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이란 무엇인가?
식자우환이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아는 말이며,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이다. 누구나 아는 말이지만, 사실 왜 지식이 병이라고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올바르게 아는 사람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식자우환이다. 만약에 -지식이 병이다- 라는 말에 대해서 올바르게 아는 사람들이 현 시대의 지식이라면 아마도 교육이나 학문 따위는 이미 벼려졌을 것이다.
지식의 앎이 참으로 신비스러운 것은 항상 상대적인 말들에 대해서 서로가 주장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최고의 지식층이 -아는 것이 병이다- 라고 주장한다면, 다른 지식층은 -그렇다면 "모르는 것이 약이냐" 라고 주장할- 것이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둘 다 올바른 앎이 아니라는 말이다.
둘 다 올바른 앎이 아니라고 아는 앎이 참다운 앎이라는 말이지만, 이런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는 것이 지식이다. 다만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에게는 상식이며, 보편타당한 앎이라는 것이다.
인간들의 삶이라는 인생 또한 그러하며 인간의 모든 지식이라는 앎들이 그러하다. 올바른 앎이 없기 때문에 서로가 주장하는 것이 지식이다. 그렇다 보니 예외 없는 법이 없다. 인생에 해답이 없다. 질병은 무수히도 많은데, 인생에 정답이 없듯이 질병들 또한 무수히도 많지만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지식이며 지식의 한계이다.
그렇다 보니 인간 지식은 다수결이라는 말을 창조하고 그것을 원칙이라고 한다.
다수결이 원칙이다. 어불성설이다.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주장하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옳은 것이 되어 버린다.
두둑질을 하거나, 살인을 하거나, 심지어 종교들 마져도 다수결 원칙이 적용된다. 그렇다고 하여 그대의 인생마져도 다수결 원칙에 따라야 하는가?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자신의 인생길이나 자신에게 깃든 몸의 질병들 까지도 자연스럽게 다수결 원칙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긴다. 그것이 옳거나 그르거나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 더 똑똑해 보이는 사람들이 가기 때문에 나도 쫒아가는 것이다. 남들이 시장 가니, 나도 따라가는 격이다.
사실 열등감을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학력이 모자라는 사람들이 아니라 학력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다. 대학의 강사들이나 또는 조교수들이 더 큰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며, 가장 지능이 우수하여 사회로부터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 받는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 열등감이다. 그들은 더 높은 지식층들 앞에서는 자신의 앎이 초라하기 때문에 열등감은 상대적으로 더 크기 때문이다.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를 외치는 사람들은 가난하거나 학식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명예를 얻거나 부자거나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라. 모두 똑 같은 무게를 지니고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사람이라고 알지만, 누구나 정답이 없는 인생을 살기는 매 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구도자, 도를 닦는 사람, 수행자... 등으로 불리는 사람들이며, 그들에 대해서 고행자라고 하는 것 같다. 사실 인간들의 삶 자체가 모순이다.
세상에는 간혹 -인생이 무엇인지- 그 정답을 찾은 인물들이 있다.
그들의 말은 단순하다. 진리가 단순하다는 말과 같이 그들의 말은 간단 명료하다.
윤회가 없다고 한다. 근심하지 말라고 한다.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 라고 한다. 그런데 지식은 이런 말에 대해서 알아들을 수 없다.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사실 -아는 것도 병이며, 모르는 것도 병이다- 지식의 앎은 상대적인 분별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런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이다. 인간의 모든 지식, 모든앎에 대해서 '겨자씨 만큼도 올바른 앎이 없다'는 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 상대적인 것이며, 상대적인 말이다.
안다는 것도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 앎이 아니며, 모른다는 것 또한 상대적인 것으로써 올바른 앎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앎이 올바른 앎이란겁니까? 라고 따지고 싶겠지만... 스대 스스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이라고 한 것이며, 길잃은 어린 양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말을 옮기지 말라고 한 것이며, 나의 말 -불경이라는 경전-에 대해서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고 한 것이다. 소리와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고 한 것이다.
인간의 앎이란 오직 "있는 것, 드러나는 것"에 대해서만 아는 것이다. 인간이 있기 때문에 질병이 있지만, 인간이 왜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인간의 기원, 근원, 인간의 원인인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지몽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는 날까지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인간이며 인생이라고 주장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사실 올바르게 알고 보면, 인간들의 삶 자체가 우환이다.
자신의 나가 무엇인지 조차 올바른 앎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의 나는 무엇인가?
아무리 찾아 보더라도 그대에게 기억된 지식이 전부이다. 그대의 이력서가 나이며, 그대의 이름이 나이며, 그대가 끌어 모았던 지식이 나이다. 그것에 대해서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이라고 한다. 이 말은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지식. 기억세포에 저장된 생각들...)이 없다면 "나는 없다"는 말-이다.
지식은 '생명의 근원, 생명인자'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아니. 지식으로써는 그것을 밝혀 낼 수 없다. 왜냐하면 '생각의 원리'에 대해서 무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각에 의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감히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 지식은 이런 말에 대해서는 이해 할 수 있다
- 인간에게 드러나는 모든 각종 질병들이 '어린아이 때부터' 본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라는 말에 대해서이다.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 질환들, 그리고 혈액에 관련된 모든 질병들, 신경성 질병들, 심지어 땅콩이나 사과 등, 특정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알러지'라는 질병들을 비롯하여 무수히도 많은 이름의 난치병이나 불치병 등의 질병 등의 인간에게 나타나는 모든 병들들이 그러하다.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신경성 질병들에 대해서 불성이나 성령이라는 말에 대입시키려 한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생각의 작용에 대해서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념법, 진원법, 일념명상법, 일념윤회법.... 등으로 표현되는 '법, 방법'이 있다.
이런 정신적인 행위의 목적은 이런 -인생에 해답이 없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한 법이며 방법이다. 오직 일념법으로 표현되는 그 방법만이 자아(인간)의 기원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진리의 길이라고 한 것이다.
이곳의 모든 글들은 인간 지식인 상대적인 사고방식에 바탕을 둔 말이 아니라, 상대적이지 않은 앎에 바탕을 둔 말들이다. 진실된 말이기 때문에 진리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말이다. 석가모니의 말과 예수의 말, 그리고 노자와 장자, 소크라테스 등의 진실된 말들이 왜곡되고 변질되지 않았더라면 굳이 다시 설명할 일은 없었겠지만, 그들의 말은 이미 심하게 왜곡되어 우상숭배 사상으로 전락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다시 설명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대에게 -어린아이 시절에는 없었던- 질병이 생겨났다면, 그리고 그것이 난치병이거나 불치병이기 때문에 의학이나 한의학이나, 자연건강학이거나... 등의 인간 지식으로써 해결할 수 없는 질병이라면- 그렇다고 하더라도 완치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사실 예수의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 는 말은 사실상 그대의 지식(마음) 이전에 그대 '생명의 비밀'이 있다는 말이며, 그것을 볼때, 새생명으로 거듭 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진리로 거듭난다는 말은 온갖 질병에서 벗어난다는 말과 함께, 삶과 죽음이 본래 없는 이치, 시간과 공간이 본래 없는 이치에 대해서 깨닫는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인 -소리와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소리와 형상이 없다-는 말은, 여래를 보면 '본래무일물'이라는 뜻으로써 언어가 없는 세상이라는 말이다. 언어가 없는 세상이라는 말은 -어린아이의 순수의식-과 같은 뜻으로써 명색이 인간의 본래성품이라는 말이다. 말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는 '세상'이 없다. '세상'이라는 말, 말, 말이 없다.
질병에 대한 설명이 왜 이리도 복잡할까?
아니다. 사실은 가장 단순하고 간단 명료한 말이다. 그대가 일념을 깨닫지 못했다면 감히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 할 수 없는 말이겠지만... 일념을 깨닫고 더 나아가 많이 아는 거룩한 인물들에게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며, 그져 보편 타당한 앎일 뿐이다.
인간에게 드러나는 모든 질별의 원인은 스트레스이다. 하지만 지식으로써는 스트레스가 무엇인지 조차 이해 할 수 없다. 마음이 있기 때문이며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별된 생각들이 스트레스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이 사실적인 것이라고 인식함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념을 깨닫는다는 것은, -마음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이다. 이런 앎에 대해서 올바른 앎이며, 참다운 앎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이 있다"는 생각도 기억세포에 저장된 수많은 생각들 중 하나의 생각이며, "마음이 없다"는 생각 또한 경험에 바탕을 둔 생각들 중 '하나의 생각'에 불과한 분별된 '생각'이다. 영혼이 있다는 생각도 그러하며, 성령이 있다는 생각도 그러하며, 불성이 있다는 생각 또한 그러하다.
'내가 살았다'는 생각도 그러하며, '내가 죽었다'는 생각 또한 그러하다.
'내가 있다'는 생각 또한 그러하며, '내가 없다'는 생각 또한 그러하다.
'인생에 정답이 없는 이유'는 이렇듯 상대적인 말, 말, 말(지식, 경험된 생각, 마음, 감정, 느낌)에 대해서 '자아' (我)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나 아닌 것-에 대해서 -나-라고 아는 앎이 착각(원리전도몽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감히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일념법 수행자라면 선식과 물마시는 습관을 바꿈으로써 모든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원리에 대해서 분명히 이해함과 아울러 일념수행으로써 마음이 허구라는 사실에 대해서 깨달아 알때, 그때 비로소 이런 말들이 그져 말들이 아니라 사실적인 앎으로써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진리의 길을 가라.
일념법. 일념명상법. 진원법이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일념명상법이 진리이다.
진리. 오직 그것이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