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아트만”이라고 주장했다고 전해진다. 이원성과 다양성은 환상이며 오직 불이일원론이 진리라는 말에 대해서 철학, 문학은 상카라만의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하며 재고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무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트만, 브라만”이라는 말은 경험과 분리된 순수의식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며 “참 자아”와도 다르지 않은 말이다.
에고는 경험과 분리된 의식 또는 육체에 억매임에서 풀려난 자유로운 정신만이 실재한다는 상카라의 말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으며 해석할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경험자가 없는 경험에 대한 설명이기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생각의 미묘한 이치에 대해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인 지성 체는 실체 없는 앎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타인의 말을 듣거나 글을 보면서도 우선 반대할 이유를 찾아서 그것을 합리화시키려는 습성 때문에 더욱더 무시된 것일 것이다.
지식이 않으면 많을수록 고집은 더 강해지며 굽힐 줄을 모르는 것이 에고의 습관 된 버릇이기에 상카라의 불이일원론이 무시당할 수밖에 없었다. 에고의 모든 언어는 상대적이기에 진실 될 수 없음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으며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며 자신이 이기주의임을 절대로 깨우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억된 앎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지식은 자신의 내면과는 단절되었기에 스스로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 에고, 즉 일류의 삶이다.
불이일원론에 대한 연설이 상카라의 주장만은 아니다.
수 천 년 전부터 수많은 인물들에 의해서 不二法, 또는 佛法, 道라는 말로 전해져 왔으나 그 시대의 환경과 지적수준 정도에 적절한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또한 경험자가 없는 경험, 즉 경험했지만 기억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한 내용들이기에 신비스러움으로 변질되어 전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기에 진리의 본질이 왜곡되어 종교화된 것이다.
상카라는 경험된 사고방식의 오류에 대해서 밧줄을 뱀으로 오인한 경우를 비유한 것으로 전해진다. 밧줄을 뱀으로 잘못 본 경우에 그곳에 뱀은 없고 밧줄만 있으나 그것을 뱀으로 아는 한 그것은 죽을 때까지 뱀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과 또는 마술사의 손에서 나타나는 꽃이나 비둘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실재로 알지만 마법사 자신은 그것이 실재가 아님을 안다는 방식으로 설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밧줄을 뱀으로 잘못 본 사람이 밧줄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서 그것이 뱀이 아니고 밧줄이었음을 확인하면서 꿈에서 깨어남을 비유로 든 것으로 보인다.
인류 역사상 지적수준이 최고의 상태인 현 시대에도 생각의 미묘한 이치에 대한 설명에 대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이해한다면 오해하는 것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생각의 미묘한 이치에 대해서는 출산경험이 없는 사람이 출산의 고통과 희열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으나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출산에 대해서 짐작할 수 있음과 같이 경험과 분리된 순수의식 역시 기원전부터 전해져오는 말들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본질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할 수는 있을 것이다.
불이일원론을 간단히 요약하면 사람들의 이것이다, 저것이다, 또는 다른 것이다, 라는 모든 분별은 밧줄을 뱀으로 오인함과 같은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환상이며 오직 실재하는 것은 인간의 “본래성품”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경험이전 또는 경험과 분리된 순수의식이라는 말이다. 앞서 설명된 바와 같이 기억할 수 없기에 상상할 수 없으나 사람은 누구나 말을 배우는 과정과 마음이 형성되는 시기를 경험한바 있다. 망각된 기억에 대한 설명이다.
과학에 의해서 모든 물질은 분자와 전자, 또는 이온으로 표현되는 최소단위와 그 이후에 원자와 원자 핵.......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임에 대해서 밝혀진바 있지만 모든 것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전파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전해지는 문헌으로는 기원전 6세기의 인물인 고타마 붓다 이전부터 존재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타마 붓다의 말이 불교라는 종교에 의해서 왜곡되어 우상숭배사상으로 변질되었으나 경전에는 불이법, 즉 불이일원론의 본질이 남아있다. 사람들은 고타마의 전해지는 말에 대해서 불립문자로 표현하면서도 공사상가라고 분별하지만 경전의 내용 중에서 경전의 핵심이라는 반야심경의 몇 구절을 통해서 그의 본질은 분명하게 전해져 오고 있다. 에고는 空은 공이 아니라는 말에 대해서 해석할 수 없다. 공의 뜻은 “아무것도 없음”의 표현이며 이는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의 “아무것도 없음”의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써 우주의 본질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항미촉법이라는 말은 식별하는 감각기관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며 감각기관에 의한 대상들 또한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보는 자의 마음, 즉 기억된 생각에 의한 분별이라는 뜻이다.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는 말은 없는 것이 있는 것이며 있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는 말로써 본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만 보는 자의 생각으로 보는 것이기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라는 뜻이다. 또한 반야심경의 끝 부분에서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라는 말과 무노사라는 말은 눈으로 보는 세상과 의식으로 느끼는 세상이 없다는 뜻이며 늙음도 죽음도 없다는 뜻이다.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은 일념의 수행을 통해서 無我의 증득함이 부처이며 생각의 이치를 깨달음에서는 고통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며 삶과 죽음도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야심경의 내용들은 자아를 인식하기 이전의 어린 아이와 육체가 나라는 사람들의 행위를 비교한 것이다. 천지만물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육체가 나라는 관념에 의해서 있는 것이지만 아이와 같이 육체가 나라는 관념이 없는 상태에서는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인 것이다. 오직 하나 실재하는 것에 대해서 “불성” 또는 “부처”라고 표현된 것이며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 또한 오직 하나의 실재가 존귀하다는 표현이다.
나라는 인식이 일어나기 전의 아이의 상태에 대해서 無我로 설명될 수 이으며 아이의 행위에 대해서 無爲로 설명될 수 있다. 이는 또한 노자의 무위자연과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 모두가 경험과 분리된 순수의식의 표현이며 불이일원론의 연설이다. 아이가 말을 배우는 과정과 마음이 형성되는 과정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고타마 붓다와 비슷한 시대의 인물 중에서 중국의 사상가로 알려진 노자와 장자의 가르침 또한 불이일원론의 연설이며 소크라테스는 노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철학자로 알려진 소크라테스 역시 불이일원론을 연설한 인물이다.
노자와 장자는 불이일원론의 의 오직 실재하는 것에 대해서 道라고 말했다. 노자는 무엇이 도입니까, 라는 물음에 대해서 상대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상대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자아는 참 자아가 아니라고 하였다. 더 자세한 도에 대한 설명에서는 “도는 어디에도 있다. 만물에 깃들어 있으며 비천한 것, 즉 가라지에도 똥에도 있다.”고 하였으며 또한 “도는 모든 것의 기원”이다, 라는 말을 통해서 창조자, 절대자라고 표현하였다. 사람들은 아름답거나 추하다, 또는 선하다 악하다, 잘한다. 못한다, 등의 모든 관념은 상대적인 것이기에 옳은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도를 깨우침에 대해서 천지만물과 분리되지 않은 자아라고 표현하였다.
장자는 노자의 도에 대한 설명에 대해서 더 자세히 표현한 것으로 전해지며 그의 일화 중, 부인이 죽은 다음에 세숫대야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는 내용이 있다. 부인의 죽음 앞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본 친구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항의를 하자, 노자는 “나도 처음에는 슬펐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음과 양이 만나기 전에 기가 있었고 기가 모여서 나타난 것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임을 알고 보니 슬픈 일이 아니라면서 내가 울고 있다면 자연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는 천지만물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는 말이지만 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또한 잠에서 깨어난 뒤에 ”꿈에 나비가 되어서 노니는 꿈을 꾸었는데, 내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나비의 꿈속에서 내가 사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식의 농담을 했다는 말도 있다. 이는 생각의 미묘한 이치에 대한 설명으로써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라는 설명과 비교될 수 있다.
사람들은 데카르트의 내가 생각하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생각에 의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라는 설명에 대해서 납득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으로 앎을 당연시하기에 생각에 대해서는 무지할 수밖에 없으나 데카르트는 생각의 미묘한 이치를 알아차린 듯하다. 데카르트의 “생각은 신의 뜻”이라는 설명에 대해서 많은 비난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데카르트의 설명으로 볼 때에 그는 생각의 미묘한 이치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한 인물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깨달음으로 표현되는 실재에 대해서 가장 강한 말을 남긴 인물 중의 하나이다. “너 자신을 알라. 그러면 우주를 아는 것이다.” 라는 말로써 노자의 “천지만물과 분리되지 않은 자아”에 대해서 언급하였으며 “검증되지 않은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라는 말은 자신의 절대평등성에 대한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라는 질타와도 같은 것이다.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 말 한마디에서 소크라테스의 절대평등성을 엿볼 수 있다. 법을 만들 때에는 이기주의와 이기주의가 합의된 것이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었기에 법이 만들어진 것이니 악법이지만 있는 동안에는 지켜져야 된다는 논리이다.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에는 선이며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음에 대해서는 악으로 규정하여 법을 무시하는 행위는 평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법은 태양과 같이 평등해야만 되는 것이며 햇볕이 구름에 가렸다고 하더라도 법이 있는 동안에는 지켜야 된다는 당연한 논리인 것이다.
생각은 속성상 한 생각에 머무를 수 없다. 생각이 한 생각에 머물 수 없다는 말은 행복이나 불행 등의 어느 생각에도 길게 머물 수 없음을 뜻하는 말로써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이 아니면 불행이며 기쁨이 아니면 슬픔이며 자유가 아니면 구속이라고 생각하듯이 언어는 상대적이며 생각은 한 생각에 머물 수 없는 것이기에 고통을 겪는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나는 불행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라는 말을 하면서 너희들이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통과 불행은 나라는 생각의 오류에서 비롯된 생각의 작용일 뿐이기에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는 말이다. “신을 영접하라”는 말 또한 생각이 신의 뜻이라는 설명이지만 말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왜곡되었기에 신을 믿는 사람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자 이후에 불이일원론을 연설한 인물이 예수(jesus christ)로 알려져 있다. 예수는 천주교 및 기독교의 교조로 알려져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너희가 마시는 포도주는 나의 피며 너희가 먹는 빵은 나의 살이다.” 라는 말을 통해서 유일자, 메시아로 알려져 있다.
너희가 마시고 먹는 것은 나의 피와 살이라는 말은 나와 우주는 둘이 아닌 하나임을 표현하는 말로써 그 시대의 무지한 인간들에게 우주의식의 견지에서 할 수 있는 말이다.
기원전 또는 예수의 시대로부터 전해져오는 말들은 모두가 전설과 다름이 없다. 문자가 없던 시절이기에 구두로 전해져오던 말들이 신비로움으로 포장되어 전해진 것이다.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 또한 붓다 입적 500년 이후에 500인의 제자에 의해서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진리를 깨우친 인물들의 가르침의 요점은 모두가 불이일원론의 연설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성경의 몇 구절을 통해서 그의 말이 불이일원론임에 대해서 이해될 수 있다.
“내 안에 하나님, 네 안에 하나님”이라는 말, 그리고 내 말이 하나님 말씀이다, 라는 말은 나와 하나님이 둘이 아니며 너와 하나님이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말 한 구절에서도 그 본질을 헤아릴 수 있다. 네 부모도 아니며 네 부인도 아니며 네 아들도 아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너와 이웃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뜻이다.
“하루 종일 기도하여 꿈에서 깨어나라, 어린아이처럼 순수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 라는 말들은 고타마 붓다의 수행과 같이 일념을 성취하여 깨달음이 하나님 나라이며 천국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였다. 진실로 사람이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해서 “성령”이며 천국이라는 말이다.
선악과를 따먹음이 원죄라는 말은 선과 악의 분별함에 대한 말로써 에고의 “나만이 옳다”는 모든 분별함에 대해서 원죄라는 것이다.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모든 말들이 분별임을 말하는 것이다.
오직 나의 말을 믿어라. 나의 말이 진리이며 생명이다, 라는 말에서 오직 나라는 말은 고타마 붓다의 천상천하유아독존의 표현과 같이 “참 나”의 다른 표현이다. 또한 성령은 어디에나 있다. 쪼개진 장작사이에도 있으며 깨진 기왓장 사이에도 있다고 말하며 육체는 질그릇과 같아서 항상 깨질 수 있다는 표현도 전해진다. 고타마 붓다는 육체는 손톱위에 올려놓은 흙만큼도 나라고 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말이며 천지만물과 분리되지 않은 자아라고 표현하는 노자의 말과도 다르지 않은 말이다.
그들 모두의 가르침은 육체만이 나라는 생각의 고정관념인 꿈에서 깨어나라는 말이다. 생각의 이치를 깨우침에서는 육체만이 나다, 라는 생각, 생각,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그때 육체는 천지만물과 다르지 않는 천지만물 중의 어떤 것이기에 깨달음에서의 육체는 나도 아니며 나의 것일 수도 없다. 천지만물의 근원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육체의 본질 또한 이와 같다. 천지만물이 나타나고 사라지며 변해가는 것이듯이 육체 또한 천지만물과 다르지 않기에 죽음은 죽음이 아닌 것이다.
그들이 죽음 앞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나는 기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존경 따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괴팍하게 보이거나 불행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들에게는 불행이라는 생각이 없다.
사람들은 경험과 분리된 순수의식의 망각과 동시에 육체만이 나라는 경험된 앎에 의해서 삶과 죽음의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 것이다.
예수의 “그리스도의 적”이라는 말과 고타마 붓다의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는 말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예수는 나의 말을 옮기는 자들과 언술이 뛰어나서 사람들을 현혹하는 자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는 불이론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자신의 말이 변질 될 것을 우려하여 했던 말이며 특히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강조하였다. 고타마 붓다 역시 “소리와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다”는 말을 통해서 소리, 즉 나의 말을 옮기지 말라고 하였으며 형상, 즉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생각은 시작도 끝도 없이 윤회하는 것이기에 정신집중을 위해서는 생각을 집중하기 위한 대상이 필요한 것이며 집중하기 위한 대상이 있어야만 된다. 그 대상이 특정 우상이 될 경우에 마음은 기억된 우상에 대한 환상을 창조하게 되며 환상이란 무속인 들이 신을 받는다는 행위와 유사한 것이며 기도에 집중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빛, 또는 관세음보살 등의 환상과 일부 종교에서 말하는 방언 등의 정신질환이다.
불이일원론을 통해서 생각의 미묘한 속성, 그리고 진리의 길에 대해서는 설명될 수 있으나 깨달음 이후의 가르침은 불립문자로 알려졌듯이 에고의 생각으로는 해석될 수 없는 것이다. 에고는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듯이 자신의 부재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들의 모든 말들은 에고의 경험된 생각의 범위를 넘어서 있는 말들이다. 경험과 분리된 순수의식에 바탕을 둔 말들은 절대평등성이기에 육체가 나라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의 이기주의적일 수밖에 없는 지식으로는 해석될 수 없는 것이다.
노자의 “도는 어디에나 있다.” 예수의 “성령은 어디에나 있다.” 고타마 붓다의 “불성은 어디에나 있다,” 라는 말은 진리를 깨우친 인물들의 공통된 말이다. 소크라테스와 데카르트는 그것에 대해서 신이라고 하였으며 이는 생각의 흐름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생각의 흐름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기에 생각의 미묘한 행위는 신의 뜻일 수밖에 없음을 설명하기 위한 방편이다.
노자의 “도는 모든 것의 기원이다,” 라는 말은 창조자, 절대자, 유일자의 뜻이다. “아트만, 인간의 본성, 참 자아, 순수의식, 우주의식 등....... 모두가 같은 뜻의 다른 표현들이다.
현 시대와 같이 인터넷에 의해서 세계의 정보가 공유되었다면 상카라는 불이일원론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