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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언어의 기원. 수행의 바른 길 p26~p30

일념법진원 2010. 2. 21. 06:50

생각은 경험, 즉 뇌에 저장된 기억세포에 바탕을 두고 대상을 찾아 흐르는 습성에 의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끊임없이 윤회하고 있다. 경험은 기억이며 기억이 마음이다. 아동기의 아이들은 경험이 없기에 근심과 걱정이 없으며 두려움이 없다. 지식이 많음은 의구심이 많음과 다르지 않으며 많은 지식은 자신의 의식을 짓누를 뿐 분명한 앎은 있을 수 없는 것이기에 지식이 풍부함은 괴로움과 번외의 풍부함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정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열정이 있다면 그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자신의 생각과의 한판 싸움이다. 경험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에서의 삶은 평생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타인과의 싸움이며 전쟁일 수밖에 없기에 회한만을 남기고 죽어야 하지만 이 공부는 자신과의 싸움이기에 공부를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나와의 싸움판에서 벗어나는 일이기에 평화로운 것이며 영원한 자유로 가는 길이다.

공부하는 기간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으나 2년 또는 3년이면 충분할 것이며 더 길어진다 하더라도 공부하는 동안은 평화로움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기에 참된 인생길인 것이다.


어린 시절에 가장 먼저 익히는 일이 걸음걸이이다.

내가 걷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걸음을 걸을 수 있듯이 또는 운전을 하면서도 다른 생각에 몰두할 수 있듯이 인간의 모든 행위는 경험된 습관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에 대해서 전생의 업이라고도 하며 습관, 버릇이라고도 한다. 경험에 의해 버릇 된 행위는 생각의 흐름과는 별도로 이루어지며 이는 저장된 기억세포의 작용이다. 순간생각세포는 찰나지간에 기억세포를 감시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흐르는 강물과 같이 흐르고 있으며 모든 생각은 근심과 걱정이기에 망념이다.

 

지적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시대에는 생각의 미묘한 이치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서의 수행이었기에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생각의 이치를 깨우칠 수 있었다. 생각의 이치에 대해서 설명을 하더라도 분명히 이해하기까지는 열정이 필요할 것이며 오직 일념의 집중상태가 지속됨에서 조금씩 이치를 깨우쳐 나갈 수 있을 뿐이다. 분별하여 궁리함으로써는 생각에 대해서 결코 알아차릴 수 없다는 말이다. 고타마는 생각의 집중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관찰하는 방법으로 진리를 깨우친 인물이다. 생각은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이 떠도는 습관에 따라서 한 생각에 머무를 수 없으나 소를 길들이듯이 천천히 길들여 나감으로써 길들여질 수 있다.

 

고타마의 수행기록을 통해서 알려진 방법의 결론은 일념의 지속을 위한 방법들이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이라는 말이 있다. 예수의 하로 종일 기도하라는 말과 같이 걷거나 서거나 앉거나 말을 하지 않거나 행동하거나 행동하지 않거나 항상 한 생각에 집중하라는 뜻이다. 앉아 있을 때에는 호흡을 관찰하면서 숨을 내쉼을 분명히 알고 숨을 들이쉼을 분명히 알아서 정신을 호흡에만 집중하거나 또는 호흡을 하면서 배가 들어가고 나옴을 관찰하는 방법도 정신을 집중하는 방법이며 숫자를 세는 방법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숫자를 세는 방법도 정신집중에 도움이 되는 방법이다. 걸음을 걸을 때에는 왼발을 띄고 있음을 분명히 안다, 오른발을 띄고 있음을 분명히 안다, 라는 방법으로 발에 집중을 하거나 또는 팔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방법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어떠한 행위를 하면서도 내가 행위 함을 분명히 안다, 라는 생각으로써 즉시, 즉시 알아차림으로써 망상은 잦아들 수밖에 없는 것이며 자신도 모르게 생각에 이끌리던 근심과 걱정 등의 번뇌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타마 이후의 인물들에 의해서 화두라는 수행방법이 개발되었다.

예수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지적수준이 낮은 사람들에게는 가장 적절한 화두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느낄 수 없으나 경험된 기억이 마음이며 마음은 육체가 나라는 집착에서 시작된 욕망이며 욕망 또한 기억된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순수의식, 우주의식”으로 표현되는 자아의 본성은 우주의 주인이며 창조자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욕망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라는 화두는 힘겨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안식처가 될 수 있는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화두의 뜻을 이해함으로써 일념의 의미를 깨우칠 수 있다. 사람들은 생각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지할 수 없기에 스스로 욕망을 억제할 수 없는 것이며 욕망을 채울 수 없기에 고통을 겪는다. 욕망이 결코 만족으로 해결될 수 없음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기에 인생은 고통과 괴로움인 것이다. 예수는 생각의 이치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생각의 일어나고 사라짐”이 신의 뜻이라는 분명한 이치를 설명했던 것이지만 이를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적”들에 의해서 왜곡되어 종교가 된 것이다.


고타마에 의해서 알려진 수행법이 자신의 행위를 관찰하는 방법이라면 예수에 의해서 알려진 방법이 “화두”수행인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하면서도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한 뜻이 그것이다. 고타마의 관법수행보다 진보된 방법이 화두수행이지만 생각의 머무를 수 없는 습성을 한가지만의 방법으로 길들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고타마는 6년이 필요했으며 달마대사는 9년간의 면벽수행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멀고도 힘들 길이지만 생각의 미묘한 이치를 깨우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남과 싸우는 일이 아니기에 수행의 시작만으로도 평화로운 것이다.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고타마 이후에 화두수행을 통해서 깨우친 인물들이 간혹 있었다. 그 중에서 마지막 인물이 육조 혜능선사일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우상숭배에 밀려서 그들의 깨달음은 고타마와는 다르게 평가되고 있을 뿐이다. 깨달음은 모든 인간의 본성이기에 층 차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말 한마디에서도 진의가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우주의식의 견지에서 보는 세상은 이원성이나 다양성으로 분별될 수 없는 것이며 천지만물이 이름으로 창조된 것임을 깨달음에서의 모든 말에는 한 치의 오차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깨달았다, 나는 없다, 내가 부처다, 내가 예수다, 나는 안다.”라는 말을 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에 의해서 혼란만 가중되는 것이며 발전이 거듭될수록 종교와 종파, 유사단체들이 난립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행은 나에서부터 시작된다. 내 마음도 내가 알 수 없으며 생각은 그야말로 미묘하여 생각으로 생각을 헤아릴 수 없기에 생각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일이 진리의 길이다. 헤르만 헤세의 남겨진 말들과 같이 궁극에 가서는 나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육체가 나다, 라는 것도 생각이며 육체가 내가 아니라는 것도 생각임을 깨우치는 것이다. 예수의 말과 같이 사람이 거듭나는 것이기에 경험된 지식으로써는 이해될 수 없으나 분명한 표현이다. 단지 육체가 나라는 앎도 “생각”이며 육체가 내가 아니라는 앎도 “생각”이임을 깨우침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고타마의 관찰하는 방법과 예수의 화두를 드는 방법을 병행함으로써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생각은 항상 대상이 있음으로써 존재할 수 있으며 대상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육체를 잠재우게 함으로써 대상이 없는 상태에 머물지만 잠에서 깨어난 이후에는 나, 즉 경험 된 기억을 바탕으로 나 이외의 다른 대상을 찾아다니기에 깨어있는 동안 내내 멈출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한 구절에 집중하는 동안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한 생각에 머물게 되지만 “나는 누구인가”라는 한 생각에만 집중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종교를 통한 기도나 수련원 등을 통한 명상 등의 모든 행위는 한 생각에만 집중함으로써 번뇌와 망상을 쉬게 하는 방법의 기술이다.

천지만물 중에 오직 육체만이 나라고 아는 것은 나라는 사람밖에 없으며 마음 또한 사람에 한정된 것이다. 하늘에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며 다른 어느 것에도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육체만이 나라는 생각에 의해서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어느 대상에 의지하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며 마음의 작용이 대상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생각하기에 세뇌를 당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화두는 나의 근원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내가 나를 모르는 나는 누구인가-나는 누구인가-나는 누구인가-나는 누구인가, 라는 한 생각에 몰입되어 있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화두는 나의 과거를 묻는 것이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 라고 묻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방법으로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생각의 꼬리를 끊어내어 나는 누구인가, 라는 화두를 이어 나가는 것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그동안의 습관에 의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지만 잊었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나는 누구인가-나는 누구인가-나는 누구인가-나는 누구인가,”를 다시 시작하면 되는 일이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한 생각의 지속됨에 대해서 일념이라고 하는 것이며 일념이 하루 종일 이어짐에 대해서 삼매라고 한다. 예수의 하나님이라는 화두는 자신의 생각을 알지 못하기에 나는 신의 도구이며 나의 모든 행위 또한 신의 뜻이라는 마음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신의 뜻이라는 생각으로 오직 신의 뜻으로 알고 “하나님”이라는 화두에 몰입하라는 뜻임을 분명히 이해해야만 한다.


내 마음을 내가 모르며 내 생각에 대해서는 무지하기에 생각의 이치를 알고 나면 “내 인생”이라고 당연시하던 내 인생은 내 인생일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것을 나라고 착각하고 살았던 것임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만 수행 또한 가능해 지는 것이다.

생각의 미묘함에 대해서는 화두를 들면서 조금씩 이해될 수 있다. 잠들기 전까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생각의 끈을 놓치지 않은 상태에서 잠이 들 경우에는 아침에 깨어나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것은 꿈의 이치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생각은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와 같이 이어지던 생각의 꼬리가 끊어진 상태에서는 행위를 멈추게 되지만 깨어나면서는 꼬리가 끊어지기 전의 생각을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다. 수행이 깊어진 상태의 수행자가 아침에 일어나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가 자연스럽게 들려져 있다면 그는 잠들기 직전, 즉 생각의 꼬리가 끊어지기 직전까지 화두가 들려진 상태였음을 의미하며 깨어나면서 꼬리가 끊어지기 전의 생각이 화두였기에 생각은 화두의 기억을 시작으로 흐름을 이어가는 것이기에 아침에 일어나면서 화두를 들 수 있는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면서 꿈을 기억하거나 다른 생각에 밀려서 화두가 들려지지 않을 때에는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이어나가야 되지만 초보 때에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때에 고타마의 수행방법인 자신의 행위 하나 하나에 대해 관찰하는 방법을 시작으로 하여 자연스럽게 화두에 진입할 수 있다.

화두를 잊으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망념이 시작된다. “오늘은 무슨 일을 할까, 차는 얼마나 밀릴까, 혹시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아침 식사는 맛이 있을까....... ” 등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은 근심과 걱정들이며 하지 않아도 될 생각들이지만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은 아니며 습관 된 버릇일 뿐이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내일을 알 수는 없는 것이며 내일과 미래를 모르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알 수없는 내일과 미래를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누구나 원하던 원치 않던 일어날 일을 일어날 것이며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걱정해서 잘 될 일이 있다면 걱정만 하면 될 것이며 기도해서 잘 된다면 기도만 하면 되겠지만 세상 어느 것 하나도 마음대로 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나를 모르듯이 모든 일은 이미 결정된 것들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내가” 주체라는 착각에 의해서 고통을 겪는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면서 화두를 잊었기에 망념이 시작된다. 이럴 때에 자신의 행위를 관찰하는 소위 “위빠사나”라는 방법으로 화두에 진입하면 자연스럽게 화두를 이어나갈 수 있다. 물론 초보시절에는 생각을 절재 함에 따라 두려움을 느낄 수 있으나 다른 생각에 몰두하면서도 걸음을 걷듯이 화두에 의해서 생각이 길들여지면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고요함과 기쁨 평화로움을 만끽하게 된다.

“내가 눈을 깜박이고 있음을 분명히 안다, 내가 오른 손으로 이불을 밀고 있음을 분명히 안다, 내가 왼손을 짚고 허리를 펴고 있음을 분명히 안다, 내가 일어나고 있음을 분명히 안다, 내가 문을 향하여 걷고 있음을 분명히 안다, 내가 문을 열고 있음을 분명히 안다, 내가 세면실로 가로 있음을 분명히 안다, 내가 물을 마시고 있음을 분명히 안다, 내가 밥을 먹고 있음을 분명히 안다.......” 이렇게 분명히 아는 “나는 누구인가-나는 누구인가-나는 누구인가-로 자연스럽게 화두에 진입하는 것이며 이를 이어나가려는 노력에 의해서 점차로 화두일념의 시간이 길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는 옛날부터 전해지는 화두의 개념과는 분명히 다르다. 지금까지 전해져오던 방법들은 생각의 미묘한 이치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었기에 일부 종교들에 의해서 화두는 신비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며 심지어 화두 수행하는 사람들 방의 문고리만 잡아도 “삼악도”를 면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신비로움으로 전해지고 있다. “선방의 문고리만 잡아도 삼악도를 면할 수 있다”는 말을 듣는 맹신자들은 선방의 문고리를 잡아보기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여 줄을 서기도 한다는 우스운 말이 전해지기도 한다. 삼악도라는 말은 사람이 죽어서 아귀, 축생, 수라 등으로 다시 태어남을 뜻하는 말일 것이다.

현 시대에도 달라진 것은 없다. 수행과정이 이렇듯 신비로움으로 포장되었기에 참된 인생의 길이 종교들의 어리석음에 의해서 가려진 것이다. 생각의 미묘한 이치를 알아차림이 그만큼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화두는 하나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내 마음을 모르는 나는 누구인가, 내 생각을 모르는 나는 누구인가, 나의 근원을 모르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본래 우주의식이다,”등의 구절들이 화두가 되는 것이며 이런 문구들을 반복하거나 또는 지루하지 않을 만큼 하나씩 골라서 해도 되는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등의 문장들도 집중을 위한 훌륭한 화두이며 일념의 힘이 강해지면서부터는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구절 하나에 집중하게 된다. 관찰하는 방법과 화두를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일념의 시간이 길어져가는 것이며 일념에 집중된 시간이 길어진 만큼 망념은 사라지며 그 자리는 “진리”로 채워지게 된다.

망아지가 적당히 길들여진 상태에서도 묶여있던 고삐가 풀리면 달아나려는 습성이 있듯이 생각은 다른 돌파구를 찾기 마련이며 화두의 대상이 우상일 때에는 환상을 보게 되는 것이며 환상을 실재로 여기는 것과 같은 정신질환을 겪는 것이기에 “우상을 숭배하지 마라”고 했던 것이다.           

   

일념만년이라는 말과 같이 오직 일념화두만이 하루 종일 이어지는 경지에서는 지금의 상황과 반대의 상황이 일어난다. 처음 수행할 때에는 하루 종일 망념 중에 화두를 생각하지만 일념이 깊어지면서는 하루 종일 화두일념 중에 망념이 일어남을 깨닫게 된다. 화두일념이 더욱 더 깊어진 상태에서는 “육체가 나”라는 처음 일어났던 생각이 “육체가 내가 아님”을 알아차림에서 싱겁게 웃어버리게 된다. 나와 참 나의 간격은 물고기와 물과의 간격과 같아서 간격이 있지만 있는 것이 아니며 간격이 없지만 없는 것이 아니듯이 물고기와 물은 둘이지만 둘이 아니며 하나지만 결코 하나일 수 없는 것과 같이 깨달음은 한 생각의 차이라고 설명될 수 있으나 “알아차림”의 경지는 경전들의 설명과 같이 부처이며 하나님임을 깨닫는 것이다. 또한 노자의 설명과 같이 천지만물과 분리되지 않은 “참 자아”로써 알아야 할 것이 없으며 해야 할 일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검증된 삶이다.


천지만물의 본질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초와 창조는 나의 태어남과 나의 창조이며 나의 소멸됨이 멸망임을 깨우치기 바란다. 언어는 나라는 생각이 창조한 것이며 언어 중에서 가장 위대한 창조가 있다면 “신”이라는 말의 창조이다. 인간이 자신의 마음, 생각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에 창조된 것이 신이며 신이라는 말로 창조된 것이다. 천지만물이 그러하듯이.......

 

참 자아의 완성을 위한 삶, 인류의 평화를 위한 길이다.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면 오직 “참 자아”를 회복하는 것이며 인생의 목적이며 길이다.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이 글을 바친다.    


-진원-

http://cafe.daum.net/husimwon 에서

 

더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