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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혼돈! 과대망상! - 15 생사해탈의 비밀, 영혼, 그리고 환생

일념법진원 2022. 10. 11. 06:51

생사라 함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해탈이라 함은 이해하여 탈출 한다는 말이다.

삶과 죽음을 이해하여 벗어난다는 말이니 말이 안 되는 소리일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육체의 모든 행위가 멈춤을 말한다.

숨이 멎고 맥박이 뛰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오랜 옛날부터 죽은 자의 옷을 갈아 입히고 관에 넣는 일을  이라고 한다.

이 염이라는 말은 일념을 뜻하는 말이다.

오랜 옛날부터 전부터 전해져 오는 귀신들의 이야기와 영혼들이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기에 일념으로 행위를 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일념을 유지하면 귀신이라는 생각도 없으며 영혼이라는 생각도 일어날 수 없기에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불경에는 누진 통이라는 말이 있다.

오 신통은 인간이나 악마나 모두 할 수 있지만 누진 통은 부처만이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생각을 아니할 수가 없다.

생각이 끊어짐을 누진 통이라 한다.

생각이 끊어짐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람들은 빛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죽음은 생각이 끊어짐을 말하는 것이다.

숨이 멎고 맥박이 끊어진 이후에도 생각은, 즉 뇌의 활동은 한동안 행위를 한다.

하지만 육체의 모든 행위가 멈춤에 따라 생각은 육체를 떠나며 휴면상태에 든다.

그리고 그 순간에 아무것도 없음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또 다른 해탈인 것이다.

 

그대가 깊은 잠에 취해 있을 때에 아무것도 없음을 경험하지만 깨어나서는 그것을 전혀 기억할 수 없듯이 죽음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이미 죽었다고 말하는 신인은 한 생각의 집중을 통하여 모든 생각이 사라진 일념 상태에서, 죽은 자의 숨이 끊어진 이후의, 한동안의 남아있는 생각과 같은 아무것도 없음, 즉 공의 상태를 경험한다.

경험이라는 표현은 물론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깨달은 자의 생각은 육체가 숨이 멎고 맥박이 끊어진 이후에, 생각이 육체를 벗어 났던 그 곳에 다다른다.

 

육체가 죽음에 따라 생각이 완전히 끊어진 그곳에서 한 동안 휴면상태에 있던 생각이 육체가 있음을 인식하면서 다시 행위를 시작한다. 그 순간에 육체에 기운이 없다면 그 생각은 휴면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휴면과 함께 사라진다.

 

죽었던 생각은 수행을 하는 자의 육체가 살아 있기에 아무것도 없던 상태의 영혼, 즉 무념의 상태로 수행자의 육체에 남아서 육체를 깨우는 것이다.

 

죽은 자의 생각을 영혼으로 표현한다면 수행자는 생각으로의 삶을 마친 뒤에 영혼에 의한 삶을 살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행을 마친 자는 영혼에 의해 움직이는 물건인 것이다.

 

영혼이나 환생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인간이 이 부분에 대하여 이해를 할 수는 없다.

경험하지 못한 부분에 대하여 이해를 한다는 말은 오해를 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라는 생각이 없을 때의 행위는 무위이다. 그러므로 영혼이라는 이름표는 생각의 다른 표현이며 인간의 본래 성품인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깊은 잠 속에서는 내가 없다.

그때의 생각 없음의 상태인 생각을 영혼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중국의 선사들은 깨달은 자의 행위를 묘 응신에 의한 행위로 표현한다.

나라는 생각이 없는 행위자인 사람의 행위는 육체만이 내가 아니기에 자신의 육체를 위하여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는다.

 

그가 어떤 행위를 하든지 에고는 그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며 그의 생각을 상상할 수도 없다. 다만 그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 낼 수 있다.

오해하지 말라. 그대의 운명을 점친다는 말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욕망으로 인한 나약함을 보기 때문이다.

에고는 그것을 당연시 한다.

그렇게 세뇌되어 살아왔기에 자신의 나약함 조차도 당연함으로 여긴다.

 

살아있으되 죽은 자는 이미 이 사람이 내가 아님을 안다. 육체는 다만 사람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우주의 다른 것들과 같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과거나 현재 미래라는 시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육체가 나라는 인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에게는 수행하기까지의 과정들이 전생이다.

그에게 전생의 기억은 그대가 지나간 꿈을 기억하듯이 꿈속에서 잠시 나타났다 잊혀진 것과 같은 것일 뿐이다.

 

옛 도인들이 전파했던 생사자유자재라는 말이 있다.

이제 그 의미에 대하여 이해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생각의 차이라고 말하였다.

그대의 생각은 내 생각이기에 나, 즉 육체에 한정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 아무리 많은 생각을 하고 우주를 넘나든다 할지라도 나에 한정되어 있기에 구속도 있으며 자유도 있다.

 

손오공의 이야기를 예를 들어본다.

머리카락 하나를 이용하여 여의주를 만들고 무엇이든지 다재 다능하다. 이는 인간의 다른 모습이다. 인간의 생각은 이렇듯이 무엇이든 가능하며, 무슨 생각이든지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자신의 잘난 부분에 대하여 드러내기를 좋아한다.

손오공이 부처에게 도전을 한다.

부처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바란다. 그대의 나는 모르는 것이 없다. 다 알고 있기에 무슨 말을 듣든지 자신만의 지식을 앞세운다.

사람마다 경험하는 바는 다를 수 밖에 없다.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부분에 대하여는 더 잘난 체를 한다.

그러나 그 잘난 나는 아무리 생각을 거듭하여봐도 그대의 나라는 육체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으며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으며, 더럽고 깨끗하고, 크고 작고, 나와 내 가족이 있다.  

 

신인에게는 나라는 한정된 제약이 없기에 과거라는 제약이 없으며, 미래도 없다.

육체의 제한됨에서 벗어났기에 모든 것이 없지만 있으며, 있지만 없기도 하다.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동물도 가족이며 돌덩이도 가족이다. 친구라고 생각하면 산토끼도 친구인 것이다. 현상계의 어느 것이나 모두가 하나일 뿐이기에 구속도 없으며 자유라는 말도 없다.

사과와 수박의 비유를 들은 바와 같다.

 

초기 경전에서 석가모니가 숲 속에서 살기를 원하여 코끼리의 시중을 받으며 살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는 전설과 같이 호랑이가 무릎을 꿇고 선사의 앞에서 절을 한다는 이야기들도 흔하게 나오는 신화들이다.

생각이 자유로운 자, 즉 신인에게는 가능한 일이다.

 

앞에 지나가는 토끼를 보고 호랑이라고 생각하면 호랑이가 되는 것이다.

현상계 모든 것이 말로 만들어진 소리일 뿐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육체에 한정된 생각에서 벗어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인생이다.

그대의 욕망의 실체를 찾아보라.

그대의 한 생각의 변화로 인하여 그대는 항상 평화로운 날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고급 음식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벌래 한 마리만 있어도 구토를 일으키는 사람들, 어릴 때에 체했던 음식을 평생 먹지 못하는 사람들, 오줌을 마시는 사람들, 모두가 한 생각의 차이일 뿐이다.

세상사 모든 일에 대하여 이 한 생각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면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유아기 시절에 세뇌에 의하여 육체에 한정되어있던 나라는 생각은 육체가 쇠해질 때까지 육체를 지배한다. 육체는 우주의 모든 것들과 같이 원인 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며 육체가 사라짐과 동시에 생각은 휴면상태에 들어간다.

이는 그대가 깊이 잠들어 있을 동안의 휴면과 같은 것이다.

살아있으되 육체가 내가 아닌 자의 생각은 자유롭다.

생각은 습관적으로 휴면상태에서 다시 행위 하기를 원한다. 육체가 기능을 할 수 있는 한 다시 깨어나서 육체를 지배하고 싶어한다.

분명한 것은 생각은 육체가 있을 동안에만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생각을 영혼이라는 말로 다시 창조하였다.

이 사람은 수행의 끝에서 생각의 멈춤, 즉 죽음을 경험하였다.

 

화두일념의 집중으로 모든 생각이 끊어짐에 의하여 죽은 자의 나머지의 생각에 머물러 있을 동안, 그 동안에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아무것도 없음에서 육체가 살아있기에 그 생각이,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생사자유자재에 대한 말은 육체에 한정되어있는 사람에게는 언어와 생각을 넘어서 있는 말이기에 설명이 될 수는 있으나 짐작을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망자라는 말은 생각이 없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생각이 멸망하여 없어짐을 말하는 것이다.

신인은 인간의 모든 생각을 망념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그 망념에서 깨어나라고 하는 것이다.

하루 종일 기도하라.

하루 종일 염불하라.

일념 만년이 되게 하라.

일념을 성취하라.

모두가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다.

 

신인은 살아있는 사람이지만 그렇게 죽음을 수없이 경험한 사람이다.

육체의 사라짐이 죽음이 아니라는 말에 대한 설명이다.

옛날부터 모든 신인은 육체만이 내가 아니며 모든 것이 나라고 말을 한다.

우주도 없다, 구도자도 없다. 브라흐만이 모든 것이다 라고 한다.

브라흐만은 진아와 같은 말이며, 부처와 예수 역시 같은 말이다.

 

영생이나 부활, 생사해탈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

 

인간은 생을 통하여 두 차례의 아무것도 없음, 즉 공의 상태를 경험한다.

태어나서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 까지가 그 하나이며, 숨이 멎고 맥박이 끊어진 이

후, 생각이 끊어지기 전까지가 두 번째의 경험이다.

 

그러나 두 번의 경험 역시 기억할 수 없다.

나라는 생각이 남아 있는 한……

 

생사해탈에서 생사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생각의 일어남과 생각의 소멸됨의 이치를 알아차림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육체만이 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났기에 육체는 진정한 내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나라는 생각의 창조물이기에 육체의 삶과 죽음은 나라는 생각이 창조한 연극임을 알아차림이라 하였다.

 

나라는 생각의 탄생은 순수의식 위에 드리워진 환영이며, 그 나라는 생각의 불꽃은 육체가 쇠해짐에 따라 희미해진다. 그리고 육체의 기능이 마비됨과 동시에 그 불꽃은 촛불과 같이 꺼지는 것이다.

나라는 생각은 의지할 몸을 잃는 것은 촛불이 초가 다 타고 난 다음의 불꽃과 같이 사라지는 것이기에 더 이상의 행위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없기에 영혼이 있다라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영혼 역시 생각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상념, 집념, 신념 등의 모든  이라는 말과, 불경에서 말하는 모든 식이라는 말은 생각의 다른 이름들로써 말로 만들어진 소리들일 뿐이다.

또한 발심이나 신심이라는 말 역시 마음을 일으킴, 또는 믿는 마음의 의미로 자신의 마음을 뜻하는 말이며, 마음을 일으켜 생각의 이치를 알게 하기 위한 말들이다.

 

그대의 나의 탄생은 태어남 이후에 내가 할거야 라는 말로 나를 인식 할 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 및 간접경험이 나이며 마음이다.

깨달음과 생사해탈은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다.

신인들의 공통된 가르침이 허공성과 무아 그리고 무위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우주이며 우주가 나다. 라는 말이나 모든 것이 하나다 라는 말, 그리고 불 이법이라고 말하는 분별없음의 이치 등이다.

 

육체만이 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남, 즉 육체가 내가 아니고 모든 것이, 나라고 생각하는 육체와 다르지 않기에 육체의 죽음에 의구심이 없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아닌 것이다.

우주의 주인이 우주 안에 있는 어떤 것이 나타나든 사라지든 거기에 관심이 있겠는가?

 

나의 탄생은 태어남 이후, 가장 큰 사건이다.

생사해탈, 또는 깨달음이라는 말의생각의 본질은 태어남 이후부터 나의 탄생 이전까지의 순수의식이다. 그리고 육체의 죽음, 즉 숨이 멈추고, 맥박이 끊어진 상태 이후, 생각이 남아 있는 무념의 상태가 그 순수의식이다.

 

순수의식에 세뇌를 통하여 탄생된 나라는 생각은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 육체를 지배한 후에 육체가 쇠해짐에 따라서 육체를 떠나게 된다.

그것을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이름표를 붙인 것이다.

그리고 그 순수의식 이후의 자신도 모르게 행위 하는 생각을 신이라는 이름으로 이름표를 붙인 것이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결코 찾아질 수 없기에 이해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종교나 또는 무속신앙, 기타의 집단들은 그 이치를 알 수가 없기에 지나간 신인들의 말을 인용하여 자신만의 생각을 전파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한 구절을 이해하였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말을 합리화 시키면서 종교는 여러 가지의 형태로 변질되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 하나를 알고 넘어가야만 된다.

신이나 영혼, 혼령 등의 모든 신들은 그대의 생각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불교를 통하여 알려진 많은 수행 법들이 있다.

그 중에서 일반적으로 대법당의 벽화에 그려져 있는 황소와 사람의 그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그림의 요점은 생각의 힘이 황소만큼 강하다는 의미이다. 

 

마귀나 마라는 말은 생각의 다른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영혼이나 귀신 혼령 등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환상이다. 

 

앞에서도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지만 신의 행위란 그대의 나도 모르게 행위 하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며, 신을 숭배할 경우에 나타나는 환영은 그대의 나약한 마음이 행위 하는 것이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꿈과 같은 것이다.

 

생사해탈, 영생이라는 말은 육체의 죽음과 상관없는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말이다.

본성의 욕망이 없는 자에게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

진아는 육체가 쇠해지면 육체를 떠날 뿐이다.

진아는 우주의식으로 본래부터 존재해 왔었으며 우주와는 상관없이 영원히 존재할 것임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진아는 결코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으며 본래 있던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육체의 행위는 내가 아니다.

 

진아는 생각이며 신이며, 영혼이지만 그것은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는다.

오직 행위 하는 것은 욕망에 나약한 그대의 마음일 뿐이다. 

세월이 가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마음이 행위하는 것이다.  

 

 

생사해탈에 대하여 정리를 해 본다.

우주 너머 어디엔가 있다고 생각되는 신은 실체가 없기에 행위 함도 없다.

오직 기도를 통하여 행위 하는 것은 그대의 마음이라 하였다.

그대의 마음은 태어남 이후의 자아의 형성됨에서 시작되었다.

그 첫 마음이 나라는 생각이다.

 

본래 성품이나, 견성, 깨달음, 생사해탈이라는 말은 나의 탄생, 즉 내가 할거야 라는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이전의 무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아에서 유아, 즉 나의 존재의 확인 시점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살아온

날들 동안의 모든 기억이 지금 그대의 마음이다.

그리고 그대의 마음은 살아가는 동안 계속 변형되어 갈 것이며 육체가 나라는 집착과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방법으로의 욕망은 끝없이 또 다른 욕망에 이끌리며 살아가다가 육체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대의 삶은 욕망과 만족 사이에서의 갈등이다.

결코 만족으로 해결될 수 없는 욕망의 본질이 나의 참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과정임을 깨닫지도 못한 채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인류의 인생이라는 것이다.

 

이는 아주 명백하고도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것의 답은 이미 알고 있다.

태어남 이후 자아의 형성시점에서부터 지금 그대의 나까지의 모든 기억을 지워 버리면 그 순수의식이라는 생사해탈에 안주하게 된다.

 

하지만 그 수많은 기억들은 그대의 생각으로는 결코 찾아질 수도 없으며, 기억할 수도 없기에 지워질 수도 없는 것이다.

 

불경이나 성경의 핵심은 기도나 참선을 통하여 지금 일어나고 죽고를 반복하는 모든 생각들과 지나간 기억들과의 연결고리를 끊음으로써 육체를 지배하는 생각을 무력화 시키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그 생각을 끊어내는 수행 중에, 생각이 단절될 때 그대는 과거의 전혀 기억할 수 없었던 생각들이 모두다 드러나게 됨을 경험하게 된다. 그 생각들까지 모두 화두에 밀려 사라지고 생각이 휴면상태에 들어갔을 때, 그대의 나라는 생각이 죽는 것이다.

 

그 힘겨운, 목숨을 걸어야 될 만큼 어려운 일을 겪은 예수는 그대의 모든 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여 평화로운 삶이 천국이라고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는 바른 생각으로 마음을 닦아 나가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본질은 참 나를 찾아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라는 말이 그 핵심이다.

육체가 나라는 집착에 의한 욕망을 버리고 버려서 모두를 다 버림이 평화로운 삶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티벳의 사자의 서에는 죽음 이후 49일 동안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신인의 말을 그릇되게 인용하여 탁발하던 승려들의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쓰여진 것이다.

지금의 나의 마음도 모르는데, 죽음 이후의 세계를 왜 걱정하는가?

그대는 결코 태어남도 죽음도 경험할 수 없다.

죽음을 경험할 수 없음은 죽음이 없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왜 내일을 걱정하는가?

 

그 많은 신들은 그대의 마음속에서만 존재한다.

사자의 서는 그대의 인생을 말하는 것이며, 수행자의 수행의 길에서 나타나는 마음이 창조하는 형상들에 대한 내용이며, 그 환영들에 현혹되지 말고 오직 한 생각으로 집중을 하라는 의미인 것임을 이해하기 바란다.

 

불경의 염불은 수행자의 길을 설명하는 내용이며, 성경의 모든 내용은 선하게 살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두 경은 한결같이 기도나 참선을 하여 그대의 본성으로 돌아가라는 내용이다.

순수의식의, 선과 악의 분별도 없는 그대의 본래 성품을 말하는 것이다.

 

사자의 서에 나오는 내용은 구도자의 길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방황하는 시기를 설명하는 과정이 있으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악마가 되기도 하고 천사가 되기도 하며 선과 악의 분별 앞에서 갈등하다가 다시 천상으로 달려간다.

 

그대의 인생사를 신들을 비유하여 허황된 신비를 조장한 것임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를 모두 버리기 위하여 생각을 끊어내는 고된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내용들이다.

화두 하나를 들고 수행을 시작하지만,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밀려들어온다.

바닷물에 돌을 던져서 바다를 메우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황당무계하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 내 마음이 어디 있나, 하고 찾아보라 하였지만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사람에 따라 오랜 기간이 걸릴 수도 있음을 안다.

 

하지만 생각이 하나씩 물러나면서 기억에도 없던 환희심도 일어나며, 악귀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물론 상상의 세계일 뿐이다.

 

가장 큰 마가 나타나는 것은 수행의 정도가 깊어질 무렵이다.

잠시 동안이라도 화두를 잊으면, 선녀들이 나타나기도 하며, 어린아이의 꿈에서나 나타날 것 같은 천상의 세계가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신을 믿었던 사람들은 정신병동으로 실려 가거나 자해를 하는 경우도 많다.

 

깊은 수행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해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상상의 세계는 말 그대로 그대의 마음이 만들어 놓은 상상의 세계일 뿐이다.

마음이 만들어 놓은 환상일 뿐이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방황할 일은 아니다.

 

그대의 삶은 오직 이 순간만이 진실한 것이다.

이 순간을 놓치지 말고, 이 순간에 깨어있음만이 진실한 삶이다.

이 순간을 감사히 여기고 이 순간을 사랑하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