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내가 사람이다'라는 고정관념에 구속 되어 있다.
사실상 인간이 겪어야만 하는 모든 고통의 원인은 '내가 사람이다'라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이 말이 석가모니와 예수의 가르침의 근본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에 대해서 납득할 수 없는 인간들은 그들을 우상으로, 신으로 숭배하게 된다. 어린아이 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는 사람도 아니다'라고 말을 건넨다면 '미친놈'으로 취급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석가모니 또한 '나는 신도 아니며 더 나아가 사람도 아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석가모니의 말이기 때문에 이런 말에도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불교라는 종교는 이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 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아"라는 말은 사실적인 말이 아니라고 단정 짓는다. 대한불교 조계종의 기초 교리에 나오는 말이다.
종교나부랭이들은 석가모니를 우상으로 여기는 까닭에 석가모니의 말에 대해서는 감히 시시비비를 가릴 수 없으면서도 그의 다른 말들에 대해서는 서로가 자기 관념이 옳다는 주장을 서슴치 않는다. 그리고 그를 우상으로 숭배한다.
예수의 말 또한 그러하다.
예수의 표현은 조금 다르다. '나의 말이 하나님 말씀'이며, 네 안에 하나님이 있으니. 스스로 하루종일 기도하여 그것을 찾음으로 하여 깨어나라고 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시대에 다른 조건에서 태어나고 수행(명상. 사유)으로써 생각의 원리를 깨달은 인물들이다.
만약에 인간이 (석가모니의 말이 올바른 말이기 때문에 석가모니를 우상으로 숭배하겠지만), 석가모니의 앎과 동일한 수준의 통찰이라면 인간 세상이 이토록 시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예나 지금이나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서로가 다투거나 겨루는 짓들을 일삼는다. 만약에 올바른 앎이라면 다툼이 일어나거나 논쟁을 일삼거나 또는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거나, 서로가 경쟁하거나, 더 나아가 인간들 끼리의 참혹한 전쟁으로 삶을 마감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내가 사람'이라는 앎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이 고정관념일 뿐, 그릇된 앎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사람이다'라는 말에는 근거가 없다. 그대는 '내가 있다'고 알며, '내가 사람이다'라고 안다. 아니 그대 뿐만이 아니라 육십여억의 인간들 모두가 그러하다. 하지만 육십여억 인류 모두가 '내가 사람임에는 틀림 없다'고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사람이다'라고 아는 앎에는 뚜렷한 근거가 없다. 아니. 아무런 근거가 없다. 이미 죽고 사라져서 흔적도 없는 다른 사람들의 말, 말, 말을 듣고 배워서 '내가 사람이다'라고 알게 된 것이다.
그대 또한 그러하다. 남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 들은 말에 대해서 사실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대가 스스로 '내가 사람이다'라고 알게 된 것이 아니라 타인들로부터 듣고 배워서 아는 것이다. 남들의 말을 듣고... 사실은 그대의 모든 앎이 그러하다.
인간들이 모든 지식이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은 상대적인 것이며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편견이며, 단견이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앎이 단 하나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해서 '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명색으로는 사람이다. '진원'이라는 이름과 '형상(모양)'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나라고 단정 짓지 아니한다. 나는 '내가 사람이다'라고 단정 짓지 아니하며, 그렇다고 하여 내가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 짓는 것도 아니다. 둘 다 근거가 없는 말, 말, 말이기 때문이다. 옳바른 앎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는 상대적이다. 언어가 상대적이기 때문에 상대적일 수 밖에 없는 언어로 표현한다면, 인간들 모두는 '내가 사람이다'라고 생각 하지만, 나는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지극히 단순한 수많은 생각들 중에 한 생각인 '생각의 차이'이다.
본래 사람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절대자나 창조자가 있다고 생각한다.
--- 내가 사람이기 때문에 신이나 절대자나 창조자가 없다고 생각할 수 없다.
'내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다.
'내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운명의 신이 있다.
'내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다.
'내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처님이 있다.
'내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삶이 있다.
'내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주가 있다.
'내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천지만물이 있다.
'내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이 있다.
'내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개 때문에 모든 고통이 있다.
'내가 사람이다'라고 생각 하기 때문에 세상이 있다.
'내가 사람이다'라고 생각 하기 때문에 삶과 죽음 등의 모든 고통이 있다.
이것이 석가모니의 연기법의 전모이다.
'내가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것들이 있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것들이 없다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명상이란 본래 올바른 앎에 바탕을 둔 올바른 사유에서 유래된 말이다.
올바른 앎에 바탕은 둔 사유로써 일념삼매 이르게 된다.
그리고 무상삼매(일념삼매)에서 알아차리는 것이 '육체가 나라는 앎'이 올바른 앎이 아니라 착각(원리전도몽상)이라는 사실이다.
'육체가 나다'라거나 '육체가 내가 아니다'라는 분별된 앎이 아니라, 육체가 나라는 생각일 뿐,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이다.
'내가 사람이라고 아는 세상' 즉 '지수화풍이 있는 세상'이 있기 때문에 '지수화풍이 없는 세상'이 있다는 말이 연기법의 전모이다.
인간세상의 문명은 본래 무명이다.
언어가 상대적인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에 대해서 사실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와 너라는 말(앎)이 상대적인 말이며, 나와 마음이 상대적인 앎이며, 나와 우주가 상대적인 것이며, 나와 천지만물이 상대적인 것이다. 인간의 모든 앎은 '내가 있다'는 상대적인 앎(말. 생각)에 바탕을 둔 앎(생각.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앎(말)이 겨자씨 만큼도 없다고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의 모든 앎(말. 자기주장)에 대해서 근원적 무지라고 하는 것이다. 文明이 문명이 아니라 無明이다.
지나는 길에 한마디 하고 넘어가자.
인간이 짐승보다 나을 것은 없으나, 그나마 아주 조금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부모를 섬기는 일이다. 자식의 노예가 되는 일은 가장 가치 없는 일이다. 충효사상이라는 말은 어리석은 자들의 망상이다. 임금을 섬기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부모를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의 사상은 중생견이다. 최소한 명색이 사람이라면... 부모에게 효도하라.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하면서 그렇지 않다면 살아갈 가치도 없다고 한다. 하지만 어찌 하겠는가? '내가 사람이다'라고 안다면 부모에게 지극 정성을 다하는 것. 그것 하나 만으로도 절반의 죄(회한. 여한)은 덜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선과 악이 있다면 가장 큰 선이 부모를 섬기는 일이며, 가장 큰 죄가 부모를 섬기지 못한 죄이다. 부모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길잃은 어린 양과 같이 어리석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식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와 강아지가 무명이다. 그리고 무명과 행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앎(말)이다. 그 최초의 앎이 '내가 있다'는 상대적인 말(앎)이다. '내가 있다'는 말(앎)과 '내가 없다'는 말은 상대적인 말이다. 앎과 말과 뜻과 생각과 마음은 동의어이다. 생각대로, 뜻대로, 마음대로, 의지대로, 아는대로... 등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말은 지식이다. 말을 아는 것이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식은 무명이다. 자신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본래 '나 아닌 것'에 대해서 '나'라고 착각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평화로울 수 없는 까닭은 스스로 신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무이다. 그대가 곧 신이다. 그것이 아니면 결코 만족하여 평화로울 수 업다.
순수의식의 어린아이 시절에는 '내가 있다'는 앎(생각)이 없었으며, '내가 없다'는 생각(앎)도 없다.
올바른 앎에 바탕을 둔 사유로써 이런 사실에 대해서 알아차림에 대해서 '道'를 깨닫는 것'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며, '중도'라는 말로 표현 하는 것이다. '중도'라는 말은 상대적인 앎이 아닌 올바른 앎을 이르는 말이다.
포털 사이트에 '명상'이라는 낱말에 대해 검색해 보니.
우상숭배사상으로 전락된 종교들 숫자 만큼이나 많은 명상센타들의 광고를 비롯하여 다른 방식의 명상과 유사한 집단들이 무수히도 많다. 하나같이 모두가 어린아이들의 말장난과 같은... 언술이 뛰어난 자들의 말재간들 뿐이다. 옛 선사라는 중생들의 선문답이나 법거량과 다를 바 없는 우문우답들이다.
올바른 앎이 겨자씨 만큼도 없는 중생들이 또 다른 중생들에게 세뇌(주입식 교육) 시키는 짓들이다. 어린아이들에게 누가누가 잘하나... 라면서 경쟁함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기도록 세뇌 시키는 것과 같다. 짐승들에게 싸움을 시키거나, 강아지를 길들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대 또한 순수의식의 어린아이 시절에 그런 방식으로 길들여진 것이다.
'내가 사람이다' 라고. 그 길들여짐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사람이다'라는 고정된 생각인 고정관념이 생겨난 것이다. 그 길들여짐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원죄'라고 주장하거나, '업', 이라고 주장하거나, 전생의 업,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거나, 천성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순수의식의 어린아이 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무한한 어리석음은 서로가 경쟁을 통해서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말, 말, 말(앎. 지식)에 대해서 사실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착각이다. 서로가 싸우고 이겨서 승리해야 함에 대해서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피를 흘리는 전쟁 속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 하는 것이다.
지식의 무한한 어리석음이다. 권투 선수가, 모든 인간들의 삶이 그렇게 세뇌 당하여 권투선수와 같이 싸움질을 일삼는다. 그것에 대해서 시합이라고 한다.
피땀을 흘리며 승리하는 자가 행복한 자인가?
패배하는 자가 행복한 자인가?
하나가 행복하다면 상대는 불행하다.
그렇다면 싸우지 않는다면 불행한 것인가? 행복한 것인가?
왜, 둘 다, 모두 다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는 것인가?
왜 그리도 비참하게 투쟁해아만 하는가?
어찌하여 경쟁을 멈출 수 없는가?
어찌하여 다툼을 멈출 수 없는가?
어찌하여 전쟁을 멈출 수 없는가?
삶의 목적이 겨우 남들과 경쟁하기 위해서인가?
인간과 인간이 아닌가? 같은 인간들이 아니란 말인가?
삶이 그러하니 어찌 가치 있는 삶일 수 있겠는가?
삶이 전쟁이니 어찌 죽음 앞에서 회한이 없을 수 있겠는가?
가치 있는 삶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가치 있는 삶이 어떤 삶이겠는가?
그렇다.
명상. 올바른 앎에 바탕을 둔 올바른 사유로써 자신의 본래성품을 회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름 하여 진리의 길이다.
진리로 거듭 나라는 말이다.
순수의식의 무명의 행위인 어린아이의 행위가 깨달음이라는 말은 아니다. '내가 사람이다'라고 아는 인간들을 제외한 천지만물의 행위는 순수의식의 행위와 같이 주체가 없다. 행위자가 없다. 오직 '내가 사람이다'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들만이 '내가 행위자'라는 주체가 있다. 순수의식의 어린아이가 주입식 교육(세뇌)에 의해서 '내가 있다, 내가 사람이다'라고 아는 앎(말. 생각)이 최초의 앎인 경험의 오류지만, 강아지는 자라나서도 '내가 강아지'라는 분별된 생각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무명의 행이다. 그렇듯이 짐승이나 동물들 또한 '내가 동물이다'라는 생각이 없다. 그것들 마져도 삶이라는 생각도 없으며 죽음이라는 생각도 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신이 될 수 없지만, 인간은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올바른 앎으로써 인간의 관념으로 본다면, 신이 되는 것이며, 부처가 되는 것이며, 예수의 말과 같이 '성령'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것의 기원이다. 그것의 다른 이름이 '진리'이며 '도'이다. 한 생각의 차이이다. 그 한 생각을 극복하여 그대가 신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확인한다면... 어찌 두려움이 있겠는가?
그대가 창조자.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알아차림)이라는 말에 대해서 연기법으로 설명한다면, 올바른 앎이 아닌 '나(我)'가 있기 때문에 우주를 비롯한 천지만물이 있는 것이며, '나'가 없다면 천지만물도 없으며, 생로병사도 없다는 것이다. 생각에 의해서 비롯된 말, 말, 말이 있기 때문에..., 말에 의존하여 '나(我)'가 있기 때문에 '본래 무일물'이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본래무일물'이라는 말 또한 말이기 때문에 말변사라고 할 수밖에 없다. '말변사'라는 말은,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만, 말로 변화 되어 있는 사건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말변사라는 말 또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로써는 표현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道'라는 또 다른 말로 표현된 것이다. 이름하여 명색이다.
12 연기법에 대해서 설명하자.
전편에서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중의 '명색'에 대해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생각의 원리까지 설명 되었다. (이런 설명들 또한 지극히 일부분에 대한 것들이다). 그리고 12연기법은 열두가지가 윤회한다는 뜻이 아니라 고통이 생겨나게 된 원인에 대한 설명이라고 했다. 마음이 고통의 원인이기 때문에 마음이 생겨나는 과정에 대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12연기법이다. 책에는 인간의 성장 과정으로 설명되었다.
'識'이라는 말은 단순한 말로써 '앎'이라는 말이며 '지식'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석가모니의 말이 한자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관념으로 이해 할 수 없도록 난해하게 표현된 까닭은 불경이라는 경전이 올바른 앎이 겨자씨 만큼도 없는 중생에 의해서 한자로 변환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중국으로 건너가기 이전에 이미 우상숭배사상으로 전락된 것이기 때문에 우상숭배를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다. 그러니 더욱 더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인간들의 모든 앎은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아는 앎이 아니라 앞장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모두가 명색의 동일시이다.
'6입'이라는 말 또한 명색의 동일시에 따른 앎이다.
'육입'이라는 말과 '육식'이라는 말, 그리고 육바라밀, 육도윤회... 등의 여섯이라는 숫자는 어떤 깊은 뜻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7. 8. 9식이라는 말이나, 선악업을 간직한 식이라는 말 등은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망상에서 비롯된 말이다.
반야심경에는 '오온이 공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실상 오온이라는 말은 "안, 이, 비, 설, 신" 의 다섯가지 감각기관을 이르는 말이다. 반야의 지혜로 보니 감각기관이 본래 없다는 말이다. "반야의 지혜"라는 말은 '통찰'이라는 낱말과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다섯가지의 감각기관이 없다'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의 순수의식에 대한 설명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고 익히기 전에는 눈으로 본다는 생각이 없으며, 귀로 듣는다는 생각이 없으며, 코로 냄새를 맡는다는 생각이 없으며, 피부로 감촉을 느낀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생각이 있는 사람들의 관념으로써는 어린아이도 '내가 사람이다'라고 알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린아이에게는 그런 생각... 분별된 생각이 없다. '없다'라고 단정짓는 까닭은 올바른 사유로써 '그것'에 이르러 확인 했기 때문이다.
육입이라는 말은 육식과 같은 뜻이다.
'육식'이라는 말은 다섯가지 감각기관과 감각기관에 의해서 알게 되는 앎(느낌, 생각)을 합한 것일 뿐, 다른 뜻은 없다. 다만 인간은 눈으로 본다고 아는 것이며, 귀로 듣는다고 아는 것이며, 코로 향을 느낀다고 아는 것이며, 입(혀)으로 맛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피부로 촉감을 느낀다고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감각기관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한다. 이런 앎이 올바른 앎이 아니라 착각이라는 말이다. 눈, 귀, 코, 혀, 피부의 감촉,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아는 앎에 대해서 '육식' 또는 '육입'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은 무지이며 무명이며, 올바른 앎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올바른 앎이 아니기 때문에 '무명'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며, 올바른 앎에 대해서 '광명'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불경에 흔히 등장하는 '無明'과 '光明'이라는 낱말에 대한 올바른 뜻이다.
불성을 본다거나, 빛을 본다거나, 성령을 본다거나 후광이 비친다는 말 등의 '광명'이라는 말에 대해서 불빛과 같은 빛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무한한 어리석음의 소치이며, 무명이다. 무식하고 어리석으나 언술이 뛰어난 자들에 의해서 가공된 말들이다. 모든 경전이라는 잡서들이 그러하다.
인간은 누구나 그렇게 배워서 아는 앎에 대해서 올바른 앎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간단한 설명을 통해서 지적으로도 이해는 가능한 말이다.
가령 그대가 어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돌이켜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각기관의 작용이 감각기관 그 자체의 작용이 아니라 기억된 생각의 작용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다. 그대는 혀의 작용으로 맛을 감별한다고 아는 앎에 대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쓴맛과 신맛, 짠맛, 단맛을 느끼는 것은 혀의 작용이다. 그대가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제의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어제 눈으로 본 것에 대해서 기억할 수 있다. 옛날에 만났던 사람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때 그대가 본 것은 눈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대가 보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기억된 생각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때에 보았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그대는 본 것이 아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의존해서 본다는 뜻이다. 눈으로 보았다고 생각, 생각, 생각하는 것이다.
어제 맛있는 음식을 먹을때에는 분명히 혀의 작용에 의해서 맛을 느꼈다. 돌이켜 보면 어제는 맛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일에 몰두하여 맛이 있고 없음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다면, 기억된 생각이 없다면 혀는 무용지물이라는 뜻이다. 그대의 모든 느낌이나 모든 언행은 생각에 의존하여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사유'라는 말은 '생각을 생각함'이라는 뜻이다.
생각의 원리. 생각의 속성과 이치라는 말은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다. 인간세상에 '내가 사람이다'라고 주장하는 모든 인간들의 앎인 지식으로써는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말이 '생각의 원리'라는 말이며, 생각의 이치라는 말이며, 생각의 속성이라는 말이다. '인식론'이라는 말이 있으나 인식 또한 인식이라는 생각에 불과한 기억된 생각 중의 하나인 생각에 불과한 말(생각)이다.
석가모니의 제자라는 상을 가진 머리깎은 중생들의 종교라는 불교에서 주장하는 '윤회'라는 말이나 '육도윤회'라는 말의 실상이 그러하다. 감각기관과 감각기관에 의해서 일어나는 앎을 합하면 '여섯'이라는 숫자가 나오게 된다. 이런 여섯가지의 앎에 의존하여 일어나는 생각이 끊임없이 반복 순환됨에 대해서 윤회라고 생각(착각)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만약에 석가모니가 '윤회'라는 말을 했다면 그것은 생각의 끊임없이 반복 순환됨에 대한 표현이다.
석가모니의 말 중에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있는데, 책에 촛불을 비유하여 설명한 말과 같은 말이다. 석가모니는 모닥불을 비유로 들었지만. 초에 불일 붙이면 불이 있다. 초가 다 타고나면 불은 사라진다. 그렇다면 그 불이 어디로 갔느냐고 되묻는다는 내용이다. 불이 동으로 갔느냐, 서로 갔느냐, 남으로 갔느냐, 북으로 갔느냐, 하늘고 갔느냐, 땅으로 갔느냐... 라는 방식이다.
죽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산자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죽음이란 그대가 깊이 잠든 것과도 다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보면 보는 즉시 무수히 많은 생각이 일어난다. '바닷가'라는 소리를 들으면 바다와 연관된 수많은 생각들이 일어난다. 음식의 맛을 보면 어린시절부터 지금 까지 경험 했던(뇌세포에 저장되었던) 모든 생각들이 찰나지간에 줄줄이 일어난다. 그때 그 맛, '어머니의 손맛'이라는 말과 같이...
이런 생각의 원리는 설명으로써 이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올바른 앎에 바탕을 둔 올바른 사유로써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만 비로소 인간세샹의 어떤 말에도 말에 미혹되거나 현혹되거나 세뇌 당하지 않는 올바른 앎으로써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에 대해서 관념으로나마 이해에 근접할 수 있다면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가장 요약되었다는 반야심경의 모든 내용들에 대해서도 이해가 가능 할 수 있다. 조금이나마 이해가 가능 할 수 있어야만 올바른 사유에 대한 설명에 대해서도 이해 할 수 있다. 그래야만 일념법명상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은 육도 윤회와 12연기법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다. 본래 12연기법이라는 말은 '안이비설신의'와 그 대상인 '색성향미촉법'을 합한 숫자이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우상숭배사상으로 전락 되면서 쓸데 없는 군더더기가 많이 붙여진 말이 '안이비설신의'의 '의'라는 말이며, '색성향미촉법'의 '법'이라는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야심경의 해설에서 다시 설명하자)
12 연기법에 대해서 정리해 보자.
무명의 행에 의지하여 앎이 생겨난 것인데, 그 앎(말)이 곧 명색으로써의 앎(말)이며, 명색으로서의 그릇된 앎(말)이 감가기관의 작용을 아는 앎이며, 여섯가지의 앎에 대해서 '육입'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 사실상 육입이라는 말은 '육식'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며, 모든 고통의 원인인 마음이 생겨났음을 일컷는 말이다. 고통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순수의식의 어린아이 시절부터 시작된 주입식 교육에 의존하여 생겨난 것이 '마음이다' 라는 결론이다.
마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며, 그렇게 알게된 앎(마음)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는 말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근본이다. 명상. 사유의 이유이다. 우상숭배에 길들여 지지 않고, 자신이 그것이 되기 위한 유일한 길이 올바른 앎에 바탕을 둔 '사유(명상)'이기 때문이다. 일념법. 일념 명상법. 일념 윤회법이 진리이다.
다음 편에 계속하자.
12연기법의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의 뒷 부분인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의 설명은 반야심경의 내용들과의 연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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