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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참선. 기도. 묵언. 묵상. 수행. 진리의 길((마음 찾는 일))의 오해와 진실 - 1) 허무한 나그네

일념법진원 2014. 3. 4. 09:45

명상하는 사람. 구도자. 수행자. 수도자. 참선 하는 사람. 도를 구하는 사람. 도를 닦는 사람. 모두 같은 뜻의 다른 표현으로써 자신의 '마음'의 실체를 찾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들이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의 근원(고통의 원인)을 찾았던 사람들에 대해 통칭으로 표현되는 다른 이름이 '부처'이며, '도를 깨달은 사람'이며, '성령'이며, '하나님 나라를 본 자'이며, '스스로 승리한 자'라는 뜻의 '스승'이다. 

 

본래 '기도'라는 말은 '예배를 드린다'는 말이나 또는 '경배를 드린다'는 말로써 '존경'이나 '존중'을 의미한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나 예수의 가르침이 우상숭배사상으로 왜곡(날조)되면서 '내가 남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도록 능력(힘. 기적)을 달라'는 사고방식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언술이 뛰어난 자들의 사고방식(생각)에 의해서. 

 

"'도'를 닦는다"는 말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은, 세상을 등지고 뭔가 세상과는 다른 신비스로운 것을 찾기 위한 일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구도자'라는 말이나, '수도승'이라는 말 또한 생활전선에 매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져 뜬구름 잡는 사람들이거나, 또는 신비로운 세상을 찾는 사람들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특히 머리 깎은 중생들이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에 대해서도 모호하기만 하다. 

 

사실. 종교(宗敎)라는 말이 '으뜸 종'자와 '가르칠 교'자로써 '으뜸 가르침'으로 표현되는 이유는 인간의 모든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본래 종교는 '마음의 근원, 의심의 근원'을 깨달아 알았던 인물들을 우상으로 숭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참다운 인생의 길, 고통과 괴로움을 없애기 위한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다. 인간이 겪어야만 하는 생로병사의 모든 고통이 '마음의 작용'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깨달았던 인물들, 소위 성자, 성인으로 불리는 인물들만이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종교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며, 종교의 근본은 본래 '진리'이다. 

현 시대에는 물론 여타 수많은 종교들과 같이 우상을 숭배하는 집단에 불과하지만 '달마어록'이나 '육조 혜능'의 남겨진 글로 미루어 볼때, 그 시대에 불교라는 종교는 '마음을 찾기 위한 수행자들에게 필수적인 장소'였던 것 같다.

 

본래 종교는... 우상숭배사상을 주장(조장)하는 집단이 아니라,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다.

 

 

그 시대부터 전해져 오는 말이 '선 승'이라는 말이며, '참선'이라는 말이며, '선 수행'이라는 말이며, '선불교'라는 말이며, '선문답'이라는 말이며, '선지식' 등에 쓰이는 말로써 '선'자는 '고요할 선'자의 '禪'이다. 이런 禪의 본래의 뜻은 '선심'이라는 말과 같이 '착한 마음'이라는 뜻이 아니라 '고요한 마음'이라는 뜻으로써 '마음의 고요함, 마음의 평온함, 마음의 평화로움'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그 절정에 이르는 말이 '해탈'이라는 말이며, 마음을 이해 하고 해석하여 종국에는 마음에서 탈출한다는 뜻이다. 이는 마음 안에서 헤매는 것이 아니라, 마음 밖에서 몸을 본다는 뜻이니. 예수의 '네 안에 하나님이 있으되, 몸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인간은 지성체이다. 지성체라는 말은 지식으로써 '자기 자신이 구성되었음'을 일컫는 말이다. 경험에 의해서 알게 된 모든 앎들이 자신의 나다. 그런데 지식과 하나된 사람들은 자신과 지식은 다른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지식은 소위 '도를 닦는 일'이라는 '수행'에 대해서 올바른 앎이 없다. 아니. 올바른 앎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지식은 수많은 말들, 즉 '심리학'이나 '정신학' 등의 수많은 학문으로써 마음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 궁리할 뿐, 마음이 무엇인지, 마음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감히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 조차 불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일념'수행으로써 일념을 깨달은 인물들은 '마음이 무엇인지' 그 원인에 대해서 스스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이 무엇인지 아는 것. 그것은 지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단순히 마음을 이해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세상 모든 학문을 통털어 최고의 지식이다. 우주를 여행 하든 말든... 일념을 깨달아 마음의 원인에 대해서 이해 하기 시작한 인물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지식들은 초라하기 이를데 없는 하찮은 것들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인간의 모든 학문을 비롯하여 자신의 마음 까지도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소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허덕이는 사람들은 '도를 닦는 일((마음의 근원을 찾는 일))'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지식으로써는 이해 조차 불가능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산중에서 홀로 살거나 무리지어 살면서 일상을 벗어나 상식을 뛰어 넘는 헤괴한 짓들에 대해서 '도를 닦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리거나 불치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산중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도를 닦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 생각에 대해서 통념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 같다. 

 

사실. 인간들의 '종교를 통한' 기도 행위나, 참선 행위나, 명상 행위나, 묵상 행위... 등의 모든 행위들의 본래 목적은 '자신의 마음의 실체'를 찾기 위한 정신적인 행위'에서 비롯된 것들이지만, 지식은 이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수많은 집단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철학이나 과학이나 신학 등의 인간의 지식이라는 모든 학문들로써도 마음이 무엇인지 그 실마리 조차 찾을 수 없다. 심리학이라는 학문도 있으며,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도 있지만... 마음이 무엇인지 그 근원을 밝힐 수 없다. 왜냐하면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의 사고로써는 '잠재의식, 무의식'의 상태에 대해서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 더 아이러니 한 것은 그것에 대해서 설명을 하더라도 이해 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해 조차 불가능한 까닭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의 언어가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상대적인 언어에 세뇌 당함으로 인하여 언어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무감각해져버렸기 때문이다. 

 

지식은 '선업'과 '악업'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전생의 업'이라는 말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며, 예수의 말은 왜곡되어 '원죄'론 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식으로써도 '선과 악'이라는 상대적인 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선'의 입장에서 볼때는 대상이 '악'이 있지만, 악의 입장에서 본다면 '선이 선이 아니라 악'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상가들이 있다. 공산주의가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민주주의나 자유주의'가 최고의 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령 남한의 입장에서 보면 북한은 적이다. 하지만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남한이 적이다. 입장(관념)이 서로 다를 뿐이다. 이와 같이 인간 경험에 바탕을 둔 지식으로써의 모든 앎(관념)은 의 편견이다. 남한과 북한의 갈등과 같이 그대 또한 그대의 말을 잘 듣고 따르는 아이(사람)는 '착할 선'자의 착한 아이이겠지만 그대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아이는 악한 아이(사람)라고 주장할 것이다.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끼리는 자신들만이 선이며 진리라고 주장하며,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끼리도 자신들만이 선이라고 주장하며, 진리라고 주장한다. 오직 그대 자신의 관념으로 볼때, 옳고 옳지 않음이 명백하다. 오직 '나'자신의 관념이 옳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 관념이라는 단견이며, 편견이며, 소견이기 때문에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누가 선이며 누가 악이겠는가? 상대적인 관념에 대해서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며 싸운다면... 둘 다 선이 아니라 둘 다 악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지식.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의 편견에서 비롯된 어리석음이다. 단지 그것 뿐만이 아니다. 그대와 갈등을 빚는 모든 대상들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상대적인 관념으로써, 상대적인 언어에 세뇌 당하여 오직 자신, 자신들, 자신들의 무리들만이 진실이라고, 진리라고 주장 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같은 '상대적인 언어로써는 표현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참다운 도가 아니다"라는 말이 '노자와 장자'의 '도관'이다.    

 

사실. 지식은 모든 것들에 대해서 다 아는 것 같지만,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모르기 때문에 무지가 아닐 수 없다. 그 하나 모르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며 다른 이름이 '정신'이며, 다른 이름이 욕망다. 

 

인생이 허무한 나그네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길잃은 어린 양'과 같이 가야할 올바른 길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에는 분명한 길이 있다. 그 길을 밝혔던 인물들이 소위 인류의 성인. 성자 등으로 등록된 '소크라테스와 석가모니이며, 예수이다. 물론 그 이외에도 '불이일원론'을 역설 했던 인물들이 있었으며 지금 그들의 가르침을 전하려는 것이다.

 

이 글을 보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면, 두권의 책과 이곳 카페에 올려지는 모든 글들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으로써의 자기 주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며 또한 그대(인간)의 순수의식에 바탕을 둔 말이다. 여기서 진리라는 말로 표현되는 '일념법' 또한 이 사람이 창안한 것이 아니라 본래 있던 것을 깨달아 알았기 때문에 전하는 것이다.

 

석가모니와 예수 그리고 노자와 장자 등의 남겨진 말들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그들의 말과 지금 쓰여지는 글들과의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의 말은 그들의 시대와 상황. 조건에 따른 그들이 존재 하던 시대의 보편적인 언어를 빌어 설명한 것이며, 지금 쓰여지는 글들은 현 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언어를 빌어 설명한다는 것 뿐이다. 현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해가 가능한 표준말을 사용한다. 그리고 올바른 앎을 전하기 위한 과정에서 분명하지 않은 낱말에 대해서는 한글 사전의 뜻과 본래의 뜻에 대해서 비교하여 설명한다.

 

지금부터 쓰여지는 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올바르게 이해 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식'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인간에 대해서 '지성체' 즉 (인간=지성체)라고 표현하는 까닭은, 개체적 자아는 지식에 의존하여 지식으로 구성된 것이 '자기 자신'이며, '나(我)' 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순수의식의 어란아이 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다. 그 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는 까닭은 '무언無言' 즉 언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언어'이다. 말을 배워서 알기 이전에는 '나'라는 주체가 없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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