처이며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앞장에서 연기법에서의 '무명'과 '행'에 대한 설명을 더하자면.
'무명의 행위'(무명. 행. 식)인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와 강아지에게는 '나라는 생각'이 없으며, '내가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자신이 어린아이라는 생각이 없다는 말이며, '어린아이'라는 말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의 관념에 의해서 생겨난 말이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지능이 가장 뛰어난 고등 동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인간이다. 이 말은 '인간은 본래 인간이 아니다'라는 말이며, 스스로 고등 동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경험이전의 사고방식인 어린아이의 순수의식(무명의 행위, 무의식, 잠재의식)에 대해서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내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림들의 착각이다.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에게는 '나는 사람이다'라는 생각도 없으며, '나는 사람이 아니다' 라는 생각도 없다. 물론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는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말이지만 사실에 바탕을 둔 말이며 사실이다. 다만 인간이 이런 사실 즉 어린아이의 생각에 대해서 납득할 수 없는 까닭은 인간에게는 생각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험에 바탕을 둔 분별된 생각들이 저장된 곳이 뇌세포이다. 뇌 세포의 모든 생각들이 사라져야만 어린아이의 순수의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기 위한 방법이 명상이라는 것이며 올바른 앎에 바탕을 둔 '사유'이다.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본래 인간이 아니다' 라는 사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분명히 설명했던 인물이 유일하게 '석가모니'이다. 또한 우주가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최초로 밝혔던 인물 또한 석가모니이다. 물론 예수의 말 또한 석가모니의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는 인간의 관념으로써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될 것이다.
본래 명상이란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는 앎인 올바른 앎, 진실된 앎을 알기 위한 유일한 방법에서 비롯된 말이다. '사유'라는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 '일념법이며 일념명상법'이며 이름하여 진원법이다. '진리의 근원에 이르기 위한 법이라는 뜻으로써의 '진원법'이지만 '불법'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며, '진리의 길'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지식은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에 대해서 '무의식, 잠재의식' 등으로 표현 하며, 그것에 대해서 상상하려 한다. 어린아이의 성장단계에 대해서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많지만, 모두 올바른 앎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관념에 바탕을 둔 상상일 뿐, 헛소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 분석학이나, 심리학 등의 무수히 많은 학문들이 있으나... 모두가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나라는 그릇된 앎에 바탕을 둔 환상에서 비롯된 착각의 산물일 뿐, 올바른 앎이란 단 하나도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의 모든 앎에 대해서 '겨자씨 만큼도 올바른 앎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들의 모든 지식들... 문명文明이 아니라 無明무명이다.
연기법의 세번째 낱말이 '식(識)'이다.
'알 식'자로써 앎을 이르는 말이다.
강아지와 어린아이의 행위는 '무명의 행위'이다. 識(앎) 이 없는 행위이다.
눈 밭에서 뛰어 노는 강아지와 어린아이의 행위는 '무위'이다. '무위'라는 말은 '행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행위는 있으되 주체(행위자)가 없음'을 일컫는 말이다. 강아지가 자라서 더 큰 개가 되더라도 여전히 무명이며 무위이다. 그런데 강아지와 다를 바 없던 '순수의식의 어린아이'는 성장 하는 과정(말, 말, 말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내가 있다'는 앎이 생겨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책에 자세히 설명되었으니 여기서는 요약하려 한다)
말문이 열리지 않았던 어린아이가 어느날 갑자기 '내가 할꺼야'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것이 최초의 분별이며 하나의 생각이다. '내가 나라는 하나의 생각'이 생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수없이 듣고 또 들어서 알게된 첫번째의 식識, 최초의 (앎識)이 생겨난 것이다.
'내가 있다'라는 앎은 '육체가 나다'라는 앎이 내포된 말이다. 그리고 그 첫번째의 앎인 식은 올바른 앎이 아니라 명색으로써의 앎이다. 명색이라는 말,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다면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본질을 볼 수 있는 말이다.
다음 6>편에 계속 하자.
'名色'이라는 말의 올바른 뜻, 그리고 석가모니와 예수의 가르침의 요점이 명색이라는 낱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그리고 '연기법'과 '12연기법'의 차이에 대해서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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